기표와 기의가 다른 <사회>에서의 말하기
장강명 작가의 <표백>과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읽었다. 데뷔를 2011년에 했다는데 데뷔 후 출간된 책들을 보면 참 꾸준히도 열심히 쓰는 작가라는 걸 알 수 있다. 기자 출신이라는 말을 들으면 아, 할만한 글을 쓴다. 결은 다르지만 김훈이 기자 출신이라는 말을 듣고 아, 했던 것과 비슷하다. 문제를 다루는 시선이 '개인'보다는 '사회'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사회가 바뀌지 않는 한 세계는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소설에 깔려 있는 듯하다.
<알바생 자르기>도 마찬가지이다. 사장, 중간관리자, 알바생은 전형적인 제 몫의 역할을 소설속에서 해내고 있다. 나는 은영의 입장이 이해되었다. 나는 솔직히 알바생 혜미의 행동이 밉기도 했었는데 그런 생각이 '나쁘다'라는 인식이 나의 말을 (괄호) 속으로 넣어 버렸다.
이 소설에서는 속엣말을 괄호로 옮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아무튼, 사장님이 혜미씨 붙임성 이야기를 저한테 여러 번 지적을 하셨어요. (넌 혼이 나도 이미 여러 번 혼이 났어야 했다구.)"
은영은 혜미를 미워하면서도 어쨌든 '좋은 상사', '배려심 많은 상사'로 남고 싶어 한다. 나쁜 말은 돌려 말하고 진심은 괄호로 삼킨다. 이러한 말하기 방식은 사회에서 만연하다. 그리고 그러한 말하기 방식이 사회를 지탱해 주기도 한다.
그래서 그렇게 간신히 지탱된 사회가 괜찮은가? 거기에 대해선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혜미의 퉁명스러움에 대해서, 정상 퇴근을 하고 부리나케 회사를 나서야 하는 사정에 대해서, 영어 실력이 변변찮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서. 사장과 은영은 모르지만, 우리는 마지막에 보았지 않은가. 혹시라도 돈을 잃어버릴까봐 겁을 내고 빚 독촉을 받고, 인대 수술을 받고 있는 혜미의 마지막 모습을.
개인 한명 한명에게 연민을 품고 보듬기란 쉽지 않다. 쉽지 않은 게 아니라 그건 불가능하다. 답이 나지 않는 주제로 이야기를 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혜미가 계속 남았다. 그냥 다들 그런 남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