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는 습관 013_2020.01.22
급여 : 면접 후 결정
이력서를 좀 넣어 본 사람들은 저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이다. 최대한 돈을 적게 주고자 할 때(신입은 최저시급부터 시작할 때) 저런 식으로 눈가림을 한다. 그러면 또 대부분의 회사가 최저시급이라도 잘 챙겨주느냐? 아니다. 최저시급에다가 퇴직금도 포함시키고 상여금이 따로 있으니까 어차피 똑같은 거다 구슬려서 연봉을 대폭 삭감시켜 버린다.
요즘 세상에? 라고 누군가는 묻겠지만 아직도 주위에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능력 있는 지원자들을 앉혀 놓고 부모님의 직업과 혈액형 따위를 아무 생각 없이 묻고 앉아 있다. 전 직장 이야기이다. 물론 다른 데라고 별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여러 가지 문제로 한동안 시끄러웠다. 조그만 사무실에서 몇 달 동안 퇴사한 직원이 여섯이 넘었다. 협업이라는 구실로 다른 회사의 일이 떠밀려 왔다. 여자 직원은 직급을 달고 있는 사람이 나 하나였다. 여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수위 간당간당한 말들이 듣기 힘들었다. 누군가 나에게 속을 터놓는 것도 사실 부담스럽고 힘들 만큼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그렇게 퇴사를 하고, 여유롭게 쉬다가 위태롭게 구직을 시작했다. 잡플래닛은 많은 시행착오를 줄여주지만 동시에 많은 선택지까지 줄여준다. 조건이 괜찮다 싶어서 잡플래닛에 들어가면 왜 이렇게 이 세상엔 악덕 회사가 많은지. 다들 자기가 다니는 회사에는 오지 말라고 장문의 글을 써놓는다. 스타트업은 체계가 없고 오래된 회사는 체계를 돌이킬 수 없게 고리타분하다. 이쯤 되면 창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
쉬는 동안 창업도 생각해 보고, 프리랜서도 생각해 보고, 스토리 작가도 고려해봤지만 역시 제일 최고인 건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쟁이가 최고인 것 같았다. 실패를 하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했다. 실패할 선택지가 없는 사람들한테는 안정된 회사라도 들어가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최근에 본 면접 때문에 또 벌써부터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이 들었다. 1시간 반 동안 진행된 면접에서 대표는 내가 마음에 든다고 같이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진짜 이야기는 시작하지도 않았다. 나는 웃으며 조심스럽게 그럼 연봉은? 하고 묻자 그제야 대표는 약간 심각해지며 내가 생각한 거보다 낮은 연봉을 부른다.
“이 정도 생각하고 온 거 아니었어요? 내가 절대 돈 가지고 섭섭하게 만드는 사람 아니야. 일 잘하면 당연히 더 올려줄 거예요.”
그 섭섭하지 않은 돈 지금 조금 올려주면 안 되는 건지.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겨우 끌어올린다.
“혹시 그럼 상여금이 따로 나오나요?”
“상여금? 상여금이 뭐야? ○○씨 상여금이 뭐야?”
호명된 ○○씨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명절 때 주는 보너스 같은 거라고 말한다.
“아, 그거. 상여금이란 말은 또 처음 듣네. 주지. 그럼 그건 넘어가고. 또?”
“그리고... 연차는...”
“아, 연차. 그래 요새 사람들이 연차를 궁금해하더라고. 나 쉴 때 연구원들 다 같이 일주일씩 두 번 쉬어. 다들 그러면 많이 쉰다고 하더라구.”
“아, 그럼 따로 연차는 없나요?”
“야근 많이 하고 그러면 내가 다~ 보고 알아서 쉬게 해 줘요. 오후에 출근하라고 하고.”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하는 대표의 말에는 악의가 없다. 저 의심도 악의도 없는 저런 사람이 나중에 제일 무섭다. 내가 늦게까지 일해서 쉬는 게 아니라 내가 한 달을 만근해서 정당하게 받는 유급휴가를 말하는 건데... 하지만 그런 말까지 할 수는 없다.
“아 네. 그럼 혹시 공휴일은 다 쉬나요?”
“토요일 일요일?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나올 수 있는데 그렇게 나오면 평일은 쉬게 해 주지. 당연히 일하면 쉬어야지.”
“아... 그게 아니라. 삼일절 같은 공휴일도 쉬나요?”
“그건 장담하기 어렵긴 한데... 일 있거나 바쁘지 않으면 쉴 수도 있고 일할 수도 있고 그래요.”
그렇게 길고 긴 면접이 끝나고 나는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채로 집으로 돌아 갔다.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워라밸만 지켜지면 연봉은 어느 정도 감수하려고 했지만 여러모로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기다리는 과정에 많이 지쳐서 그냥 다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주변 친구들과 동생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문자를 보냈다. 연봉을 조금만 더 올려주시고 근로 조건을 조금만 바꿔주시면 좋겠다는 말을 길고 공손하게.
서울에 와서 처음 면접을 봤을 때가 기억난다. 그땐 신입이었기에 나를 어필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열심히 하겠다는 말밖에 할 수 없어서 그땐 취직이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해 야근과 주말출근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1년 동안 그렇게 고생을 하니 남들보단 연봉을 많이 올려줬다.(처음 연봉이 워낙 적었기에) 그땐 내 노력이 인정받은 것 같아 기뻤는데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당연히 받아야 할 것들이 있다. 야근을 하면 야근 수당을 받아야 하고 주말에 일을 하면 당연히 그에 맞는 수당이 있어야 한다.
나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내가 지키고자 하는 신념이 과연 얼마나 갈지. 내가 이만큼은 받고 싶다고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나보다 헐값으로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들을 뜯어말리고 싶다. 그 돈으로 자꾸 우리들의 젊음을 팔지 말자고. 포괄임금제 운운하며 열심히 하면 올려줄게 라는 식의 불확실한 말로 퇴근하는 시간도 눈치 보고 싶지 않다.
아마 또 몇 번의 면접을 더 보며 나는 또 내가 가진 어느 소중한 부분이 많이 깎여 나갈 것이다.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 나를 현재 상황에서 분리해 내는 것. 그런 것들이 익숙해지면 좀 더 어른이 되는 것일까. 막막하고 때로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