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습 014. 다이어리: 아날로그의 힘
기록하는 습관 014_2020.01.28
1월 초에 다이어리를 새로 샀다. 매번 예쁘거나 귀여운 커버만 고집하다 올해는 단색의 심플한 다이어리를 샀다. 가죽 느낌의 노란색 커버에 ‘Rainbow'라는 영문자만 귀퉁이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크기는 갤럭시 노트 정도의 크기라서 한 손에 들어오는 느낌이 좋다. 새해가 좀 지나고 사서 할인도 받았다. 제 돈 주고 사기 조금은 아까워서 나는 새해가 며칠 지나고 나서야 다이어리를 고른다. 날짜가 다 새겨진 만년 다이어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값어치가 떨어진다. 새 마음 새 뜻을 새기는 작업은 왠지 1월이 아니고선 감흥이 덜한 법이다.
다이어리는 계속 안 쓰다가 작년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다. 작년 다이어리는 꽃무늬 양장 커버의 얇은 스케줄러였다. 카카오 캐릭터 스티커도 덕지덕지 붙여서 지나고 나니 조금 없어 보였다. 군데군데 빈칸도 많지만 그래도 1월부터 12월까지 중요한 일들은 빼먹지 않고 기록해 놓았다. 특히 책과 영화 감상평은 될 수 있으면 잊지 않고 항상 남겨 두었는데 그때마다 밀린 칸을 채워 넣기도 했다.
나는 올해 다이어리에 2019년에 있었던 특별한 일을 정리했다. 이사, 여행, 퇴사, 요가 등이 특별한 일로 뽑혔는데 기습 연재에서 다뤘던 주제와 겹치는 게 재밌다. 작년에는 새해 목표도 적었는데 아무 의미 없는 것 같아 올해에는 ‘아프지 말고 열심히 벌고 열심히 쓰자.’고 단출하게 썼다. 1월은 정말 별일 없이 지나가 버렸다. 마음이 내키면 혼자 여행이나 다녀오려고 하는데 혼자 여행 간 적은 한 번도 없으니 ‘특별한 일’에 들어갈 만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 달은 영화만 6개나 봤다. 책도 4권 읽었고. 아, 작게 프리랜서로도 일을 시작했다. 꾸준히 독서모임도 매주 진행하고 있다. 백수이긴 하지만 나름 바쁘게 살았구나 싶다.
다이어리는 나만 보는 것이니 부담이 없다. 기뻤다. 재밌었다. 슬펐다. 우울했다.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도 괜찮다. 여기저기 느낌표도 남발한다. 삶이 충만할 때는 사실 다이어리를 잘 안 쓰게 된다. 오늘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 다이어리를 찾게 된다. 그래서 1월의 다이어리는 빼곡하다. 그렇게 쌓인 날들은 금방 한 달을 채우고 금방 1년을 채운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나 싶지만 다이어리를 보며 하루를 되짚어 보면 좀 덜 억울하다. 내가 돈을 이렇게 많이 썼다고? 놀라게 되는 연말정산처럼 어딘가 도둑맞은 것 같은 하루하루가 실은 다 내가 보낸 것이라고 다이어리는 말해준다.
올해의 나는 무슨 특별한 일들을 기록하게 될까. 이젠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없었으면 바라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도 2020년은 꽤 특별한 숫자니 그만큼 특별한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 새해 첫 달 끄트머리에 새삼스럽게 좋은 일만 가득하길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