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는 습관 016_2020.02.23
이직을 했다. 퇴사하고 한 달은 정말 마음 편하게 여행을 다니고 피아노를 배우며 평소 하고 싶었던 일들을 즐겼다. 그리고 또 한 달은 줄어든 통장 잔고를 셈하며 강박적으로 책을 읽고 영화를 보러 다녔다. 그렇게 퇴사한 지 두 달이 지나자 본격적으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주기적인 수입이 끊기자 돈을 쓰기가 무서웠다. 그렇다고 돈을 안 쓰고 이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기도 아까웠다. 그래서 그 아까운 마음으로 글을 썼다. 차곡차곡 쌓인 글을 넘길 때마다 내가 보낸 하루하루가 존재했음을 느꼈다.
하지만 글은 글이고 돈은 돈이다. 글은 나에게 위안이 되지만 정작 내 ‘위 안’을 채워주진 못했다. 수입이 없자 밖에서 사 먹는 커피가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언제까지 취직이 안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밥값에 준하는 커피를 사 먹기 부담스러웠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커피값으로 더 맛있는 식사를 하고 싶었다. 대충 끼니를 때우는 게 아니라 하루에 한 끼만큼은 괜찮게 먹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먹기 위해 사는 사람에게 금전적인 압박은 하루를 더 허기지게 만들었다. 먹고 싶은 게 늘어날수록 빨리 취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월급날 마비된 소비 감각을 느끼고 싶었다.
적게 쓰고 오래 쉬고 싶다는 욕심으로 일을 그만두긴 했지만 퇴근을 기다리고 주말을 기다리는 삶이 주는 확실한 행복이 그리웠다. 물론 돈 있는 백수라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나가는 돈만 있는 취준생에게 흘러가는 시간도 곧 돈이었다. 매달 월세와 공과금이 나가고 폰 요금과 각종 스트리밍 서비스들이 통장 잔고를 가볍게 했다. 하루하루 숨만 쉬어도 마이너스가 되는 생활을 견디기 힘들어질 때 나는 본격적으로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초조해했을까 싶긴 하지만 이대로 아무도 나를 찾는 곳이 없을까 봐 무서웠다. 더 좋은 곳으로 가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나의 모습이 자꾸만 작아지는 게 느껴졌다.
다행히도 만족스러운 조건으로 이직을 하게 되었다. 연봉은 여전히 미래가 걱정되는 수준이긴 하지만 연차가 있고 정시퇴근으로 눈치 주지 않는다. 예전에는 취미와 일이 겹치는 삶을 꿈꿨지만 지금은 취미와 일이 철저하게 분리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 저녁 6시가 지나면 남은 시간은 이제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이 된다.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가령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벌써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라고 건넨 말처럼, 직장인들은 오후 5시부터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억압 뒤에 이어지는 자유는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다.
이제 입사한 지 겨우 열흘이 지났다. 몇 달 후에는 다시 퇴사하고 싶단 말을 달고 사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심리적으로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고 경제적으로 플러스가 되는 지지부진한 생활에 다시 안착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다. 좋아하는 책과 영화를 보고 글이나 쓰며 살고 싶다는 나의 소망은 다시 기약 없이 미뤄졌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모든 것에는 돈이 든다. 억울한 일이지만 뻔하고 지루한 삶 속에서 어쨌든 돈은 벌어야 하고 글도 쓰고, 돈도 쓰고 살아야 한다.
아아, 3월은 쉬는 날이 하나도 없다. 내일은 월요일이고 이제 자야 할 시간. 모든 취준생들과 직장인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잠들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