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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습012. 4.5평에서 산다는 것

기록하는 습관 012_2020.01.10

by 이연

나의 첫 원룸은 먼저 서울에 올라와 취직한 동생의 두 번째 원룸이었다. 걸어서 지하철까지 8분 거리, 후미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신축 4층의 4.5평짜리 원룸. 동생은 혼자 살기 위해 안전을 택했고 평수는 포기했다. 나는 동생에게 집이 좁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을 별로 실감하지 못했다. 4.5평짜리 (진짜)방과 부엌과 세탁기와 냉장고 등의 세간살이가 다 들어차 있는 4.5평은 완전하게 달랐다. 4.5평짜리 원룸은 신발 벗는 곳부터 터무니없이 작았다. 방의 처음과 끝은 두 걸음이면 충분했다. 모든 자질구레한 잡동사니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수납의 문제가 아니라 공간의 문제였다.


혼자 살려고 구한 집에 한 사람이 더 들어왔으니 집은 완전한 포화상태가 되었다. 처음 내가 가져온 짐이라곤 커다란 백팩 하나뿐이었다. 직장인으로서 필요한 옷과 물건들은 대부분 새로 사야만 했다. 생각보다 챙겨야 할 만한 물건들은 많지 않았고 새로 사야 할 물건들은 차고 넘쳤다. 겨울에 패딩을 사는 것도 두꺼운 이불을 사는 것도 고민해야 했다. 동생과 나는 손만 뻗으면 닿는 공간에서 부대껴 가며 계절을 보냈다. 예민한 중고생 시절에도 같이 방을 써왔기 때문에 그럭저럭 살만했지 남이었다면 한 달도 채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버틸 수 있었던 건 그 집이 어쨌든 동생집이라는 사실이었다. 월세는 나눠 냈지만 보증금은 오롯이 동생 돈이었으므로 나는 쫓겨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제일 참기 힘든 건 젖은 빨래가 마르는 냄새였다. 거의 방의 1/3을 차지하는 건조대에 빨래를 널면 좁은 방은 정말 발 디딜 곳도 없었다. 문을 열 수 없는 날에는 섬유유연제 향을 흡입하며 자야만 했는데 머리가 아프고 목이 따가웠다. 음식을 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싱크대는 라면 물만 겨우 올릴 수 있을 만큼 좁았고 개수대는 프라이팬 하나 씻기도 버거울 만큼 작았다. 동생이 처음엔 멀리서 언니가 왔다고 고등어도 구워주었지만 그것은 마지막 고등어가 되었다. 생선 냄새는 깊고 오래 머물렀다.


화장실도 열악했다. 화장실은 변기를 비껴 문이 열리고 닫힐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만 남겨두었다. 술집에서 흔히 보는 남녀 공동화장실 정도의 크기였다. 변기가 있고, 세면대가 있는. 싸고 손만 씻으라고 만들어져 있는 그 익숙한 크기. 그런데 거기서 우리는 허리를 수그리고 머리도 감고 샤워도 해야 했다. 우리가 그래도 작아서 다행이라고, 우리가 키라도 더 컸으면 이렇게 같이 못 살았을 거라고 웃어넘겨야 살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렇게 이 좁은 곳에서 우리는 웃기게도 정수기를 사용했다. (우리가 원해서 놓은 것은 아니고 나름대로 얽힌 사연이 있다.) 어쨌든 여기서 또 문제는 정수기를 놔둘 공간이 정말 마뜩지 않아 방바닥에 놓고 사용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릎을 꿇고 거의 또 고개를 수그리고 물을 받아먹어야 했다. 더 슬픈 건 정수기를 점검해주시러 오시는 분도 처음에 정수기의 위치에 깜짝 놀라며 허리를 수그리고 정수기를 봐주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애완동물 급수대 같은 높이에서 우리는 정수된 물을 마셨다.



지금은 전세 자금 대출을 받아 반전세로 집을 옮겼다. 전세로 집을 찾았지만 대게 1억이 훌쩍 넘어갔다. 투룸은커녕 넓은 방도 구하기 어려웠다. 동생과 나는 월세를 감수하고 조금 넓은 집을 구했다. 10평짜리 1.5룸이었다. 5평에서 10평이 늘어난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이 두배로 넓어지는 게 아니었다. 싱크대 냉장고 등 꼭 있어야 하는 부분을 제외한 공간이 더 생긴 셈이었다. 화장실도 두배로 넓어졌다. 이제 샤워를 해도 변기까지 물이 튀지 않았다.


방과 부엌이 분리되며 우리는 더 자유로워졌다. 옷에 냄새 밸 걱정 없이 음식을 만들고 빨래를 널었다. 정수기는 이제 서서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작은 식탁 겸 탁자를 사면서 좌식이 아니라 입식으로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2층짜리 침대도 사고 서로의 수면시간을 방해하지 않도록 미니 스탠드도 머리맡에 놓았다. 수납함을 사고 전면 거울도 샀다. 실용적인 것이 아닌 예쁘고 쓸데없는 것들이 하나씩 공간을 차지했다.


그 당시 우리의 금전 감각은 할부 개념으로 자주 환산되었다. 10만 원짜리 매트가 지금 당장은 비싸지만 2년은 쓸 거라고 생각하고 개월로 따지면 고작 5000원도 안 된다는 식으로. 그건 우리가 그동안 참고 산 것에 대한 보상 같은 개념이었고 그 돈이면 여행을 한번 안 가면 된다는 식으로 퉁 쳤다.


하지만 작년에도 여전히 여행은 갔다 왔고 우리는 각자의 매트리스 안에서 편안하게 잠든다. 4.5평 시절, 머리맡에서 냉장고는 가끔씩 존재감을 드러내며 윙-하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좁은 방에서 도망갈 수 없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꽤 한참 동안 이어져서 잠을 설치게 만들었다. 그건 냉장고가 내뱉는 가난한 소음이었다.


지금 만족하며 살고 있는 이 집도 나중에는 좁다고 느낄지 모르겠다. 이제 나에겐 20평, 30평이 낯설다. 5평의 공간과 10평의 공간만 나는 겨우 체감할 수 있다. 서울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집은 꿈도 꾸지 않고 그냥 산다. 로또 당첨돼도 집 사면 끝이라고 자조하며 이상한 도시에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다들 열심히 냄새와 소음을 견디며 버텨가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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