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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습 011. 요리왕 비룡과 광장

기록하는 습관 011_2020.01.05

by 이연

어린 시절 <요리왕 비룡>은 ‘요리’에 환상을 품게 만든 만화였다. 비룡은 매회 새로운 요리를 선보이며 주인공 버프로 항상 요리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는데 그 과정이 정말 흥미진진했다. 계란을 밥알마다 코팅한 것 같은 ‘황금볶음밥’이나 콩고기를 이용한 ‘환상의 마파두부’, 동그란 누룽지가 쩍 하고 갈라지며 소스가 흘러나오던 ‘전설의 누룽지탕’ 등 오래전에 방영된 만화인데도 아직도 그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이 날만큼 좋아했던 만화였다.


<천사소녀 네티>나 <카드캡터 체리>도 정말 좋아했지만 신기하게 <요리왕 비룡>만큼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없다. 재료를 구하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치고 그 요리의 유례가 어디서 왔는지 하나하나 설명해 주던 비룡 덕에 요리는 결과물이 아니라 사연으로 남아 있다. 그런 사연이 담긴 요리는 나에게 입체적으로 남아 있었고 저 음식을 한번 먹어보고 싶다는 이룰 수 없는 욕망이 생기게 했다.

최근에 읽은 김광연의 『밥 먹는 술집을 차렸습니다』는 아주 어릴 때 느꼈던 그 욕망을 재현시키는 책이었다. 이 책은 작가가 혼자 오면 더 좋은 술집이라는 콘셉트로 술집 ‘광장’을 차리고 광장을 운영해나가는 과정을 담은 에세이이다. 챕터는 메인디시, 서브디시, 계절광장, 행사광장으로 나뉘어 때마다 선보이는 사연 있는 음식들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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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을 운영하면서 겪는 여러 에피소드와 여러 행사를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작가의 부지런함이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이다. 단순한 술집을 넘어서서 광장은 말 그대로 열려 있는 하나의 공동체 역할을 하는데 그 공동체는 구성하는 사람은 보통 집단이 아닌 개인이고 마음이다. 읽다 보면 음식만큼이나 훈훈하고 따뜻한 에피소드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그래도 이 책이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음식’을 소개하는 부분이다.


「다음 달부터 겨울 메뉴가 시작되고 치킨남방은 이제 없어진다고 알렸다. 잘 안 나가기도 하고 새로운 메뉴도 시도해보고 싶다는 말에 다들 아쉬운 반응을 보냈다. (중략) 토요일 오후 세 시간 동안 가게를 열고 치킨남방만 예약제로 판매하기로 했다. 예약자가 열 명 이상 모인다면 치킨남방을 없애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중략) 대망의 토요일 오후 한 시, 치킨남방을 지키기 위해 열 명의 위원들이 모였다. 자주 보던 얼굴들도 있었고, 광장에서 일하던 아르바이트생도 있었다. 각자 1인 1치킨남방을 받은 뒤,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이 메뉴를 없애려 했던 나를 역적으로 몰았다.」 p36 10인이 지쳐낸 치킨남방 중(中)


10인이 지켜낸 치킨남방의 맛은 어떤 지, 고기가 없는 양배추 스테이크는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어떤 식감과 맛이 날지, 토마토소스가 배어든 햄버그 스테이크는 어떤 풍미가 있을지 너무나도 즐거운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평소에 먹방을 잘 보진 않는데 사람들이 먹방을 보는 기분이 이런 기분이겠구나 느끼게 된다. 음식이 조리되는 과정과 그 요리에 담긴 내력을 설명해 주는 부분은 당장이라도 책을 덮고 광장으로 가보고 싶다는 욕망이 샘솟았다. 텍스트가 아닌 실물로, 실물만 아닌 맛으로 느끼고 싶었다.


그런데...


「광장은 매해 크리스마스마다 파티를 연다. 그 파티를 마지막으로 그해 영업 종료를 선언하고, 한 달간 쉰다. 다른 사람이 가게를 맡는 것도 아니고 아예 한 달을 쉰다.」 p202 일 년에 한 달 휴가를 갑니다 베지테리언 누들 수프 중(中)


한 달간 쉰다... 한 달간... 그러니까 한 달이면... 지금 1월은 쉰다는 것이다. 이번 주에 가보겠다고 생각하며 입에 침이 고이는 침을 삼켜가며 페이지를 넘겼는데. 실체가 아득하게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너무나 아쉬운 마음에 아쉬운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쓴다. 광장의 실물을 보고 음식 메뉴판을 보며 ‘안다’고 착각하는 것을 얼른 마주하고 싶다. 추천과 검색이란 루트가 아닌 맥락이 담긴 음식은 얼마나 기대되는가. 먹방에 지친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요리왕 비룡을 보며 맛을 상상하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들에게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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