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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 Mar 27. 2020

영화 <이장> 태우기 위해 파헤쳐야 하는 것

정승오 <이장>, 2020

    

영화에 대한 별다른 정보 없이 산뜻한 포스터에 끌려 바로 예매했다. 이장에 얽힌 가벼운 가족극 정도로만 생각했다. 영화의 첫 시작, 반가운 얼굴이 나온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들>에서 “그럼 언제 놀아? 나 그냥 놀고 싶은데.”라는 깜찍한 명대사를 남긴 민준(동민 역)이 등장한다. 아, 그런데 이 아이 보통이 아니다. 수업시간에 말을 안 듣는 건 물론이고, 선생님 말에 바락바락 대들다가 욕까지 한다. 그냥 놀고 싶던 아이는 자라 노는 게 제일 좋은 미운 초딩이 되어버렸다. 선생님은 동민에게 그만하고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무도 동민에게 왜 그러느냐고 묻지 않는다.


1. 한 성깔 하는 캐릭터들

아버지 묘 이장 문제로 네 자매가 모였다. 육아 휴직으로 퇴사 예정인 장녀 혜영(장리우), 바람난 남편의 뒤를 캐는 중인 둘째 금옥(이선희), 결혼 준비가 순조롭지 않은 금희(공민정), 학내 여성운동을 하며 대자보를 붙이는 혜연(윤금선아)까지. 네 자매를 태운 차는 오디오가 빌 틈도 없이 시끌벅적하다. 영화는 장장 20여분 간 큰아버지 관택(유순웅)의 집으로 향하는 자매의 대화로 장면을 채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대화 주제는 서로의 약한 곳을 긁으며 아슬아슬하게 유지된다. 그리고 묘 이장으로 생기는 500만 원을 어떻게 나눌지도 고민이다.

겨우 큰아버지 집에 도착한 네 자매는 장남 승낙(곽민규)이 없다는 이유로 마루에 엉덩이 한번 붙여보지 못하고 쫓겨난다. 혜연은 여전히 남자만 귀하게 여기는 큰아버지 관택 때문에 이렇게 돌아가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차 안에서 길길이 날뛰는 혜연 때문에 네 자매는 차에서 내려 잠시 쉰다. 앞으로 자신은 승낙을 찾을 생각도 없고 앞으로 절대 관택의 집도 찾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혜연에게 금희는 그럼 이장으로 생기는 몫은 없어도 되냐고 묻는다. 금희의 말에 모욕감을 느낀 혜연은 짐을 내려 혼자 떠난다. 싸움에 질린 혜영은 혜연이 혼자 가든 말든 탈 사람만 태우고 떠난다.

<이장> 스틸컷


2. 승낙의 승낙을 위해

이제 장남 승낙을 찾기 위해 영화는 또 20여분을 쓴다. 승낙의 전 여자 친구의 도움으로 네 자매는 승낙의 반지하방으로 모인다. 중간에 다툼이 있었지만 몇십 년을 투닥거리며 싸우고 풀어왔을 네 자매는 몇 번 눈을 흘기고 몇 번 입을 삐죽거린 뒤에 아무렇지 않게 서로를 대한다. 문제는 승낙이다. 이 답 없는 막냇동생은 누나들이 와도 문도 열어 주지 않고 글만 쓰고 있다. 내가 본 올해의 영화 중 가장 최악의 캐릭터이다. 주제가 분명한 영화인 만큼 승낙에게 쏟아부을 수 있는 온갖 답답한 요소들을 다 들이부어서 탄생한 게 승낙이다. 가족들에게 어디 사는 지도 알리지 않으면서 자기 필요할 때만 연락을 하고 피임도 제대로 하지 않아 여자 친구가 임신이 되어도 나 몰라라 잠수를 탄다. 거기다가 찌질하게 누나들만 있다는 걸 인증하라니. 승낙의 얼굴이 클로즈업될 때마다 속이 답답해졌다.

낙태 수술비와 정신적 피해보상으로 7:3의 비율로 500만 원을 요구하는 윤화(송희준)의 말에 혜연만이 분노하며 승낙의 머리통을 후려갈긴다. 하지만 윤화가 필요로 하는 건 피임을 똑바로 하자는 혜연의 분노가 아니라 돈이다. 윤화는 차분하게 오로지 돈을 요구한다. 배가 곧 끊기게 생긴 혜영은 지금 당장 떠나야 하니 우리를 믿든 같이 배를 타고 가든 선택하라고 한다. 이렇게 윤화까지 차에 오른다.    

<이장> 스틸컷


3. 결국 이장되는 묘

또 한 차례 소동이 있기는 했지만 결국 예정된 대로 아버지의 묘는 이장된다. 관택은 마지막 사람 된 도리로 제사를 하고자 한다. 승낙과 관택은 함께 술을 올리다가 벌 때문에 자리에서 나동그라진다. 승낙은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병원까지 가게 된다. 결국 마지막 제사는 혜영이 올리게 되고 아버지의 이장은 순조롭게 마무리된다. 장남이 없이는 이장이 안 된다고 고집하던 관택도 결국은 딸들이 바라는 대로 따른다. 자신이 일평생 옳다고 믿어왔던 신념을 다그치는 아이들 앞에서 관택은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다. 오랫동안 뿌리 박혀 내려온 제도 때문에 서로가 상처를 받고 상처 입히는 말을 해왔다. 조금 더 덕을 본 사람은 있을지라도 모두가 제도의 피해자이다. 오늘 일을 평생 마음에 담고 살아갈 관택 역시.

<이장> 스틸컷


4. 다시 동민으로

영화의 첫 장면, 휴게소, 큰아버지 집에서도 동민은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그리고 그 전엔 아버지에 대한 동민의 물음이 있었다.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동민은 수업시간에 도저히 가만히 그림을 그리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금희 이모에게 자기 아버지에 대해 물어도 대답을 피하고 할머니도 조금만 더 기다리면 아버지가 돌아올 거라는 기약 없는 말을 한다. 어른들은 자꾸만 자기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동민은 도저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을 수가 없다. 그런 동민이 윤화의 손을 잡는다. 윤화는 적당히 둘러 대는 일 없이 사실을 말한다. 다들 속물처럼 보일까 어려워했던 돈 이야기도 정확하게 말한다. 동민은 가장 외부인인 윤화에게 마음을 연다. 어쩌면 가장 위태로운 윤화의 손을 잡는다.

동민은 관택과 승낙과 다르다. 자기 살던 곳에 붙박여 입을 꾹 다문 채 고집을 꺽지 않는 관택과 승낙과 다르게 동민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또 끊임없이 말을 건다. 하지만 동민의 그런 호기심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다음 세대를 상징하기에 동민은 한참 미숙하고 위태롭다. 아버지의 부재는 곧 가부장 제도의 단절을 말한다. 이장 뒤에 화장까지 끝마치고 식당에서 밥을 먹던 동민은 아버지의 얼굴이 기억난다고 말한다. 동민이 기억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아무도 동민의 말에 답해주지 않는다.

<이장> 스틸컷


5. 미처 하지 못한 말

아버지의 이장 문제는 마무리되었지만 이제 각자의 개인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제 남매들은 각자들의 문제를 안고 다시 흩어져야 한다. 힘든 일이 있으면 말하라는 혜영은 사실 아무도 자기에게 기대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혜영이 운전하는 조수석에는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돌아가며 앉는다. 하지만 운전석은 계속해서 혜영의 몫이다. 그 자리가 주는 압박감은 또 얼마나 큰가. 그런 혜영에게 승낙이 묻는다. 누나는 어떻냐고. 누나는 언제 말을 할 거냐고.

뒷좌석에서 금희는 아버지가 딸들에게 전하지 못한 문자를 한참 들여다본다. 너희가 자랑스럽다는 문자와 화질이 떨어지는 꽃 사진이 작은 액정에 담겨 있다. 그 문자가 제때 갔더라면 남매가 그리는 아버지의 모습은 조금 달랐을까. 다들 전할 말을 마음에 품고 차는 계속해서 달린다.

<이장>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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