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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 May 10. 2020

영화 <팬텀 스레드> 마음도 재단할 수 있나요

폴 토마스 앤더슨 <팬텀 스레드 Phantom Thread>, 2017

자신의 세계가 견고한 사람은 다가가기 두렵다. 자신의 취향이 ‘완성’되었다고 믿는 사람에게 상대방의 취향은 오답일 뿐이다. 레이놀즈(다니엘 데이 루이스)에게 알마(빅키 크리엡스)는 자신의 취향에 맞추고 싶은 매력적인 마네킹이었다. 첫 만남에서 알마에게 보내던 사랑스러운 눈빛은 알마의 내면이 아니라 외면이었다. 자신의 옷을 완벽하게 구현해 낼 수 있는 알마의 몸을 원했고, 그렇기 때문에 알마의 취향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알마는 그렇게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알마는 “난 내 취향이 마음에 들어요.”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녀는 레이놀즈에게 쉽게 재단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모든 걸 의지하는 누이를 잠시 떼어 놓고, 그가 싫어하는 버터에 아스파라거스를 졸여 대접한다. 완벽했던 레이놀즈의 세계는 알마에 의해서 통제된다. 그는 마딱치 않은 표정으로 아스파라거스를 씹는다. 평소 같으면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고 딱 잘라 음식을 거절했을 테지만 그는 그녀의 음식을 일단 먹어준다.


“강한 척 마요. 당신은 강하지 않아.”

“그래, 맞아, 맞다고. 내가 날 안 지키면 누군가 한밤중에 나타나 내 자릴 차지하고 앉아.”


레이놀즈는 자신의 규칙을 거부하는 알마와 크게 싸운다. 여기서 알마의 행동은 단순한 인정 투쟁이 아니다. 알마가 인정받고 싶은 건 자신의 가치가 아니라 사랑의 방식이다. 가치가 후순위로 밀려난 알마가 택한 방법은 그를 죽지 않을 만큼 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약해진 틈을 비집고 들어가 알마 자신의 세계에 그가 익숙해지도록 만들고자 한다. 독버섯에 중독된 레이놀즈는 다음날까지 보내야 하는 드레스를 망가뜨리고 앓아눕는다. 알마는 그를 완벽히 통제하기 위해 의사를 불러오려는 시릴의 개입을 막는다. 알마는 자신의 방식으로 레이놀즈를 돌보며 공주의 드레스에 숨겨두었던 레이놀즈의 두려움을 읽는다.


사경을 헤매는 레이놀즈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엄마의 환영과 마주하며 눈물을 흘린다. 엄마의 환영 속에서 알마는 레이놀즈에게로 걸어 들어오고 알마는 그에게서 환영을 지운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알마가 그 환영을 ‘제거’ 한 것인지 그 자리를 ‘대체’ 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다. 나는 알마가 단순히 뮤즈로써 그의 각성의 도구로 전락해 버리지 않았으면 싶었다. 알마가 레이놀즈의 청혼을 승낙하고 난 뒤에도 그들의 삶은 안정되어 보이지 않는다. 레이놀즈는 알마의 취향을 받아들이기보단 견뎌내고 있고 언제든지 전복될 수 있을 것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변화도 자신의 작품도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지 않은 레이놀즈는 그 화살을 알마에게로 돌린다. 여기서 알마는 너무나도 손쉬운 선택을 한다. 레이놀즈를 다시 약하게 만드는 것, 그래서 그가 다시 강해지는 걸 옆에서 지켜보는 것. 다시 한번 그를 위해 알마가 독버섯을 조리하고 그가 이전과는 다르게 행복한 모습으로 먹는 장면은 해석의 여지가 다양하다. 나는 그 모습이 두 사람이 함께 안전하게 파멸의 길로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이 만들어놓은 세계로 그들만의 규칙으로 세상과 단절시키는 것이다.


“그가 이번엔 못 깨어나도 내일 여기에 없다 해도 상관없어요

우린 다시 만날 테니까 저승에서든 어느 별에서든 만날 테니까요

이번 생에도 다음 생에도 또 다음 생에도...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내가 기다리기만 하면

우린 또다시 만날 거예요.

그를 사랑하면 인생의 모든 게 다 아주 확실해지죠."


알마가 낙관하는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레이놀즈는 “지금 우린 여기 있어.”라고 말한다. 지금 여기에서 그들이 만들어놓은 규칙을 또 누가 깨지 않는다면 그들의 삶이 계속해서 유지가 될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약해진 다음에야 강해지는 행위는 상대적일 뿐이다.


“나 이제 배고파.”


레이놀즈의 마지막 대사는 그가 아직 허기져 있다는 결핍의 상태이거나, 이제 다시 다른 것을 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변화의 상태일 것이다. 약해진 레이놀즈를 이제 다시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비워진 레이놀즈를 채우는 것은 알마이다. 그들의 사랑이 그들을 파괴하지 않길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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