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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 May 19. 2020

<톰보이> 드레스가 폭력이 될 때

셀린 시아마 <톰보이>, 2011

나는 어릴 때부터 치마를 좋아했다. 흰 바탕에 펄이 들어간 스타킹을 신고 그 위에 레이스 달린 치마를 입었다. 바쁜 아침에도 머리를 양쪽으로 예쁘게 땋아야 등교를 했다. 분홍색이 좋았고 레이스가 좋았고 반짝거리는 모든 것들이 좋았다.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취향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은 남자아이가 나한테 했던 말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너는 왜 맨날 치마만 입고 와?”


내가 그 말에 뭐라고 답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척이나 당황했을 것이다. 나에겐 너무나도 당연한 거였으니까. 여자가 치마를 입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고. 하지만 난 그렇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질문은 여전히 나에게 유효하다. 난 왜 편하지도 않은 치마를 그렇게 고집했던 걸까. 그건 정말 내 취향이었을까?


엘린 시아마 감독의 <톰보이>는 나와는 정반대인 미카엘(조 허란)을 통해 그 시절의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치마를 입고 쪼그리고 앉아 남자애들이 공차는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나는 무엇을 원했던 것일까. 미카엘이 원했던 건 대단한 게 아니다. 그저 남자애들처럼 웃통을 벗어던지고 축구를 하고 침을 뱉고 삼각팬티만 입고 수영하는 것. 아직 2차 성징이 나타나지 않은 미카엘에게 가슴은 가려야 할 것도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미카엘은 짧은 머리를 하고 웃통을 벗어던지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남성성을 부여받는다. 아이들은 의심하지 않는다.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자라왔기 때문이다. 미카엘이 꾸며 낸 건 찰흙으로 빗은 성기일 뿐이다. 미카엘은 집으로 돌아와서 유치를 모아둔 상자에 오늘 자신의 성별을 바꿔 준 찰흙 덩어리를 넣어 둔다. 유치가 떨어져 나간 자리엔 새 이가 자라지만 성기는 새로 자라지 않는다. 떨어져 나간 유치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 찰흙 덩어리도 마찬가지이다.


친구와 다툰 미카엘은 결국 엄마에게 비밀을 들키고 만다. 엄마는 미카엘에게 드레스를 입히고 미카엘이 속인 아이들을 찾아 나선다. 엄마는 미카엘에게 ‘남자’가 되고 싶은 건지 ‘남자’처럼 자유롭게 행동하고 싶은 건지 묻지 않는다. 엄마에게 미카엘의 행동은 앞으로 딸의 학교 생활과 친구 관계를 망칠 수도 있는 거짓말 정도이다. 그래서 엄마가 할 수 있는 건 아이들에게 사실을 말하고 사과하는 것뿐이다. 그런 미카엘은 진정으로 위로하는 것은 동생 잔이다. 곱슬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분홍색 발레복을 입고 뛰어다니면서도 미카엘의 취향과 행동을 받아들인다. 잔에게 미카엘은 언니든 오빠이든 상관없다. 자신과 함께 놀아주기만 한다면 오빠라고 부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성별보다 중요한 건 누구와 어떻게 노느냐는 것이다.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미카엘은 집에만 머무른다. 그 사이 아기가 새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는 머리칼도 짧다. 아기의 이름도 취향도 알 수 없는 우리는 아기의 성별이 무엇인지 추측할 수 없다.


영화의 막바지에 리사가 미카엘을 찾아온다. 화가 덜 풀린 표정으로 미카엘에게 진짜 이름을 묻는다. 무표정이었던 미카엘이 로레라는 이름을 말하며 입꼬리를 올린다. 둘은 리사와 미카엘이 아닌 리사와 로레로써 새로운 관계를 맺어 나갈 것이다. 미카엘도 로레에게 떨어져 나간 찰흙 덩어리일 뿐이다. 이제 로레로써 남자들과 공을 차고 로레로써 싸워야 한다. 남자가 되지 않아도 로레는 공을 차고 놀고 동생을 괴롭히는 남자 애들과 맞서 싸울 수 있다. 그 싸움 속에서 로레가 끝까지 지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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