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연 May 21. 2020

영화 <나는보리> 자막이 있는 영화를 본다는 것

김진유 <나는보리>, 2018

1. 자막이 있는 영화를 본다는 것


“자막, 서브타이틀의 장벽은 장벽도 아니죠. 한 1인치 정도 되는 그 장벽을 뛰어넘으면 여러분들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막이 있는 영화를 불편해하는 미국 관객을 겨냥한 말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자막이 없어 불편한 사람이 있다. 농인 관람객에게 자막이 없는 영화는 무성영화일 뿐이다. 그들에게 ‘자막’은 장벽이 아니라 들을 수 없는 세계를 보여주는 유일한 수단이다. 한국 영화는 기본적으로 자막을 제공하지 않는다. 기존 농인 관람객들은 배리어 프리(Barrier-Free) 버전 상영 여부를 먼저 알아야만 한국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배리어 프리 상영관 수는 당연히 적다. 외국 영화는 자막이 있는 게 기본이면서도 한국 영화에 깔리는 자막은 성가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보리>는 전국 상영관에서 자막 상영으로 개봉했다. 극 중 주인공인 보리는 집에서 유일하게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영화에서는 보리네 가족이 사용하는 수어와 인물들의 대사가 모두 한글 자막으로 나온다. 자막은 영화를 감상하는 데 전혀 불편하지 않다. 정말 불편한 건 자막이 없다면 누군가는 영화를 볼 권리마저 없어진다는 사실이다.




2. 소리를 잃는다는 건 관계를 잃는다는 것


보리의 소원은 ‘소리’를 잃는 것이다. 가족 모두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게 아니라 자신의 소리를 잃게 해 달라니. 보리는 왜 그런 소원을 빈 것일까?


영화는 장애를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보리의 가족은 소리를 들을 수 없어도 일상생활을 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 하지만 소리가 없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동생 정우의 조용한 수다를 바라보며 보리는 문득 외롭다고 느낀다. 보리도 수어를 할 줄 알지만 모든 걸 다 수어로 표현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보리에게 ‘소리’는 오히려 가족과 멀어지게 하는 ‘장애’이다. 그러한 전복이 흥미로운 영화이다.


하지만 동생 정우는 ‘소리’가 없는 세계가 지루하다. 정우에게 소리가 없다는 건 불편하기보다는 정우를 불안하게 만든다. 정우는 친구들이 웃고 떠드는 말을 모두 알고 싶지만 아무도 일일이 설명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정우가 가장 좋아하는 건 축구이다. 말을 하지 않아도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보리는 소리가 안 들리는 척 연기하며 ‘소리’가 없는 세계의 외로움을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친구들은 보리를 무시하고 어른들은 보리를 쉽게 동정한다.




3. 현실과는 조금 먼 동화 같은 이야기


이 영화는 한 편의 동화 같다. 영화에서 그리는 인물들은 평면적이고, 갈등은 심각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길을 잃어버려도 쉽게 다시 만나고 소리를 잃어버려도 다시 쉽게 찾는다. 큰돈이 드는 수술을 결심하는 장면도 비현실적일 만큼 결단이 빠르다. <나는보리>는 짜장면 두 그릇에 탕수육이 서비스로 나오는 세계이다. 그런 세계는 없다.


영화가 그리는 세계는 투명하게 희망적이다. 보리에겐 ‘소리’가 있든 없든 한결같이 사랑해주는 단단한 가족과 ‘소리’가 들리든 말든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 주는 친구가 있다. 장애는 동정의 대상이 아니다. 외로움은 어느 관계이든 대등하게 발생할 수 있다. 그건 장애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의 문제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리는 부적을 집어던진다. 보리의 소원은 ‘소리’를 잃는 것이었다. 보리의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보리는 좀 더 중요한 걸 알게 되었다. ‘보리’와 ‘소리’는 입모양으로만 발음해 보면 거의 차이가 없다. ‘소리’를 잃어버리는 건 ‘보리’를 잃어버리는 것. 정말 중요한 건 ‘소리’의 있고 없음이 아니다. 그래서 보리에게 부적은 더 이상 필요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톰보이> 드레스가 폭력이 될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