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는 습관 001_2019.11.30
영화는 시간을 견디는 과정이고 소설은 활자를 견디는 과정이다. 영화에서 시간은 절대적이다. 자막을 다 못 읽었다고 해서 관객을 기다려 주는 법이 없다. 소설은 같은 시간이 주어지더라도 독자마다 읽는 양이 다르다. 빠르게 읽는 구간과 천천히 읽는 구간도 저마다 다르다. 그렇게 생각하면 영화는 소설보다 수동적인 매체이다.
하지만 영화는 소설보다 다차원적이다. 일단 소리가 있다. 소리 안에서도 세부적으로 나뉜다. 음성이 있고 음향이 있다. 그 소리들은 단조롭게 흘러가는 화면에 분위기를 더한다. 소리는 귀를 막지 않고서 피할 수가 없다. 잔잔하게 깔리는 OST는 슬픈 장면을 더 아련하게 만들고 기쁜 장면을 더 벅차오르게 만든다.
영화에는 씬(Scene)이라고 불리는 장면이 있고 일부러 깔아둔 복선들이 곳곳에 있다. 소설은 일부러 복선이라고 글자를 작게 쓰거나 촌스럽게 괄호로 묶어서 숨겨놓지 않는다. 그냥 문장들 사이에 공평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1.85:1의 와이드 스크린에서 우린 무언가에 집중하다가 놓쳐버리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읽었지만 머릿속에서 머물지 못한 것과 아예 보지 못한 것은 다르다.
영화는 장르적인 취향을 말하기가 좀 더 쉽다. 로맨스 중에서도 <이터널 선샤인>을 좋아한다고 하는 사람과 <러브 액츄얼리>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다르다. 뭐라고 확실하게 말할 순 없지만 우리는 그 둘의 차이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좋아하는 영화를 공유하는 것만으로 그 사람과 조금 더 마음을 열 수 있다.
좋은 글은 나를 긴장하게 만들지만 좋은 영화는 나를 무장해제 시킨다. 아무래도 내가 앞으로 영화는 못 만들겠지만 지금처럼 글은 계속 쓸 수 있다. 그건 정말 중요한 차이다. 영화는 몰라도 글은 매일매일 한 세계를 창조해 낼 수 있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이 작은 다짐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이 소중한 다짐을 기록으로 남긴다.
2019.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