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 <테넷> 2020
(스포일러 없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테넷>은 시사회 때부터 반응이 뜨거웠다. 테넷을 100% 이해하기 위해선 물리학 석사 정도는 필요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영화에 대한 스토리텔링보다 이론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이해하기 위해 공부가 필요한 영화라니. 그런 영화는 잘 만든 영화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이해하고 싶어서 공부를 하고 싶게 만드는 영화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물알못이라도 느낄 수 있다
학창 시절 ‘물리’라는 과목은 수학과 과학이 혼종된 끔찍한 과목이었다. 물체에 힘이 작용하여 생기는 가속도의 크기는 작용하는 힘의 크기에 비례하고 물체의 질량에 반비례한다는 뉴턴의 운동 방정식은 일단 외워야 할 방정식이 더 늘어났다는 점에서 골치가 아팠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은 몰라도 벽을 주먹으로 치면 아프다는 사실은 안다. 이해는 못해도 느낄 수는 있다. 물리는 나에게 그 정도의 영역이었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느낄 수는 있는 것. 영화 <테넷>도 그렇다. 물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도 느낄 수 있는 영화이다.
문제는 불친절한 플롯
그럼에도 <테넷>이 N차 관람이 필요한 이유는 물리적인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플롯이 복잡하게 꼬여 있기 때문이다. 인버전이라는 개념도 익숙하지 않은데 그 시간을 뒤집어서 각기 다른 상황에서 한 장면으로 잡아버리니 관객들은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악기 하나하나를 연주해주다가 마지막에 오케스트라 연주를 빠바밤 해버리고 다 이해했지?라고 묻는다. 전체는 들었지만 세세한 것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전작 <인터스텔라>도 시간의 층을 이용해 미래에서 과거에 영향을 준다. <인터스텔라>가 시간의 층을 두 겹으로 두었다면 <테넷>은 그 겹이 몇 개인지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게 휘몰아친다. 이것은 물리의 문제가 아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기적적으로 살아나고 누군가는 허무하게 죽는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양자역학을 이용한 시간 역행을 말하며 이 무슨 운명론적인 말일까. 이미 일어날 일을 위해 우리가 애쓰는 것뿐이라면 이 영화는 끝을 맺을 수 없다. 어쩌면 우리는 일어나지 않을 일을 위해 버티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삶에 무엇이 상수이고 무엇이 변수인지 모르는 이상 우리는 오늘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테넷은 그런 점에서 철학적이다. 물리에 대한 이해를 포기할 때 영화를 더 넓고 깊게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