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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 May 13. 2022

넘어져도 다시, 달리는

영화 <프란시스 하> (Frances Ha, 2012), 노아 바움백

내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우리 세대는 88만 원 세대라고 불렸다. 20대의 비정규직 월 평균임금이 88만 원이라고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리고 나중엔 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 집, 경력 등을 포기했다고 ‘N포세대’라고도 불렸다. 딱히 무엇을 시작해 보기도 전에 기가 죽었다. 꿈은 있지만 재능은 없고 열정은 있지만 돈이 없었다. 돈에 허덕이면서 꿈을 좇을 만큼 사실 간절하지도 않았다.

영화 <프란시스 하>의 주인공 역시 자꾸만 무언가를 포기할 상황에 놓인다. 집도 일도 연애도, 친구와의 관계마저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 영화는 프란시스의 종잡을 수 없는 말과 행동들로 영화의 톤을 시종일관 유쾌하게 유지한다. 하지만 프란시스가 벌이는 일들은 마냥 웃고만 있기에는 너무나 서글프다. 돈이라도 어디 뚝 떨어졌으면 좋겠는데, 또 그렇게 뚝 떨어진 돈이 문제다.


세금을 환급받고 신난 프란시스가 레브에게 저녁을 사는 장면은 모든 대사 하나하나가 주옥같다. 현금인출기를 찾아 무릎이 까지면서 가까스로 계산을 할 수 있게 된 프란시스가 레브에게 듣는 말은 겨우 ‘개념녀’라는 멸칭이다. ‘넌 다른 여자들과 달라’라는 말이 어딘가 석연찮으면서도 내가 가진 특별함으로 생각하고 웃어넘겼던 어리석었던 나의 20대를 애도하며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일정한 수입이 없는 프란시스는 크리스마스 공연이 취소되면서 견습 단원으로 있던 무용단도 나오게 된다. 이후 사무실 직원 자리를 제안 받지만 프란시스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마치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황급하게 일이 있다고 둘러 댄다. 프란시스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그녀가 지켜낸 자존심이 너무나도 초라해서 슬펐다. ‘진짜로 하고 있지 않은 일’이 직업인 프란시스는 마치 자신이 가짜가 아님을 변명하기라도 하듯 자꾸만 말이 많아진다.

게다가 자신의 소울메이트 소피는 남편을 따라 자기 직장도 그만두고 일본으로 떠난다니. 같이 미래를 이야기하던 소피는 이제 없다. 바자회에서 우연히 만난 소피와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곧 단잠에 깨어난 프란시스는 현실과 마주한다. 소피를 부르며 맨발로 달려 나간 곳은 조명이 떨어지는 매끈한 마룻바닥이 아니라 차갑고 거친 콘크리트 바닥 위이다.



영화는 프란시스가 변할 수밖에 없는 모든 설명을 끝냈다는 듯이 빠르게 전환된다. 견습 단원으로 일하던 무용단에서 사무직으로 일하게 된 프란시스의 표정과 행동은 한결 편안해 보인다. 늘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변명하기 바빴던 프란시스는 이제 그런 압박감에서 벗어난 듯 보인다. 그리고 무용수가 아닌 안무가로서의 재능도 새롭게 보여준다.

“실수처럼 보이는 게 오히려 좋아”

프란시스는 이제 실수를 변명하지 않는다. 소리치고 화냈던 예전에 모든 일들이 계산된 실수처럼 넘어간다. 아픈 시간이 지났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영화의 엔딩, 이제 정말 자신만의 집이 생긴 프란시스는 우편함에 자신의 풀네임이 적힌 종이를 집어넣다가 자리가 부족하자 새로 쓰지 않고 종이를 접어 버린다.

‘FRANCES HA’

프란시스의 이름이 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와야 할 우편물은 제때 올 것이고 늦어도 이름 탓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 그녀의 이름이 궁금하다면 종이를 슬쩍 펼쳐보면 될 일이다.


난 프란시스의 선택에 ‘포기’라는 말을 붙이고 싶진 않다. 왜 자꾸 선택지를 다 보기도 전에 소거부터 해버리는지. 포기한 게 아니라 한 수 접어둔 선택지들에 대해 작게 항변한다. 무엇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그 선택지에 우열이 있지 않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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