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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 Jun 14. 2022

<브로커> 가려야만 할 수 있는 말

고레에다 히로카즈 <브로커>, 2022

영화는 어디선가 본 거 같은 익숙한 문법과 얼굴로 진행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의 팬이라면 어딘가 힘이 들어간 분위기에 아쉬웠을 것이고 유명한 배우들의 열연(?)을 기대한 관객들이라면 미적지근하게 흘러가는 스토리에 실망했을 수도 있다.


영화는 직설적이지만 담담하고 터뜨릴 것 같지만 감추면서 흘러간다.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서로 맞물려 제각기 맡은 기능을 하며 돌아간다. 다들 자기가 맡은 몫을 해내고 있지만 도저히 시너지가 나지 않는다. 그게 이 영화의 가장 큰 단점이다.


하지만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가볍지만은 않다. <가족>에 대해 끊임없이 말해온 감독이 또 어떤 새로운 형태로 우리에게 딜레마를 안겨줄 지 우리는 또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영화에서 속내를 드러내는 말은 표정을 가릴 수 있을 때만 내뱉을 수 있다. 기차 안에서 상현과 소영의 대화는 어둠과 소음이 진심으로 하는 말을 가린다. 관람차 안에서는 동수가 진심을 말하는 소영의 얼굴을 가려준다. 태어나 줘서 고맙다는 말을 모두에게 하는 늦은 밤, 불을 꺼야만 겨우 그 마음을 전할 수 있다.


"태어나줘서 고마워."


너무나도 힘을 준 장면이라 소영에게 전하는 그 말이 누구의 입에서 나올지도 예측이 되었다. 그럼에도 저 말이 오랫동안 남은 것도 사실이다. 무리를 해서라도 꼭 전하고 싶었을 그 말은 불 꺼진 깜깜한 영화관 안에 누군가에게는 가슴 깊이 와닿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공평하지 않았던 세상에서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는 너무나도 가혹하다. 보호받지 않고 자란 아이들이 보호받지 못할 아이를 낳아 기른다. 낳기 전에 없애는 것과 낳고 나서 버리는 것 중에 무엇이 더 나쁘냐고 묻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죄는 그 둘을 구분하면서 왜 벌 받는 이는 한 명인가. 그 벌은 누가 주는가.



영화는 아무것도 낙관하지 않는다. 여전히 버텨내기 힘든 순간들이 있을 것이고 끝끝내 무언가를 다시 버려야 하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비는 결국 나를 씻어낼 수 없다. 비에 젖지 않기 위해서 소영은 우산을 들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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