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8년 11월 11일 하늘이 맑은 금요일.
고개를 돌리니 비행기 창문에 얼굴이 비친다. 피로감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얼굴이지만 와인한잔 들고 창문을 바라보고있는 모습이 딱히 나빠보이진않는다. 아니 오히려 행복해보인다고 해야하나. 지난 5년동안 일어난 일들이 마치 게임속 세상에서 키워낸 캐릭터가 해낸 일들처럼 현실감이 없다.
10년 넘게 아이들에게 쏟아붓던 모든 에너지를 서서히 나에게 나누기 시작했던 2023년. 그해 겨울의 초입 브런치 프로젝트 2기로 발을 들인 작가의 세계에서 나는 살아남았다.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글을 써내는 동기들 사이에서 일주일에 한편도 제대로 써내지 못해 한없이 쪼그라들던 찌질한 아줌마는 이자리에없다. 햇빛속 둥둥 떠다니는 먼지들처럼 미미하던 자존감을 끌어안고 간절하게 글을 쓰며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결국 살아남아 일등석에 앉아있는 50살 여자의 모습뿐이다.
12시간 전. 뉴욕에서 비행기를 탔다. Dessa와 Ashley를 주축으로 한 국경없는 엄마들(MWB) 정기캠프가 끝났다. 5년동안 열심히 글을 쓴 이연이라는 이름이 있었다면 Jane 이라는 또다른 이름으로 공들이고 애써왔던 일이 바로 MWB 일이었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어 공부하고 노력하는 수많은 외국엄마들과의 교류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만나면 각자의 언어로 육아의 고충과 시엄마, 남편에게 서운한점을 이야기하느라 바쁜 모임. 여자들의 만국공통 언어는 결국 하소연이라는 걸 알게되는 모임이다. 엄마표 영어라는 작은우물에서 만났으나 아이와 부모와의 마인드 셋을 통해 글로벌한 엄마가 될 수 있게 해준 Ashley. 새삼 고맙네 친구여~~
그러고보니 지난달엔 세번째 출간책을 들고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제 도서전에도 참가했다.
몇달전 나온 세번째 책은 판타지추리소설이다. 그 옛날 J.K롤링 작가가 전세계에 해리포터 열풍을 일으켰던 것처럼 한국의 정서를 살리면서도 어른과 아이들 모두 즐길 수 있는 판타지 추리소설을 쓰고 싶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생계형 작가로 겨우겨우 책 한권을 출간하고 그 기세를 몰아 추리소설 [수막새]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에세이 한편도 겨우 써놓고 판타지 추리소설이라니. 이 용감하고 무모한 신인작가는 또다시 영혼을 갈아넣으며 생계형 글과 꿈의 글을 병행해야만 했다.
대박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자부하는 추리소설 광인 편집장님이 믿어주시고 열심히 일해주신 덕분에 출간도 전부터 해외 판권을 계약하게되었다. 도서전의 수많은 부스들 한쪽에 당당히 자리잡고 있는 책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 다음 팬 사인회 장소는 여기다! 고딩때 독어를 제2 외국어로 배운것도, 유럽의 수많은 국가들 중 유난히 독일을 좋아하는것도 다 오늘을 위해 준비된 것이다.
툭
때마침 들려온 둔탁한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영화를 보고 있던 남편의 헤드폰이 떨어졌다. 어떻게 자면 머리에 쓰고 있던 헤드폰이 떨어지나. 그래 피곤도 하겠지. 제2의 이상순을 꿈꾸며 마누라의 글쓰기를 응원하던 남편은 회사를 그만두고 집근처에서 작은 북까페를 운영하며 전보다 훨씬 바쁜 삶을 살고 있다.
그래, 상순씨도 이효리가 서울에서 활동하는 동안 제주도에서 혼자 개 6마리 케어하며 집안일 하느라 바쁘다더라..근데 해외나갈때마다 따라붙으며 로드매니저라는 뻔한 핑계를 대는건 그만하자. 여행가고 싶은 사심폭발인거 다 안다구.
여권은 원래 도장 한번 찍고 갱신하는 것 아니냐며 실없는 농담에 부러움을 숨겨 비행기타고 여행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때도 있었다. 이젠 해외 한번 가려고 일년짜리 단기적금 들 필요도 없고 특가 항공권 찾아 몇날며칠 검색을 할 필요도 없다. 나 정말 출세했구나. 창문속 여자가 슬며시 미소짓는다.
금요일이다. 기깔나는 급식이 나오는 학교여도 엄마밥이 생각난다는 아이들이 2주만에 집에 오는 날이다. 매일매일을 버티며 성장하고 있는 이작가는 이제 잠시 퇴근. 집안가득 김치찜 냄새를 채우며 아이들을 기다리는 엄마로 돌아갈 시간이다.
그전에 도착할때까지 나도 좀 자야겠다.
*5년 후 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쓴 글임을 밝힙니다.*
대문사진 출처: 언스플래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