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후로 힘든 날이 많아졌다. 처음은 몸이 힘든 게 아니라 마음이 힘들었다. 그리고 그 힘듦이 몸에까지 전해졌다. 심장이 자주 두근거렸다. 크게 뛰기도 했다. 항상 100m 달리기를 하고 난 후처럼 지쳤다. 불안증의 시작이었다.
그 무렵 만나던 남자 친구가 상담 치료와 약물 치료를 권유했다. 처음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정신 병원을 왜?’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나는 지금까지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잘 살아야 했으므로. 병원에 가면 내 병증을 진단받아 꼼짝없이 ‘정신병자’가 되는 것이 싫었다. 내 병원 기록 어딘가에 정신과 진료 기록이 남는 것도 찝찝했다.
그래서 찾은 곳이 동사무소였다. 그때 동사무소에선 청년을 상대로 한 무료 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처음 센터를 방문했을 때 그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병원보단 문턱이 낮았으니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곧 동사무소 소속인 듯 한 상담사 분과 첫 만남을 가졌다. 덩치가 큰 남자분이셨다. 분명히 친절하셨다. 나의 상황을 묻고 이것저것 기록하셨다. 그런데 그가 대뜸 그랬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힘드세요?”
나는 그때 마음의 문이 쿵 닫히는 느낌이었다. 내가 좋은 대학교를 나와 로스쿨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 부모님과의 사이도 좋고 친구 관계도 원만하다는 것. 그는 나를 그렇게 재단했다.
‘잘 사는 사람.’
겉에서 보기엔 그랬을 것이다. 나는 탄탄대로 같은 길을 걸어왔으니까. 그래도 적어도 상담사라는 사람은 그런 말을 쉽게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 분과 더 이상의 상담은 없었고 다음 상담은 어떤 박사님이었다. 공황발작에 도움이 되는 호흡법을 가르쳐주셨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냥 그 프로그램 자체가 내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그다음 상담부턴 가지 않았다. 이미 나는 거기서 도움을 받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깊이 박혔다.
혼자 이겨내는 건 도저히 힘들 것 같았다. 다음은 학교 건강센터를 방문했다. 큰 대학병원의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님이 외래진료를 오셨다. 그곳에선 약도 처방받을 수 있었다. 선생님은 사무적이셨다. 내 증상을 듣더니 이것저것 약을 먹으면 된다고만 말씀하셨다. 한 세 번쯤 갔을까. 정신과 약 특성상 단기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증상이 개선되는 것은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나에겐 지나치게 오한이 드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약에 대해서 검색이라도 해보고 싶어 약을 주시는 선생님(약사 선생님인지 직원 선생님인지는 모른다.)께 약 이름을 여쭈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런 걸 왜 궁금해하냐, 고 하셨다.
글쎄. 그때의 내가 너무 예민하고 약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겐 그 선생님이 ‘환자는 주는 대로 챙겨 먹기나 해라.’라고 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굉장히 불편했다. 사실 불쾌해야 하는 말이 맞는데, 나는 그때 상처를 받았다. 내가 어딜 가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된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결국 집 앞의 정신건강의학과 병원의 문을 두드렸다. 나이가 지긋하신 선생님께서는 나를 웃으며 맞이해주셨다. 초진에는 다양한 심리검사를 한 후 긴 상담을 했다. 선생님께서는 내 이야기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들어주시고 이런저런 질문도 던져주셨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피하고 싶던 진단을 받았다.
‘우울증, 불안장애, 공황장애.’
속은 후련했다. 약을 제대로 먹기 시작했으니 몇 달이면 곧 나아지리라는 믿음도 생겼다.
그땐 몰랐다. 내가 2022년이 저무는 지금까지 계속 약을 달고 살 줄은. 그리고 앞으로도 쭉 그래야 하는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