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 조작 - 1

< 정의의 배심원 1 > 에서 이어집니다

by 이인철

영채는 병실에 들어가려다 잠시 멈칫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도진과 현정의 밀회를 목격해서였다. 그녀는 분노를 억누르며 현정이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

“누구야?”

“알지 모르겠네. 국회의장님 딸이야. 곧 나랑 약혼할 사이기도 하고.”

도진은 태연하게 말했다.

“날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사랑한다고 했지, 결혼한다고는 안 했잖아.”

“그럼, 왜 나를 만난 거야?”

“귀국하고 심심해서 잠깐 즐긴 거지. 글구 우리가 서로 어울린다고 생각해? 결혼은 비슷한 신분끼리 해야 불행을 피할 수 있는 거야.”

그는 뻔뻔하게 결혼의 정의를 내렸다. 망설이던 영채가 입을 열었다.

“사실, 나… 도진 씨의 아기를 가졌어.”

“뭐라고? 당장 지워! 아, 네 아버지 회사가 도원건설 하청이지? 내 말을 거역하면 너희 가족의 생계를 끊어버릴 거야. 명심해!”

“그래도 난 아기를 낳을 거야.”

“미쳤구나! 감히 내 인생에 태클을 걸어?”

도진은 그녀의 뺨을 후려갈겼다. 영채는 맞으면서도 울며 매달렸다.


“이 CCTV는 도저히 복구가 안 되네요. 오랫동안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시간을 끌던 노인은 재판이 끝날 무렵 이렇게 말했다.

맨손으로 돌아온 세호가 기탁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원래 10장인데 1장을 더 넣었죠. 가는 길에 차비나 하세요.”

“그럼, 그때 약속하신 건….”

“뭘요?”

“팀장님, 말씀하셨잖아요? 이번 일을 잘하면 태양에서 근무하게 해 준다고요.”

“문 변호사님. 순진한 건가요? 멍청한 건가요? 겨우 이런 일 좀 했다고 상황이 바뀔 거 같나요? 당신의 가치는 그저 강지상이 뭘 하는지 지켜보는 정도였어요. 그러니 주제넘은 소리 마시고 조심히 가세요.”

“그럼,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어요?”

“본래 소모품은 한 번 쓰고 버리는 거죠.”

“야! 내가 이딴 푼돈이나 받으려고 그런 짓을 한 줄 알아? 네가 뭔데 내 노력에 그 따위 가치를 매겨?”

씩씩거리는 그에게 기탁이 발길질을 날렸다. 세호는 벌러덩 자빠졌다.

“그런 가치! 그 따위 짓밖에 못 하니까 이런 대가밖에 못 받는 거야. 외우기만 잘하는 헛똑똑이가 네 가치에 대해 주절거려. 알았으면 그 돈 받고 꺼져버려!”

“내가 이렇게 당하고 가만히 있을 것 같아?”

“그래서 어쩔 건데? 이제 너도 증거 인멸의 공범이라는 걸 몰라?”

“으….”

세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신음만 했다.

“고집불통에 조직 부적응까지… 네 평가는 이미 법조계에 쫙 퍼졌어. 가는 로펌마다 쫓겨나서 골방에 처박힌 인간이 콧바람을 쐬었으니 그걸로 만족해!”

세호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조용히 문을 나서는 것뿐이었다.

기탁은 지상을 밀착 감시하려고 주변 인물들을 물색했다. 그러다 세호가 검사 시보로 함께 일했던 정보를 입수한 후, 그에게 태양 입사의 미끼를 던졌다. 그리고 철저히 이용한 뒤, 그를 버렸다.


아침에 연우가 법원에 가기 위해 옷을 입고 있었다. 이때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그제 오전 1시경 속초 신풍리에서 뺑소니 사고가 발생하여 엄두식 씨가 사망하였습니다. 목격자와 주변 CCTV가 없어 장기 미제 사건으로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풍리! 엄두식!”

그는 사망자의 이름이 낯익고 사고 지역이 상태와 같은 곳이라 깜짝 놀랐다. 이어 블랙박스를 찾으러 갔을 때 주민들의 대화를 떠올렸다.

“두식이 자식 말이야. 땡전 한 푼 없어 빌빌거리던 망나니가 요즘 사방팔방 돈을 뿌리고 다닌다며?...”

번쩍 섬광이 스친 연우는 급히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상아야, 빨리 택시 타고 신풍리로 가야겠어. 가서는 말이야…”

그리고 지상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객의 전원이 꺼져 있습니다.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 시 통화료가 부과됩니다..."

‘왜 연락이 안 되지?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마지막 재판이 시작되었다. 보통 첫 재판이 끝나면 한산하지만, 방청객과 기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국민참여재판 2차 공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재판장님, 아직 변호인 한 분이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재판 시간을 조금 늦춰 주실 수 있을까요?”

“피고인에게 변호인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런 이유로 공판을 지연시킬 수는 없습니다.”

‘어제 분명히 온다고 했는데… 강 선배가 없으면 큰일인데.’

수진은 안절부절못했다. 수찬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김 사장 놈이 확실히 작업을 했군. 이제 내가 ‘백 공자 구하기’ 작전의 일등 공신이 되었네.”

직원이 재판장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안타깝게도 5번 배심원께서 법원으로 오는 도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출석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예비 배심원인 9번을 정식 배심원으로 선정합니다.”

연우의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다.

‘그럼 지금까지 내가 예비 배심원이었단 말이야. 만약 차 선생이 출석했다면 나는 평결에서 제외되었을 텐데. 근데 두식과 차 선생이 공교롭게도 교통사고라니…. 이게 과연 우발적일까?’

이 교체를 가장 기뻐한 사람들은 치수와 기탁이었다. 그들은 현오의 불참 덕분에 만장일치 유죄 평결을 확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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