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의 배심원 1 > 에서 이어집니다
인순은 법정을 나서자마자 식당으로 달려갔다. 오늘 급여가 삭감된 만큼 몇 시간이라도 일해야 했다. 앞치마를 두른 그녀는 즉시 음식을 서빙하기 시작했다. 다른 식당들은 한산했지만, 이 고깃집은 유독 바빴다.
남편 생각만 하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 늘 사고를 치던 남편이 교도소에 간 지 1년이 넘었다. 이혼하려 했지만, 아이들에게 그나마 아빠란 존재가 필요할 것 같아 참았다. 아침에 애들을 학교에 보내고 가게로 출근해 밤늦게 돌아오면 몸이 천근만근이다.
올해 중학생인 큰딸은 자기 공부방이 없다며 투덜거린다. 그래도 동생들을 살뜰히 챙기는 것이 대견하기에 늘 미안하다. 반지하 한 칸에서 벗어날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저녁 10시가 넘어서 가게를 터덜터덜 나오는 그녀를 요원 7이 기다렸다.
“국민참여재판 8번 배심원 송인순 씨 맞으신가요?”
“네.”
“도원그룹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요?”
“당신에게 둘도 없는 기회를 드리려고 합니다.”
“무슨 말이에요?”
“저희 제안을 수락하시면 도원건설의 임대 아파트를 무상으로 제공하겠습니다. 그러면 자녀들과 쾌적하게 살 수 있지 않겠어요?”
“그렇긴 한데, 뭔지 알아야…”
“내일 재판에서 피고인에게 유죄 평결만 내리면 됩니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곰팡이 핀 지하방을 벗어난다는 기쁨만 가득했다.
“저도 유죄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올바른 판단입니다. 그럼 재판이 끝난 후 이사 준비를 하세요.”
인순은 지하 계단을 내려가며 소리쳤다.
“선희야! 드디어 네 공부방을 갖게 되었어!”
진숙은 재판이 마친 후 병원으로 향했다. 7살 외동딸이 백혈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언니도 어린 나이에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난 가족력이 있어 마음이 무거웠다.
딸이 입원한 지 3년이 지났다. 건강하던 아이가 갑자기 열이 나고 피부에 붉은 반점이 생겼다. 의사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내렸다.
“급성 골수성 백혈병입니다.”
“치료는 어떻게 하나요?”
“방사선 치료와 면역 요법을 사용할 예정입니다. 만약 효과가 없으면 골수 이식을 고려해야 합니다.”
“맞는 골수가 없으면요?”
“그럴 경우 사망률이 높아집니다. 하지만 요즘은 전 세계적으로 골수를 구하는 것이 가능해요. 다만,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이 문제죠.”
안타깝게도 진숙과 남편의 골수는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그들은 힘들게 모은 전셋집을 사글세로 옮겨야 했고, 이제 그 전세금도 치료비로 다 써버렸다.
“윤미 양의 중간 병원비를 계산해야 하는데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막막한 진숙은 수납 직원에게 간청했다. 그때,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그녀의 팔을 요원 8이 붙잡았다.
“10번 배심원 이진숙 씨 맞으시죠?”
“누구신데요?”
“도원그룹 직원입니다. 내일 재판에서 피고인에게 유죄 평결을 내리면 윤미 양의 치료를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정말인가요? 그런데 제 아이를 어떻게 치료해 주신다는 건가요?”
“도원 병원 소아암 센터에서 골수 이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치료비는 저희가 부담합니다.”
진숙은 오직 딸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한 치의 주저함이 없었다. 오히려 요원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느껴졌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그녀는 곧바로 공장에서 야근 중인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윤미를 도원 병원에서 무료로 치료해 준대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어요.”
수찬은 현오를 찾아갔다. 기탁은 그의 매수를 요원에게 맡기려 했지만, 현오가 전교조 교사였기에 변호사인 수찬이 상대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집에 있던 현오의 휴대폰이 울렸다.
“차현호 선생님이시죠? 태양로펌 조수찬 변호사입니다.”
“근데 제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셨나요?”
“뭐, 그것보다 차 선생님께 전할 기쁜 소식이 있어서 잠깐 뵐 수 있을까요?”
“네? 그러죠.”
‘태양 로펌이라면 백도진을 변호하는 곳인데… 이 밤에 무슨 일이지?’
그는 커피숍으로 가면서 연우와의 통화를 떠올렸다.
“아마 저녁에 태양 로펌에서 차 선생님을 찾아갈 수 있어요. 그때 그 대화를 녹음해 주세요.”
“차 선생님, 교직에서 해임되셔서 힘드시겠어요. 게다가 기간제 교사 자리도 구하기 쉽지 않으시죠?”
“어떻게 저에 대해 그렇게 잘 아세요?”
“로펌에서 일하면 상대방에 대한 정보는 거의 다 알 수 있어요.”
“그런데 만나자는 이유가 뭐죠?”
“내일 재판에서 피고인에게 유죄 평결을 내리시면 도원 학원재단의 정교사 자리를 보장하겠습니다. 저희 태양이 그 권한을 도원그룹으로부터 위임받았거든요.”
“하지만….”
수찬의 제안은 너무 매력적이어서 그는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다른 배심원들도 모두 유죄 평결을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사실 차 선생님이 반대하셔도 평결에는 영향이 없어요. 다만 이번에 더 좋은 자리로 복직할 기회를 드리려는 거예요.”
“저는 내일 CCTV와 증인 심문을 보고 결정할 겁니다.”
풀 죽어가는 그의 등을 향해 현오가 중얼거렸다.
“이런 적폐를 폭로하다가 교직에서 잘렸는데… 내가 저들과 똑같다면 무슨 얼굴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
수찬은 포섭 실패를 기탁에게 알렸다.
“등신 같은 자식! 요원하고 다를 바가 없잖아. 이런 놈을 라이벌로 여겼으니 나도 한심하군.”
기탁의 휴대폰이 울렸다. 치수의 전화였다.
“배심원 작업은 잘 되고 있나요?”
“5번 배심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성공했어요.”
“만장일치로는 안 될까요?”
“그건 어려울 것 같아요. 그래도 이 정도면 대단한 성과죠.”
전화를 끊은 기탁이 불평을 토했다.
“도대체 어디까지 바라는 거야! 필드 작업의 고생도 모르면서.”
시간은 어느새 밤 10시를 지났지만, 도원그룹 비서실의 전등이 켜져 있었다.
“회장님에게 만장일치로 유죄 평결이 내려질 것이라고 큰소리쳤는데… 그렇게 해야 지난번의 실패를 만회하고 임원으로 승진할 수 있을 텐데. 그래!”
치수는 무릎을 '탁' 치며 지하 주차장으로 달려갔고, 현오의 집으로 향해 액셀을 밟았다.
“이 밤중에 줄줄이 뭐 하는 거예요! 잠도 못 자게.”
달음질한 보람도 없이, 현오의 대답은 여전히 같았다. 거액을 제시했음에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치수는 헛걸음으로 차로 돌아왔다.
‘만약 5번이 불출석하면 예비 배심원이 정식 배심원이 될 것이고… 그러면 저절로 만장일치가 되잖아!’
그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지난번 일은 아주 잘했어. 이제부터는….”
“이 실장님, 이번에는 성과금도 좀 고려해 주세요. 헤헤헤.”
역시나 흥신소였다.
그런데 그는 이것이 오히려 연우에게 전화위복이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수찬은 룸살롱에 들어갔다. 사장이 곧바로 뛰어왔다.
“조 변호사님,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지명 아가씨를 부를까요?”
“아니, 오늘은 비즈니스로 왔어.”
“무슨 일인데요?”
“다른 게 아니라….”
“그러니까 내일 법정에 못 나오게 하라는 거죠? 아예 강 변과 하 변을 한 번에 처리하는 건 어떨까요?”
“안 돼! 변호인이 없으면 재판이 연기될 수 있어. 그리고 강 변은 학창 시절에 태권도 선수였으니 조심해.”
“에이, 운동하고 싸움은 다르죠. 그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조 변호사님은 우리 애들 출장비나 충분히 챙겨주세요.”
“알았어.”
지상은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었다.
“누구세요?”
“강 지상 변호사님 맞죠?”
“그런데요?”
“경찰입니다. 조사할 게 있으니 경찰서로 가셔야겠습니다.”
“혐의가 뭐요?”
그 순간 두 어깨가 그의 양팔을 붙잡았다. 동시에 한 어깨는 지상의 코를 수건으로 눌렀고, 다른 어깨가 그의 상의를 뒤져 휴대폰 두 개를 꺼내 구두로 부숴버렸다. 기절한 지상은 승합차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