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심원 매수 - 2

< 정의의 배심원 1 > 에서 이어집니다

by 이인철

형일은 식당에서 제육볶음을 주문했다. 내일까지 법원에 출석하면 24만 원이 생기므로 오랜만에 외식을 했다.

“이제 라면은 질렸어!”

지방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서울에 온 지 벌써 3년이 지났다. 그동안 대기업에 수없이 도전했지만 대부분 1차 서류 전형에서 탈락했다. 겨우 몇 군데 통과한 회사는 면접에서 고배를 마셨다. 혹시 스펙이 부족할까 싶어 인턴 경험을 쌓고 자격증도 취득했지만, 결과는 여전히 같았다. 지금까지 집에서 보내준 생활비로 간신히 버텼지만, 올해가 끝나면 더 이상 그럴 수 없다. 내년에 아버지가 정년퇴직을 하면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부모님께 면목이 없어 집에 가지 못한 지 오래다.

고시원으로 들어가려는 그를 요원 3이 가로막았다.

“국민참여재판 2번 배심원 박형일 씨 맞으시죠?”

“네, 근데 왜요?”

“도원그룹에서 나왔습니다. 요즘 직장 구하기가 정말 힘들죠? 그래서 괜찮은 제안을 할까 합니다.”

“뭔데요?”

“내일 재판에서 피고인에게 유죄 평결을 내려 주세요. 그러면 박형일 씨에게 도원물산의 정규직 자리를 보장하겠습니다.”

“네? 도원물산이라면 도원그룹의 계열사를 말하는 건가요?”

“맞습니다.”

“그렇다면… 어렵지 않겠네요.”

요원이 멀어지자, 그는 급히 전화를 걸었다.

“엄마, 드디어 도원물산에 취직했어. 이번 명절에 선물 잔뜩 사서 갈게!”


민지는 재판이 끝나자마자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정시에 도착해 점장의 꾸중을 피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 자정까지 알바를 해야 한다. 주말에는 예식장 도우미와 가든 서빙도 기다리고 있다. 고소득 과외는 요즘 SKY 대학생들도 구하기 어려운 일이니, 그녀에게는 기회조차 오지 않았다.

그래서 배심원으로 선정되었을 때 무척 기뻤다. 다른 일들과 비교하면 휴식 같은 시간이었고, 일급도 꽤 괜찮아서 이 꿀알바를 꾸준히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년에는 3학년이 된다. 졸업할 때까지 참아야겠지만, 그 시간이 너무 힘들다. 낭만적인 캠퍼스 생활은 그녀에게는 사치였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물론 아름다운 말이지만, 학교에 다니며 서너 개의 알바를 뛰는 자신에게는 그저 미사여구일 뿐이다. 이 현실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기 때문이다.

민지는 어릴 적 부모님의 이혼으로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그 이후로 엄마와 아빠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시골에서 열심히 공부했고 똘똘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할머니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민지는 수도권의 한 대학에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서울로 왔다. 입학하자마자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지만, 다음 학기에는 학점이 부족해 장학금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여유로운 친구들은 학업에만 집중하기에 선정에서 밀렸다. 그녀는 공납금을 마련하기 위해 더 많은 알바를 해야 했고, 그 결과 성적이 떨어져 장학금을 받지 못하는 악순환이 지속되었다. 게다가 할머니의 건강이 나빠져 약값과 생계비도 지원해야 했다.

‘빈익빈 부익부.’

민지가 사회에서 일찍 깨달은 서글픈 인생철학이다. 자정을 넘어 편의점을 나서는 그녀를 요원 4가 불러 세웠다.

“3번 배심원 성민지 씨 맞죠?”

“어떻게 아세요?”

“도원그룹 직원입니다.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왜요?”

“기적을 선물하려고요.”

“네? 무슨 말씀인지요?”

그녀는 호기심이 생겨 피곤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오늘 재판에서 피고인에게 유죄 평결을 내리면 도원 장학재단에서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과 생활비를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정말인가요?”

“확실히 약속합니다. 다른 배심원들도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그 이유라도..."

"알다시피 피고인은 유죄인데 기왕이면 만장일치로 평결이 나왔으면 하거든요."

“알겠어요.”

그녀는 순간 머리 회전을 돌리더니 승부수를 던졌다.

“좋아요. 단, 조건이 있어요.”

“네? 어떤 조건이죠?”

“지금 당장 주셔야 해요. 나중에 주는 건 의미가 없잖아요.”

“잠시만요.”

요원은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어서 기탁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바로 승낙이 떨어졌다.

“입금이 완료되었을 겁니다.”

요원이 사라지자, 민지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할머니, 이제 졸업할 때까지 학비와 생활비가 해결되었어요. 이제 돈을 많이 보낼 테니 맛있는 거 사드시고 병원에도 꼭 가세요.”

그녀는 예리한 판단력을 지닌 총명한 학생이었다.


기탁은 홍판기의 가족사를 알고 있었기에 그가 유죄 평결을 내릴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매수 대상에서 제외하는 우를 범했다.


“저, 파출부 자리가 나왔나요?”

“아직은 없어요.”

해자는 우울한 표정으로 용역 사무실을 나섰다.

“어쩌지, 오늘도 일이 없네. 술독에 빠진 아들 녀석은 언제 제정신을 차릴까? 아휴, 내 팔자야.”

그녀의 남편은 빚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로 해자는 식당 설거지, 빌딩 청소 등 몸으로 때우는 일을 전전했다.

작년, 아들이 싸움 중 한쪽 눈을 잃었고, 쌍방 상해로 인해 치료비와 합의금을 받을 수 없었다. 아들은 자신의 장애에 대한 분풀이를 아내에게 쏟았고, 결국 견디다 못한 며느리는 집을 나갔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손주들의 양육은 오롯이 해자의 몫이 되었다.

버스를 기다리던 그녀에게 요원 5가 다가왔다.

“국민참여재판 6번 배심원 김해자 씨 맞으시죠?”

“그래서요?”

“도원그룹에서 나왔습니다. 해자 씨에게 특별한 제안을 하려고요.”

“무슨 제안인가요?”

“내일 재판에서 피고인에게 유죄 평결을 내리면 도원 호텔 미화원 자리를 보장하죠. 물론 상여금, 휴가비, 퇴직금도 지급됩니다.”

“정말요?”

해자는 꿈인지 생시인지 확인하려고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픈 느낌이 드는 걸 보니 현실이었다.

‘이제 매일 일자리를 걱정할 필요가 없겠네. 용역 사무실에 내는 10% 수수료도 아낄 수 있어.’

해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할게요.”

“그럼 믿겠습니다.”

요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이제 아들만 정신 차리면 되겠네.”


규한은 골목 모퉁이에 숨어 주위를 살폈다. 도박 빚으로 쫓기는 신세였다. 그 금액은 무려 8천만 원에 달해 집에 들어가지 못한 지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그는 회사도 결근하며 찜질방에서 지냈다.

얼마 전, 사채업자에게 붙잡혀 죽을 만큼 두들겨 맞았다.

“다행히 오장육부는 멀쩡하네. 이번 달까지 갚지 않으면 네 몸뚱아리는 우리 것이라는 걸 명심해.”

규한은 신체 포기 각서에 서명하고 최후통첩을 받았다. 그런데 그 기한이 이미 지나버렸다.

“어쩌다 내 인생이 이렇게 꼬였을까? 이 젊은 나이에 시한부 선고를 받다니.”

그가 한탄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의 등을 톡톡 쳤다.

“저, 7번 배심원 지규한 씨 맞죠?”

“아, 아닙니다.”

“어, 이상하네. 똑같은데.”

요원 6은 핸드폰 사진과 비교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제야 규한은 그가 사채업자가 아님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누구세요?”

“도원그룹 직원입니다.

“네.”

“요즘 도망 다니느라 힘드시죠?”

“아니, 그걸 어떻게 아세요?”

“도원의 정보력으로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죠. 이제 제가 도망자에서 자유롭게 해드리겠습니다. 단, 저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조건에서요."

“뭐든지 말만 하세요.”

“내일 재판에서 피고인에게 유죄 평결을 내리면 도박 빚을 모두 갚아 드리죠.”

“진, 진짜요?”

“굴지의 대기업에서 빈말하려고 이 밤에 찾아왔겠어요?”

“무조건 할게요. 아니, 백 번이라도 하겠습니다.”

그는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다. 이어 핸드폰 버튼을 힘껏 눌렀다.

“야! 김 사장. 내, 더러워서 내일까지 빚 다 갚는다, 갚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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