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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박스의 행방

글 순서는 01 > 07~11화 > 02~06화 > 12화로 이어집니다

by 이인철

다방 구석에서 두식은 아가씨의 허벅지를 만지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때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오늘 새벽 속초 신풍리에서 음주 운전으로 2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고로 도원그룹 후계자 백모 씨와 그의 일행이 부상을 입어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러나 가해 차량의 운전자인 설모 씨는 사고 직전 백모 씨와 운전을 교대했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결정적인 증거인 블랙박스가 사라졌습니다…”

“두식 씨, 우리 마을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사람이 죽었나 봐. 근데 사상자 중에 도원그룹 후계자도 있다고 해. 저걸 어쩌나?”

아가씨가 측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사람 가는 데 순서가 있냐?”

두식은 자신의 처지와 비교하며 불쾌한 마음에 TV를 확 꺼버렸다.

다방을 나와 터벅터벅 걷던 그의 신발에 무언가가 툭 차였다. 그것은 블랙박스였다. 그는 재빨리 주워들었다.

집으로 달려간 두식은 고꾸라지듯 자기 방으로 몸을 내던졌다. 마당에서 나물을 다듬던 모친이 이 광경을 보고 혀를 찼다.

“썩을 놈.”

그는 블랙박스에서 메모리 카드를 빼내어 컴퓨터에 꽂았다. 동영상 폴더를 클릭하는 손이 떨렸다. 긴장한 표정이 경악에서 회심의 미소로 바뀌었다.

‘그래! 드디어 인생 역전의 기회가 왔어!’

“속초 경찰서죠? 교통조사계 김민규 경장님 부탁드립니다. 형님, 저 두식이에요. 새벽에 우리 마을에서 교통사고가 났잖아요. 혹시 운전자가 도원그룹 회장 아들이에요? 아니, 그의 친구라고요?”

돌연 두식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형님, 제가 조만간에 양주를 3차까지 쏠게요.”

“인마, 너 대낮부터 낮술 했냐? 헛소리 말고 어머니 속이나 썩이지 마. 또 사고 치면 고향 선배고 나발이고 없다.”

“진짜예요. 저 로또를 맞았다니까요.”

“미친놈.”

탁, 전화가 끊겼다.

“내가 양치기 소년인가? 도무지 내 말은 믿지를 않네.”

이어 그는 모친에게 소리쳤다.

“이제 외국인 며느리 얘기는 그만해! 곧 서울에 가서 쭉쭉 빵빵한 아가씨를 데려올 테니까.”

“정신 나간 놈.”

“엄마, 가게 외상값이 얼마야?”

“갚으려고?”

모친의 얼굴에 모처럼 화색이 돌았다.

“금방 줄 거라고 하고, 소주랑 라면 좀 사와.”

“어이구, 저 화상! 내가 저런 놈을 낳고 미역국을 두 그릇이나 먹었으니 나도 한심한 년이지.”

그녀는 가슴을 내리쳤다.


도원그룹 비서실의 전화가 울렸다.

“실장님, 회장님을 찾는 전화가 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누구야?”

“신분은 밝히지 않고, 다짜고짜 중요한 일이라고 하네요.”

“사전 약속이 없으면 안 된다고 전해.”

“그랬는데도 소용없어요. 회장님 자제분의 교통사고와 관련이 있다면서요.”

“뭐? 얼른 돌려…!”

치수는 헐떡이며 회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평소와 다르게 무슨 일이야? 왜 문을 잠그고?”

“긴급하게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그의 속삭임에 성국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쪽에서 요구하는 게 뭔가?”

“블랙박스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5억을 달라는 겁니다.”

“그게 가짜일 수도 있잖아?”

“돈을 주기 전에 확인하면 됩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일단 내일까지 미뤄 봐.”

“네.”


제일병원 현관에 고급차가 멈췄다. 생각에 잠겨 있던 성국이 차에서 내렸다.

“아무도 들이지 말아.”

그는 수행비서에게 지시한 후 병실 문을 열었다. 팔에 링거를 꽂은 도진이 현정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회장님, 안녕하세요?”

“이거 박 의장님의 따님이 아니신가. 도진이 문병을 왔나 본데, 내가 방해를 하는군.”

“아니에요. 도진 씨가 이만하길 천만다행이죠?”

“그럼. 음, 음….”

현정의 애교에 그는 감정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저의 아빠도 병문안 오실 거예요.”

“정말? 박 의장님께서?”

도진은 감격했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도진 씨, 빨리 완쾌하세요.”

“박 의장님께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

성국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저, 현정 씨와 잘될 것 같아요. 아버지, 박 의장님이 몇 선이죠?”

도진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성국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너 솔직히 말해라. 사고 당시 네가 운전했니?”

“아니요. 상태가 했어요. 목격자들도 있잖아요.”

도진은 강하게 손사래를 쳤다.

“블랙박스가 발견됐는데도?”

“네? 그럴 리 없어요! 아주 멀리 던져버렸다고요. 경찰이 가지고 있대요?”

도진은 얼떨결에 내뱉었다. 성국은 고개를 가만히 저었다.

“그럼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해요!”

“상태가 아니라 바로 너였구나.”

도진은 그의 팔을 붙잡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저 어떻게 하죠? 현정 씨와 결혼 얘기도 나왔는데, 이게 들통나면 혼사가 깨질 거예요. 제가 박 의장님 사위가 되면 우리는 재력과 권력을 모두 가질 수 있어요. 솔직히 상태는 잃을 게 없지만 저는 다르죠. 제발 살려 주세요. 아버지는 그럴 힘이 충분하잖아요.”

사실 도진은 입원 후 블랙박스가 발견될까 봐 불안했다. 그런데 기자들이 병원에 몰려 있어 나갈 수 없었고, 이틀이 지나 변복하고 밤에 병원을 빠져나왔다. 그는 사고 현장을 손전등으로 비추며 중얼거렸다.

“이 근처인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실수야, 그때 옷 속에 숨겼어야 했는데.”

결국 수거에 실패했지만, 다른 사람들도 똑같을 거라고 단정지었다. 도진이 블랙박스를 찾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미 두식의 손에 넘어간 후였으니.


회장실의 분위기는 매우 무거웠다. 치수는 긴장한 듯 안절부절못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회장님, 이 일은 반드시 감춰야 합니다. 만약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면 국회의장 집안과의 혼사는 어려워집니다. 물론 회장님의 평판에도 치명적인 타격이 됩니다. 한 번 눈을 질끈 감으시면 정치권력을 쥘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사실을 덮어야 합니다.”

성국의 얼굴에는 깊은 번민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는 이 기회를 포기할 수 없었고, 명성의 추락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아들을 차가운 감옥에 보내는 것은 용납이 안 되었다. 결국 그는 진실과 부정(父情) 사이에서 자식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그 놈이 요구하는 금액을 주고 블랙박스를 회수해 와.”

“네.”

“곧 인사이동이 있을 텐데, 이번 일을 잘 해결하면 계열사 사장단에 포함될 거야.”

“정말요?”

“이 실장, 애들이 몇 명이라고 했지?”

“셋입니다.”

“지금 도원 건설이 송도에서 아파트를 분양하고 있잖아. 전망 좋은 곳에 아이들 명의로 한 채씩 이전해.”

“감, 감사합니다.”

치수의 목소리는 감읍으로 넘쳤다.

“회장님, 심려를 놓으십시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서만은 안 돼!”

“네? 무슨 말씀인지?”

“누구나 최선을 다할 수 있어. 결과가 중요하지.”

“어떻게 해서든 완벽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자네를 믿겠네. 이 일은 무덤까지 갖고 가는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그날 밤, 성국은 서재에서 상심에 잠겼다. 그는 결정을 내리면 즉시 행동에 옮기는 성격이었다. 그 덕분에 수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도원을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그는 술잔을 비우고 수화기를 들었다.

“윤 대표, 내일 저녁에 좀 봐.”

‘그래. 상태에게는 몇 배로 보상해 주면 되지.’

그는 점점 괴물처럼 변해갔다.


야구 모자를 쓴 두식이 공원에서 그네를 타고 있었다. 멀리서 치수가 다가왔다.

“꽤 한가하네.”

“저야, 아쉬울 게 없죠.”

“근데 왜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했어? 사람들이 많은데.”

“혹시 저를 납치해서 야산에 파묻을지도 모르잖아요. 다행히 여기는 보는 눈이 많아서 그런 걱정은 없죠.”

두식은 여러 곳에 설치된 CCTV를 가리켰다.

“줘 봐. 확인할 테니.”

“돈을 먼저 주는 게 순서 아닐까요?”

“확실히 원본이겠지?”

“당연하죠.”

“돈은 그 계좌로 송금했어. 30분 후에 인출할 수 있을 거야.”

치수는 받은 메모리 카드를 노트북에 꽂았다. 동영상을 보며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5억이다! 휴대폰으로 입금을 조회한 두식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상상이 현실로, 이론이 실제로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그는 벼락같이 줄행랑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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