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난임 녀석, 날 자꾸 울리네

호르몬 탓일까? 정말로 기분 탓일까?

by 둘둘

시험관을 시작한 후 자주 운다.

꺽꺽 오열하거나 엉엉 통곡하는 건 아니고, 왈칵 솟구치거나 문득 고이는 것에 가깝다.


(1) 고전명작 미드 섹스앤더시티(Sex and the City)를 다시 보다가

그런 내용이 있는 줄 몰랐다. 누구보다 아이를 원하던 샬롯이 산전검사를 받고 좌절한 뒤 시험관을 시작한다.(섹스앤더시티는 미국판 무한도전 인걸까? 맘먹고 찾으면 없는 짤이 없다.) 그러나 쓸 수 있는 난자가 없다는 전화를 받는 장면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보다가 갑자기 눈물을 뿜었다. (아, 샬롯.. 어떡해ㅠㅠ)


임신을 하고자 맘먹고 나서 거기에만 몰두하는 샬롯처럼, 이게 생각보다 하루종일 생각을 하게 된다. 내 생활 전반을 큰 목적 하에 관리해야 하기 때문인 것 같다. 스케쥴도, 일하는 시간이나 자는 시간도, 먹는 것도, 운동도. 아이를 갖는다는 건 대체 얼만큼의 책임감과 희생이 뒤따르는 걸까? 갖기 전부터 이리 마음을 많이 써야 하는 걸 보면.


(2) 이승우, <고요한 읽기>라는 책을 읽다가

'환한 어둠'(110면 부터)이라는 챕터의 주제는 '기다림'이다. 병원을 다녀온 날이었던가, 기똥차게 내 얘기 같은 내용이 줄줄이 나왔다.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5일의 마중>과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소재로 이야기는 펼쳐진다. 두 작품의 주인공은 일생의 기다림인 사람들이다. 누워서 책을 읽다가 베개를 적셨다. 일부를 발췌한다.


고도가 오지 않을 거라면 기다릴 이유가 없다. 그러나 고도는 올 것이다. 고도는 내일 올 것이고, 그러니 그들은 기다리지 않을 수 없다. ... 고도를 기다린다는 것 말고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연극을 하고 노래를 하고 목을 매달고 생각하고 실없는 말을 주고받는다. 그렇지만 그 모든 일은 고도를 기다리는 동안, 기다리면서 하는 일이다. 기다리기 위해 하는 일이다. 기다림의 수단으로 하는 일이다. 기다림이 그들의 일이다. 그 모든 것이 기다리는 일의 일부이다. 기다리는 것 말고 그들이 정말로 하는 일은 없다.


기다림은 그냥,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기다림은 무위와 관계 없다. 오히려 기다림은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적극적인 행위이다. 말하자면, 노동. 기다리는 사람은 기다리는 일을 하느라고 그가 할 수 있는 다른 많은 일을 하지 못한다.


(3) 그냥 누워 있다가

이건 설명할 수 없다. 설명할 만한 인과관계도 없고, 이유를 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번이 아니다. 종종 일어난다.


(4) 갑자기 문득 생기는 연민에

이렇게 내가 외로운데, 난임이라서 서러운데, 나 말고도 온갖 이유로 소수자라 명명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얼마나 외로울까? 라는 감상에 빠져 눈물이 났다.



눈물 꼭지가 고장났나보다. 난임이라는 상황, 시험관이라는 과정, 아무튼 보통 곤란한 녀석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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