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 장미꽃

배삼룡 원장님과 503호의 웃음꽃

by 이미숙

기억이 희미한 듯했지만, 유쾌한 순간은 오래 남는다.

그분은 여전히 같은 질문을 던지며 회진을 돌고,

우리는 그 모습에 다시 한번 웃음을 피운다.

이번 해는 그동안 갖고 지내온 모든 지병을 고치겠다고 마음먹고 실행에 옮겼다. 병원 생활 3개월이 접어든 어느 날, 매일 오후 3시면 원장님 회진이 있다.


그런데 그 원장님께서는 연세가 많으신 현직에선 은퇴하신 명예 원장님이셨다. 말씀도 행동도 아주 굼떠 보이셨다. 그래도 매일 각 방을 회진하셨고 간단한 브리핑을 해주시려 노력하셨지만, 왠지 어설프고 불편해 보이셨다.


늘 손에는 작고 노란 메모지 몇 장이 다 해지도록 쪼그라든 것을 들고 한 분 한 분 환자분 얼굴 보시며 노란 종잇장을 넘기시면서 "누구시죠?" 이름을 확인 후 똑같은 대화로 "어디가 어떻게 아프시냐?"라는 물음과 함께 "괜찮냐?"라는 질문을 매일 되풀이하셨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환자 침상에 이름은 붙어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노란 쪽지로 보시면서 확인해 가는 변함없는 행동. 그야말로 옛날식 당신이 하셨던 아날로그. 요즘은 컴퓨터나 인공지능 시대로 종이쪽지가 웬 말인가.


첨단의 길을 따라가기 바쁜 시대에 사는 이 시점에 시간의 멈춤을 보는 것 같았다. 그 자체로 순수하기도 하지만 무척 답답해 보였다. 서너 달이 지나도 환자 이름은 물론 환자 부위 상태를 기억 못 하시고 때론 다른 부위로 착각하시며 "괜찮냐?" 물어보실 때가 많아 당황할 때가 많았다.


어김없이 오늘도 방문하여서 "누구시죠?"


"...."


순간 정적.


곧 터지는 웃음을 참으며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허리 수술한 환자에게 "다리는 좀 어떠세요?" 묻고, 어깨 수술한 환자에게 "허리는 어떠시냐?" 묻고, 두 다리 수술 환자 발을 만지시며 "많이 부어있는 상태인데 아프시겠다."라며 위로하던 날, 그 방 환자 모두 참았던 웃음이 빵빵 터지고 말았다.


간호실에 가서 "아무개 원장님 원래 전공이 무엇인지" 여쭤보니 "이비인후과"라고 알려줘서 더욱 놀랐다. 아니 근데 왜? 전공이 다른 분이 정형외과 병동을 회진하시죠? 물으니 "아마도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요!"라는 의아한 대답만이 돌아왔다.


웃지 못할 해프닝으로 마무리했지만, 우리 환자들 사이엔 순수하고 왜소한 아날로그 원장님 별명을 옛날 개그맨 비실비실 배삼룡 씨와 너무 닮았다고 하여 '배삼룡 원장님'이란 애칭이 주어졌다.


그날 이후 원장님에 대한 애칭으로 술렁이며 관심이 원장님한테 쏠렸다. 어느 날 아침이면 다른 방 환자들한테 전화가 온다. "원장님 지금 출근하셔서 방에 들어가 계신 중이라든지, 어느 방으로 회진 돌고 있다든지, 무얼 하고 계신다든지" 각자의 본모습을 나에게 소통해 주고 있었다.


왜 나에게 알려주냐고 물으면 "그래야 할 것 같아서."라며 어이없는 장난을 친다. 그렇게 아픈 고통스러운 시간을 사건 하나로 웃음을 머금으며 재미난 소소한 일상으로 보냈다.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회진 시간. 비실비실 깡마른 작고 왜소한 나이 많으신 할아버지 한 분이 하얀 가운만 걸치니 그야말로 의사로 변신한 마법사처럼 포스가 나오신다.


여전히 "안녕하세요~ 누구시죠?" 이름을 대답해 드리면 "어디가 아프신가요?" 똑같은 질문에 웃음부터 나온다. "괜찮아지고 있다."며 짧은 단답형이 오고 가고, 내 차례가 왔을 때 난 "원장님!" 하고 먼저 불렀다. "네?" 의아한 모습으로 바라본다. "저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하니 잠시 머뭇거리더니 "뭔데요?" 하셨다.


"저 사실은 우리 방에 모두 입맛을 잃은 환자들뿐이니 오늘 오리찜이나 한 마리 사주시고 가면 안 되겠냐?"는 물음에 원장님 당황하신 듯 멈칫하신다. "혹시 아드님이 없으세요? 따님 없느냐? 남편 없으시냐?" 계속 물으신다. "네, 없어요."라고 대답해 드리니 잠깐 정적이 흐르더니 "그러면 따로 만나야 하겠는데요." 하시며 농담으로 화답해 주며 나가시는 원장님을 다시 불러서 "사모님 계시죠?" "네" 답하신다.


"에이, 그럼 불륜이잖아요! 안 먹고 말겠습니다." 환자들 모두 배 잡고 깔깔 웃음으로 그렇게 그날 마무리됐다.


다음날 기억을 못 하시는지, 잊어버린 척하시는지 변함없는 멘토로 "저어, 누구시죠?"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이 한결같으신 배삼룡 원장님 등장만으로 이 방은 다시 웃을 준비 태세였고 나는 "네, 저는 어제... 오리찜...." 순간 생각나신 듯 작은 눈을 크게 하시면서 "꼭 드시고 싶으세요?"


재차 사줄 것 같지 않은 말의 멘트 날리려는 순간 "저 시간이 지나니 이제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어요. 어제 사주실 줄 알았는데...." 오늘은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노라 삐진 것처럼 괜찮다면서 내일 퇴원할 거라 했을 때 건성으로 들으시는 듯 귀담아듣지 않으셨지요.


그때 방을 나가시려던 원장님을 다시 부르며 "원장님, 엘리베이터 옆에 놓여있는 하트 모양으로 된 큰 장미꽃다발, 혹시...오리찜 대신 보내주신 거죠? 감사합니다." 전하며 표정을 살피니 황당한 얼굴로 간호과장에게 "웬 꽃이냐?"라며 되물으실 때, 간호과장님 귓속말로 전해주신 얘기....


간호사님 중 한 분이 오늘 생일이었는데 남자 친구가 보내온 것이라 설명해 드리니 멋쩍은 표정으로 얼른 자리를 뜨시는 모습에 또 속였다는 장난 섞인 까르르, 또 당했다는 억울함으로 돌아가셨다.


다음날 난 정말로 퇴원했고 남아있던 언니 동생들이 하는 말, "원장님 오셔서 내가 안 보인다. 오리찜 안 사줘서 가셨나 보다."라고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셨다고 전했을 때, 이제 나를 각인시켜 드린 것 같아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음이었다.


원장님도 농담인 것 아시면서 받아주셨지만 감사했고, 이렇게 통증으로 모두 우울하고 힘든 시간, 찌푸린 얼굴에 잠시라도 활짝 웃음으로 잊게 하려던 장난기 많았던 503호 짱언니 형님들.


언제든 우리 방 언니 형님들 정 나눈 이야기들로 오랜 시간 하하 호호 다시 지난 추억 새기며 새록새록 꺼내보는 이야기꽃으로 활짝 피어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