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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쓴 에세이

양궁과 화살. 그리고 7세 고시

by 복습자

이희주의 단편소설 「최애의 아이」를 읽고, 나는 양궁을 떠올렸다.


우리나라 양궁이 세계 최고 수준인 이유는 단순한 개인기 때문이 아니다. 파리의 레쟁발리드 경기장과 똑같은 구조의 시설을 국내에 재현하고, 바람의 방향까지 계산해 남한강에서 훈련하고, 관중의 소음에 적응하는 방식으로까지 훈련 시스템이 정교하게 이어진다. 선수는 바뀌어도 시스템은 남는다. 중심을 꿰뚫는 화살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하지만, 양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여전히 ‘사람’이다. 화살은 도구다. 아무리 과녁이 중요하다 해도, 화살에 원격조종 장치를 달거나 동력을 붙인다면, 그건 반칙이다. 선을 넘는 일이다.


「최애의 아이」 속 세계는 이 선을 넘는다. 출산율 저하를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정치권은 인기 아이돌의 정자를 수집해 인공수정을 장려한다. 주인공은 자신이 ‘최애’로 여기는 아이돌의 유전자를 통해 아이를 가지는 걸 목표로 삼는다. 과녁은 명확하다. 문제는, 모두가 과녁만 본다는 데 있다. 누가 화살을 쏘는가? 누가 선수인가? 언제부터 우리는 ‘정자’와 ‘아이’를 구매 가능한 상품처럼 말하기 시작했나?


최근 우리 사회의 ‘7세 고시’ 열풍도 닮아 있다. 아이에게 영어와 수학을 미리 가르치고, AI 시대에 맞춘 경쟁력을 준비하라 한다. 왜 하필 영어와 수학일까? AI가 영어를 잘 알아듣고, AI의 뿌리가 수학이라서? 그렇게 말하는 전문가들의 말이 점점 당연하게 들리는 사회. 교육 평론가 이범의 말처럼, ‘일찍 시작해야 한다’는 마케팅이 일상이 됐다. 소아정신과 전문의 천근아는 이 상황을 두고 “선을 넘었다”라고 했다.


정확히 그렇다. 선을 넘었다.


과녁에 집착한 나머지, 화살에 조작 장치를 다는 일.


사람을 화살 위에 올려버리는 일.


사람이 사라지고, 목적만 남은 사회.


「최애의 아이」는 묻고 있다.


그 아이는 누구를 위한 아이인가?


그 화살은 누구의 손에서 떠났는가?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는 어디를 향해 쏘아지고 있는가?


추신: 어제 내가 쓴 감상평(이 아래의 글)을 챗GPT 4.0에게 보여주니, 자기 방식으로 내 글보다 더 낫게 요약을 했다. 그리고 끝에 에세이, 서평, 발표문, 보고서 형식으로 써줄까라고 물었다. 난 그렇게 해줘라고 답했다. 이게 얘가 에세이 형식으로 내 글을 다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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