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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리터치 예정일: 2030. 4. 18.)

by 복습자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중에서

직접 경험이 가장 강하고 나를 변화시키잖아. 책이나 영화를 보는 간접경험도 아주 일부는 그렇고.


차가운 음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는 얼마나 더운 여름을 지나서 여기까지 왔을까. - 시 강우근 집 <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 "우리가 모르는 수십억 개의 계단들" 중에서


감각적인 시지? 내 연애사가 떠오르기도 하네. 두 번째 연애 때 일을 들려줄게.


어느 봄날 저녁 동료이자 - 다른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 여자 친구인 진영이 누나와 A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이 있었는데, 같은 날 오후 4시쯤 동료인 여자 후배 -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 채연이가 A까지 차 좀 태워 달라고 했어.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나까지 셋 모두 동료니까 친해지면 좋으니까 여자 친구에게 양해를 구하고, 여자 친구도 OK 하고 셋이 만나면 되었는데. 그래 이게 어려운 일이지.


베스트는 당연히 여자 친구와 약속을 지키는 것인데, 난 여자 친구에게 거짓말을 하고 채연이를 만났어!


그리고 며칠 후 여자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아마 내가 이걸 사실대로 말한 거 같아! 당연히 여자 친구는 폭발했지. 소심한 편에 눈치도 많이 보는 여자 친구가 외딴 카페이긴 했지만 아아를 카페 밖 잔디밭에 쏟으면서 소리를 지르더라고.


차가운 음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는 얼마나 더운 여름을 지나서 여기까지 왔을까.


내가 뭐라고 나 때문에 차가워진 여자 친구가 가여운 느낌도 들면서, 결국 그 차가운(-)만큼 나를 따스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겠더라고. 이 일을 계기로 나중에 연인과 다툴 땐 내 논리나 감정은 그게 아니었으니 오해하는 너를 어떡하냐는 식으로 접근하지 않았어. 네 감정이 그런 거면 그런 거니까 그런 감정을 들게 한 내 생각이 짧았다고 말해주었어.


그렇다고 내가 아주 그런 행동을 안 했던 건 아니야. 들키지 않 거지. 그런데 들키면 우선 후자처럼 생각하고 말한다는 거지.


J지역을 여행할 때 연인에게 이야기하고 대학 친구들을 저녁에 만났어. 이 만남 전에 대학 때 사귄 건 아니고 - 지금 연락 안 하는 - 가끔 밥 사주고, 영화 보여주던 누나 H를 카페에서 20분 정도 비밀로 하고 만났거든. 이때 대화도 일상 대화였고, 다시 연락 안 해.


애정도 그런 것(인공 포도향) 일지 모른다. 세상에 '진짜 사랑' 따위 얼마나 있을까?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것이 훨씬 더 많지 않을까? 진짜가 아니란 걸 어렴풋이 알면서도 다들 내버리진 않는다. 진짜는 세상에 그리 자주 굴러다니지 않는다. 그러니까 자기 손에 든 것을 사랑이라고 정의 내리고, 거기에 순응하고자 마음먹는다. 그런 것이 결혼인지도 모른다. - 나기라 유 <유랑의 달> 중에서


향기는 다른 - 좋거나 나쁜 - 향기로 덮이는 법이니까. 각자가 정의 내린 향기보다 상대가 미치지 못하거나, 더 강한 향기를 내는 상대가 나타나면 결혼을 유지할 수 없겠지. 이건 상대도 마찬가지고.


내 경우에 둘 다 독서가 취미인 것은 좋은 향기지만, 음식에 대한 관점이 다른 - 난 한식파지만 양식도 요즘은 잘 먹으니 휴일 아침에 같이 아침을 준비해 먹으며 이야기 나누는 걸 좋아하는데, 연인이 그렇지 않은 - 건 내겐 나쁜 향기야. 식성은 에로스적인 거와도 연관이 있다는데.


다행히 매일이 휴일은 아니니까. 그리고 아주 가끔 내가 양식을 준비하고 내가 꿈꾸는 아침을 가지니까. 난 순응한다.


그런데 서로 다른 점이 상대가 이성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이라면 달라. 물론 둘 모두 성향이 외향적이라면 괜찮겠지만.


결국 시간은 유한하니까. 둘이 보내는 시간이 줄잖아. 아마 둘이 보내는 시간에 대한 관점이 다른 게 근본적 이유겠지. 여기까지는 딱 둘만 있을 때 생각의 흐름이야. 내가 누릴 시간(여생)을 기준으로 삼으면 결정은 쉽고, 에둘러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


제 입밖에 모르는 게걸스러운 식욕, 의처증과 건망증이 범벅이 된 끝없는 잔소리, 백살도 넘어 살 것 같은 인색함, 그런 것들이 너무 빤히 보였다. 그런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견딘다는 것은 사랑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같이 아이를 만들고, 낳고, 기르는 그 짐승스러운 시간을 같이한 사이가 아니면 안 되리라. 겉멋에 비해 정욕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 - 박완서 <마른 꽃> 중에서 -


그런데 셋이면 위 말이, 상황이 그려진다. 저런 시간의 초반이 촘촘히 쌓여 있었다면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어. 하지만 근래에 흐트러졌고, 앞으로도 그렇다면 순응할 수 없지.


, 세 번째에게는 이러저러하다고 꼭 나중에 설명을 잘해줘야 해. 아니. 앞으로 꾸준히 감정선을 잘 쌓아줘야 해. 운명론을 믿긴 하지만. 너는 분명 좋은 영향을 주는 엄마일 거야.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최백호 - 낭만에 대하여) / 그 어디에 살더라도 제발 나쁜 안부 안 들리게(성시경 - 한번 더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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