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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노 Oct 12. 2020

동화 속 마을에 들어온 것 같아

여행 3일차: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체스키크룸로프

2019.09.24 여행 3일차 체코 프라하-체스키크룸로프

프라하 소버린 호텔에서 먹은 조식

전날 하루종일 돌아다녀서 단잠에 빠졌다가 오전 6시 50분에 기상했다. 이른 시간이라 다시 누우려고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아 식당으로 내려갔다. 여행을 하면 많이 걸어서 살이 빠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조식을 꼬박꼬박 챙겨먹어서 오히려 살이 찌고 있는 것 같았다. 해시 브라운, 계란, 베이컨, 소시지에 빵까지 전부 맛있게 먹고 방으로 들어와 짐을 쌌다. 9시에 체크아웃 후 짐을 맡긴 뒤 체스키크룸로프로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프라하 시내를 구경했다.


가장 먼저 간 곳은 천문시계탑 전망대였다. 표를 사기 위해 건물 3층으로 올라갔는데 멋진 전망을 볼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입장권을 구매한 뒤 철문을 통과하자 어마어마한 경사로가 있었다. 6층 되는 높이를 올라가야 해서 엘리베이터를 탈까 고민했지만, 한 발 한 발 걸으며 오래된 시계탑의 정취를 느끼고 싶어서 구불구불한 경사로를 따라 올라갔다. 숨이 찰 때에는 작은 창문으로 보이는 구시가지 풍경을 보며 다시 힘을 냈다. 경사로 끝에 나타난 나선형 계단을 오르자 드디어 전망대가 나왔다. 

프라하 천문시계탑 전망대로 가는 경사로

70m 높이에서 본 프라하의 전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날씨가 흐렸지만 알록달록한 건물과 붉은 지붕이 멋드러지게 어우러져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통로를 따라 한 바퀴를 돌며 풍경을 감상했는데, 360도로 탁 트여 있어서 구시가 광장에 위치한 성 니콜라스 성당부터 저멀리 있는 프라하성까지 한눈에 담겼다. 절경을 보니 프라하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더욱 아쉽게 느껴졌다. 앞, 옆, 뒤로 돌아다니면서 정신 없이 풍경 사진을 찍은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를 내려왔다. 

천문시계탑 전망대에서 본 프라하 풍경
천문시계탑 전망대에서 본 구시가 광장
천문시계탑 전망대에서 본 성 니콜라스 성당
천문시계탑 전망대에서 본 틴 성모 교회

천문시계탑에서 카를교까지 걸어가다가 전망 좋은 포토존이 보여 발걸음을 멈췄다. 블타바강을 길게 가로지르는 카를교와 그 뒤로 우뚝 솟은 프라하성이 눈에 띄었다. 카를교 위 풍경은 낭만적이었지만, 멀리서 본 카를교는 거칠고 투박했다. 한 발 물러서서 보면 시야가 확장된다는 말처럼 카를교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전날 밤 이곳에서 야경을 봤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도 남았다. 

프라하 구시가지를 걷다가 마주한 카를교

카를교에 다다르자 각국의 투어 깃발이 곳곳에 보였다. 수많은 관광객으로 붐볐지만 카를교는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다리 위에서 악사들의 연주를 들으며 경치를 바라보니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 유럽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클라리넷, 트럼펫, 첼로 등 여러 악기의 선율이 조화를 이루며 감성을 자극했다. 다퉜던 연인도 금세 화해하면서 서로를 뜨겁게 안아줄 것 같은 낭만적인 분위기가 형성됐다.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카를교
카를교에서 바라본 프라하성

악사들 대부분 머리가 하얗게 센 할아버지들이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설레는 일이 없어지고 삶의 의욕도 저하되기 마련인데, 하고 싶은 걸 하면서 노년의 인생을 즐기는 모습을 보니 존경심이 들었다. 나도 저렇게 근사한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카를교에는 악사뿐만 아니라 화가도 많았다. 그 중에서도 중절모를 쓴 채 프라하 풍경화를 그리고 있는 한 화가 아저씨가 눈에 들어왔다. 카를교를 지나가는 관광객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그림에 집중하며 예술혼을 불태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캔버스에 물감을 칠할 때마다 어떤 걸작이 탄생할지 기대감이 커졌다. 


완성된 그림은 그야말로 하나의 작품이었는데, 혹여나 다른 여행지를 돌아다닐 때 짐이 될까봐 선뜻 구매하지 못했다. 매일 멋진 그림을 몇 점씩 만드는 화가 아저씨를 보면서 문득 나는 언제쯤 글쓰기 장인이 될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기계적으로 아무 감정 없는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감정을 어루만지는 글을 '빠르게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렇게 되려면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글을 써야겠지. 반대편으로 걸어가니 귀걸이, 목걸이 등 직접 만든 공예품을 파는 상인도 있었다. 카를교는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동시에 그들이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의 장을 열어주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를교 위에서 연주하고 있는 악사들
카를교 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

카를교에서 구시가 광장 쪽으로 걸어가는데 굴뚝빵(뜨르델릭)을 파는 곳이 보였다. 원래 길거리 음식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굴뚝빵은 체코 대표 간식이라 한 번 맛보고 싶었다. 매장에서 굴뚝빵 하나를 주문하자 즉석에서 돌돌 말아 구워진 빵이 나왔다. 두꺼운 꽈배기에 시나몬을 뿌려 먹는 느낌이었는데 양도 많고 맛있었다. 현지 음식을 즐기면서 프라하 여행을 잘 마무리한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프라하에 오면 꼭 들러야 한다는 마뉴팍투라에서 맥주샴푸와 살구핸드크림을 구매하고, 하벨 시장에서 기념품 자석을 산 뒤 소버린 호텔로 돌아갔다. 

체코 대표 간식인 굴뚝빵(왼쪽), 마뉴팍투라 맥주샴푸
레지오젯 버스에 설치된 개별 스크린

호텔에서 캐리어를 찾은 후 트램을 타고 레지오젯(RegioJet)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1번 플랫폼에서 조금 기다리니 체스키크룸로프로 가는 노랑색 버스가 등장했다. 아래칸에 짐을 싣고 운전기사에게 모바일 티켓을 보여준 뒤 지정석에 앉았다. 우리나라 우등 고속버스보다 좌석이 좁았지만 비행기처럼 개별 스크린이 있어서 영상도 보고 경로 확인도 할 수 있었다. 이것저것 만지다가 피곤해서 잠을 청했다. 


오후 3시에 출발한 버스는 3시간을 달려 체스키크룸로프에 도착했다. 버스 터미널에서 내렸는데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감이 오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눈치껏 다른 사람들이 가는 곳을 따라가니 블타바강이 감싸고 있는 아담한 마을이 나왔다. 체스키크룸로프는 300년 전 마을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개인적으로 이번 동유럽 여행 중 가장 기대되는 도시 중 하나였는데,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클까봐 살짝 걱정도 됐다. 그러나 이런 걱정은 기우였다. 체스키크룸로프는 '동화 마을'이라는 수식어가 딱 어울릴 만큼 아기자기하고 예뻤다. 울퉁불퉁한 돌길에서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가는 와중에도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체스키크룸로프성 망토다리에서 전경을 내려다보는 사람들을 보니 나도 빨리 성에 올라가고 싶었다.  

체스키크룸로프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체스키크룸로프 마을 입구에서 본 풍경
체스키크룸로프성 망토다리
마을 입구에서 본 체스키크룸로프성
체스키크룸로프 거리 풍경

체스키크룸로프는 역사가 깊은 도시답게 지은 지 수백 년이 훌쩍 넘은 건물들이 많았다. 노후한 호텔보다 모던한 호텔을 선호해서 여행 전 숙소를 고를 때 난관에 부딪혔는데, 고심 끝에 예약한 곳은 크룸로브스카 포하드카였다. 연두색 외관에 간판이 크게 붙어 있어서 어렵지 않게 호텔을 찾을 수 있었다. 호텔 안으로 들어가니 아주머니 한 분이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영어를 잘 못하셔서 구글 번역기를 사용하셨는데, 방을 직접 둘러보시면서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해주셨다. 방은 좁고 기다란 일자형 원룸이었다. 독특하게도 화장실 문이 따로 없고 샤워실 유리가 전부 투명했다. 침대 위에는 웰컴 초콜릿 2개가 살포시 놓여 있었다. 생각보다 방이 아담했지만, 고풍스럽고 아늑한 분위기에 점점 매료됐다. 일반 호텔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유적지에 온 느낌이라 오히려 좋았다. 

체스키크룸로프 숙소 크룸로브스카 포하드카 외관
체스키크룸로프 숙소 크룸로브스카 포하드카 내부 모습
크룸로브스카 포하드카에서 묵었던 방

짐을 풀고 10분 정도 쉬다가 호텔을 나왔다. 아까 지나왔던 길이 예뻐서 입구 쪽으로 다시 걸어갔다. 사진을 찍다 보니 금세 하늘이 어두워져서 체스키크룸로프성으로 향하다가 전망이 좋은 쉼터를 발견해 잠시 휴식을 취했다. 고요하고 평안해서 좀 더 머물다 가고 싶었지만,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성에 올라가 마을 풍경을 보고 싶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발사의 다리를 건너 계단을 몇 번 오르니 체스키크룸로프성 입구가 나왔다. 13세기에 세워진 체스키크룸로프성은 체코에서 프라하성 다음으로 큰 성이다. 성 안에는 영주가 살던 궁전, 정원, 예배당 등 중세 귀족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시설들이 즐비하다. 저녁 7시쯤 체스키크룸로프성에 도착했는데 관광객이 거의 없었다. 프라하에서 당일치기로 체스키크룸로프에 오는 사람들이 다 떠나서 한산한 듯했다. 

체스키크룸로프성으로 가는 길에 발견한 작은 쉼터
이발사의 다리에서 본 체스키크룸로프성
체스키크룸로프성 입구

길을 따라 쭉 올라가니 망토다리가 나왔다. 밑에서 볼 땐 엄청 높아보였는데 전망을 보며 천천히 걸으니 금방 다다랐다. 망토다리에서 바라본 체스키크룸로프의 야경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SNS에 '동유럽 여행'을 검색하면 뜨는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 내 눈 앞에 펼쳐졌다. 동화 속 세상에 들어온 것 같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붉은 지붕의 건물들이 오밀조밀 모여있어서 아기자기한 장난감 마을 같기도 했다. 

체스키크룸로프성에서 바라본 전경
체스키크룸로프성에서 바라본 전경
체스키크룸로프성에서 바라본 전경
체스키크룸로프성에서 바라본 전경
체스키크룸로프성에서 바라본 전경

밤이 깊어지자 파랗던 하늘이 까맣게 변하면서 거리의 불빛들이 화사하게 빛났다.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풍경을 놓치고 싶지 않아 쉴 틈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사진을 다 찍은 후 가만히 서서 경치를 바라보고 있는데 한국인 모녀가 다가와 사진촬영을 부탁했다. 단란한 모녀의 모습에 사진을 찍으면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도 다음에는 엄마랑 같이 체스키크룸로프에 와서 이 멋진 풍경을 함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메라를 다시 건네자 따님 분이 감사 인사를 하면서 "저희도 사진 찍어드릴게요"라고 말했다. 다양한 각도로 열심히 사진을 찍어주는 모습을 보며 역시 사진은 한국인이 최고라는 걸 느꼈다. 사진촬영이 끝나고 모녀와 짧게 대화를 나눈 뒤 헤어졌는데, 여행지마다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가는 것 같아 뿌듯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게 이번 여행 최고의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체스키크룸로프성에서 바라본 전경
체스키크룸로프성에서 바라본 전경

체스키크룸로프성 관람을 마치고 내려오니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아 거리가 한적했다. 불이 켜져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 체스키크룸로프 맛집으로 유명한 슈베이크 레스토랑을 찾았다. 필스너 우르켈과 함께 소볼살을 시켰는데 갈비찜처럼 고기가 연해서 목구멍으로 부드럽게 넘어갔다. 고기 밑에 깔린 매쉬포테이토는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너무 맛있어서 다른 음식도 먹어보고 싶었다. 더 먹을지 말지 고민을 좀 하다가 체코 전통 음식인 토끼다리 요리와 코젤 다크를 추가로 주문했다. 토끼다리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생소한 메뉴였지만, 이 곳이 아니면 맛볼 수 없을 것 같아 도전해봤다. 살은 연한 분홍빛을 띠었는데 닭다리와 식감이 비슷했다. 배가 불렀는데도 계속 손이 갈 정도로 매력적인 맛이었다. 어떤 음식을 시켜도 맛있는 식당을 고른 내 자신이 기특했다. 

체스키크룸로프성 관람을 마치고 내려가는 길
슈베이크에서 먹은 필스너 우르켈과 소볼살
슈베이크에서 먹은 코젤 다크와 토끼다리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걸어가는데, 소도시 특유의 고즈넉한 풍경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대충 사진을 찍어도 작품이 나오는 아름다운 풍경의 밤거리를 거닐며 '체스키크룸로프에서 1박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프라하와 달리 밤에 관광객이 많지 않아 여유롭게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점이 무엇보다 좋았다. 이번 여행 중 가장 애정하는 도시가 프라하에서 체스키크룸로프로 바뀔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한적한 체스키크룸로프의 밤거리
밤에 더욱 빛나는 체스키크룸로프 성벽
블타바강이 가로지르는 체스키크룸로프 마을 풍경
한적한 체스키크룸로프의 밤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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