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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노 Oct 05. 2020

이래서 다들 '프라하' 하는구나

여행 2일차: '낭만의 도시' 프라하의 진가를 발견하다

2019.09.23 여행 2일차 체코 프라하

아침 일찍 일어나 바라본 호텔 창 밖 풍경

시차 적응이 안 됐는지 오전 6시에 절로 눈이 떠졌다. 창 밖을 쳐다보니 하늘이 아직 불그스름했다. 다시 잠에 들려고 누웠지만 정신이 멀쩡해서 몸을 일으켰다. 머리를 감고 호텔에 나오니 오전 7시였다. 관광객들이 돌아다니기엔 이른 시간이라 거리가 한적했다. 남들보다 일찍 하루를 시작하고 부지런히 움직인다는 생각에 왠지 뿌듯해졌다. 호텔 근처 거리를 걷는데 담배를 피면서 터덜터덜 걸어가는 프라하 직장인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들에겐 이 아름다운 프라하도 그저 일상 속 따분한 공간이려나. 

소버린 호텔에서 바츨라프 광장으로 가는 길
바츨라프 광장에서 하벨 시장으로 가는 길 

관광객인 나에게 프라하는 낭만적인 도시였다. 건물들이 고풍스러우면서도 알록달록했는데, 그 사이로 트램이 지나가는 거리의 풍경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누가 영화 세트장을 만들어놓은 것 같았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달라지는 풍경을 모두 카메라에 담고 싶어서 쉼 없이 셔터를 눌렀다. 

하벨 시장에서 장사 준비를 하고 있는 상인

길을 따라 걷다 보니 하벨 시장에 도착했다. 아직 영업시간 전이라 상인들이 장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것만 보다가 준비하는 과정을 보니 느낌이 색달랐다. 하벨 시장의 비하인드 신을 보는 것 같았다. 상인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이었는데 기념품, 과일, 채소 등을 꺼내서 하나씩 진열하고 있었다. 몇 분 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니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하는 일은 다르지만 다들 각자 자리에서 열심히 사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일이든 결과만 보고 판단하기 쉬운데, 그 결과를 내기 위해 필요한 노력을 간과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하벨 시장에서 구시가 광장으로 가는 길 

매시 정각에 구시청사 천문시계에서 열리는 쇼를 보기 위해 구시가 광장 쪽으로 걸어갔다. 좁은 돌길 끝에 하늘색 건물의 스타벅스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 앞에 천문시계가 우뚝 서 있었다. 무려 600년이 넘은 천문시계인데 세련되고 예뻐서 깜짝 놀랐다. 천문시계 주변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카메라를 들고 모여 있었다. 오전 8시가 되자 종이 울리면서 시계탑의 문이 열리고 12사도가 등장했다. 돌아가면서 잠깐씩 얼굴을 비치더니 다시 시계탑 문이 닫혔다. 그대로 쇼가 마무리되자 옆에 있던 관광객들이 "이게 다야?"라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나 또한 생각보다 쇼가 짧아서 조금은 실망했지만, 중세부터 지금까지 600년이라는 긴 역사를 품고 있는 천문시계를 직접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1410년에 최초 설치돼 600년이 넘게 프라하 구시가 광장을 지키고 있는 천문시계탑 

천문시계탑 쇼를 본 후 구시가 광장을 구경했다. 얇은 긴팔을 입고 있었는데 아침시간이라 그런지 살짝 추웠다. 겉옷을 가지러 다시 호텔을 가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렌즈 한 쪽이 빠져서 선택의 여지없이 호텔로 향했다. 방에 들어가서 새 렌즈를 끼고 바람막이를 챙긴 뒤 호텔 조식을 먹으러 갔다. 투숙객 후기 중 조식이 마음에 들었다는 글들이 많았는데 정말 만족스러웠다. 음식 종류가 많지는 않았지만 식빵, 소시지, 햄, 베이컨, 해시 브라운, 계란 등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져 있었고 맛도 좋았다. 카페같은 아늑한 분위기에서 따뜻하게 몸을 녹이며 즐겁게 식사를 했다.

소버린 호텔에서 맛있게 먹은 조식

다음 목적지는 스트라호프 수도원이었다. 트램을 타야 했는데 호텔에서 트램 정류장까지 거리가 멀지 않아서 소화도 시킬 겸 걸어갔다. 트램은 프라하의 거리를 더욱 멋스럽게 만들었다. 정류장에서 트램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니 유럽에 있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 트램 안에서 바라본 창문 밖의 프라하 풍경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경치를 넋 놓고 감상하다가 목적지에서 내렸다.  

프라하 거리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트램

스트라호프 수도원은 1140년에 건립됐으나 화재 때문에 많은 부분이 소실돼 17~18세기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수도원을 방문한 이유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으로 꼽히는 도서관을 보기 위해서였다. 도서관 내부에서 사진촬영을 하려면 별도의 요금을 지불해야 해서 입장료와 사진촬영비를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도서관은 크게 '철학의 방'과 '신학의 방'으로 구분되는데 '철학의 방'을 마주한 순간 장엄한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방의 규모가 큰 편은 아니었지만 영화 '해리포터'에 등장하는 도서관처럼 웅장한 느낌이 들었다. 천장에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이 묘사되어 있었고, 양 옆으로는 누가 봐도 정말 오래된 책들이 진열돼 있었다. 직원 한 명이 의자에 앉아 '철학의 방'을 지키고 있었는데 마치 역사 속 한 페이지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스트라호프 수도원 내 '철학의 방'

입이 떡 벌어진 채로 한참 구경하다가 '신학의 방'이 있는 곳으로 갔다. '철학의 방'에서 '신학의 방'으로 지나가는 길 양쪽에는 신학, 과학에 관한 고서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종이가 너덜너덜하고 누렇게 변색돼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신학의 방'은 이름처럼 신성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천장에는 성경 내용이 담긴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었고, 방 오른쪽에는 성 요한의 목각상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중앙에는 오래된 지구본이 놓여 있었다. '철학의 방'과 '신학의 방' 모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아쉬웠지만, 수백년의 역사가 새겨진 곳을 방문해 의미가 깊었다. 

스트라호프 수도원 내 '신학의 방'
스트라호프 수도원 근처에 있는 양조장

도서관을 다 둘러본 후 밖으로 나오니 양조장이 보였다. 맥주 맛집으로 유명한 데다 분위기도 좋아서 들어갈까 고민했지만, 대낮에 얼굴이 빨개진 상태로 돌아다니고 싶지 않아서 그냥 지나쳤다. 양조장을 끝으로 스트라호프 수도원을 나서자 프라하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가 나왔다. 지평선 너머로 주황색 지붕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시야를 방해하는 높은 건물이 없어서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여기서만큼은 얼굴이 나온 사진을 꼭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른 관광객들에게 사진촬영을 부탁했다.  

스트라호프 수도원에서 전망대로 내려가는 길

전망대에서 조금 내려가니 프라하 스냅사진 촬영장소로 유명한 뷰 포인트가 나왔다. 전망대와 달리 일반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 아니라 한적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프라하의 멋진 전망을 바라보니 근심 걱정이 다 없어지면서 힐링이 됐다. 벤치에 앉아 재충전의 시간을 보내다가 프라하의 풍경을 바라보는 내 모습을 담기 위해 삼각대를 세워놓고 다양한 포즈와 각도로 사진을 찍었다. 가끔씩 동네주민들이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면서 지나갔는데, 이렇게 동화같은 풍경 속에서 일상을 보내는 그들이 부러워졌다.

뷰 포인트에서 바라본 프라하의 풍경

절경에 취해 있다 보니 어느덧 1시간이 지나서 다음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프라하성에 가기 위해 내리막길을 따라 걸었는데 거리가 너무 예뻤다. 울퉁불퉁한 돌길, 알록달록한 건물, 클래식한 기차 등 중세의 느낌이 가득했다. 전망대 밑 언덕에서 프라하성까지 10분 남짓의 거리였는데 목적지에 가까워지는 게 아쉬울 만큼 마음에 쏙 드는 골목길이었다. 

뷰 포인트에서 프라하성으로 가는 길

기나긴 내리막길을 지나자 프라하성 스타벅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프라하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명소답게 관광객이 바글바글했다. 먼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주문한 뒤 테라스 자리에 앉아 경치를 즐겼다. 테라스에 있던 관광객 대부분이 한국인이라 여기저기서 반가운 한국말이 들렸다. 잠시 후 주문한 아메리카노가 나와서 커피잔과 함께 풍경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아침 일찍부터 걸어다녀서 조금 지쳤었는데, 가만히 앉아 커피를 마시며 붉은 지붕으로 뒤덮인 프라하 시내를 바라보니 힘이 다시 솟았다. 프라하는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동화 속 나라처럼 느껴졌다. 멋진 전망을 감상하다가 일기를 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 앞 테이블에 앉아있던 일본인 여성이 다가와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나처럼 혼자 여행을 와서 사진촬영을 해줄 사람이 없는 듯 했다. 나 또한 카메라를 건네면서 사진을 요청했고, 그렇게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은 후 작별 인사를 나눴다. 

전망이 멋졌던 프라하성 스타벅스
프라하성 티켓 구매 후 성 비투스 대성당을 배경으로 한 컷


스타벅스를 나와 언덕길을 올라가니 프라하성이 보였다. 프라하성은 9세기 말에 세워졌는데,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무려 900년이 걸렸다고 한다. 실제로 보니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답게 웅장하고 위엄이 있었다. 성 비투스 대성당을 비롯한 많은 건축물들이 가득 찰 만큼 규모도 컸다. 프라하성에 들어가려면 티켓을 사야했는데, 갈 수 있는 곳에 따라 A, B, C로 나뉘었다. 나는 성 비투스 대성당, 구 왕궁, 성 이르지 바실리카, 황금소로 등 4곳을 입장할 수 있는 티켓 B를 구매했다. 



드높은 천장의 성 비투스 대성당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돋보였던 성 비투스 대성당

먼저 방문한 곳은 프라하의 대표 건축물인 성 비투스 대성당이었다. 프라하성 중앙에 위치한 성 비투스 대성당은 14세기 카를 4세 때 착공돼 1929년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자 정교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눈에 띄었다. 사람의 손으로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고 예술가에 대한 경외감마저 들었다. 사람과 자연이 만든 합작품도 볼 수 있었다.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 사이로 햇빛이 비쳐지면서 형형색깔의 '빛의 예술'이 펼쳐졌는데 감탄이 절로 나왔다. 성당에는 성 바츨라프를 추모하는 예배당과 역대 체코 왕들의 석관묘도 있었다.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를 보고 들떴던 마음을 뒤로 한 채 경건한 자세로 나머지 관람을 마쳤다.   

분홍색 외관이 눈에 띄었던 성 이르지 바실리카
둥근 아치가 매력적인 성 이르지 바실리카 내부(왼쪽),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낡은 천장화

성 비투스 대성당 관람을 마무리하고 체코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라는 성 이르지 바실리카를 갔다. 성 이르지 바실리카는 920년에 세워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다. 성 바츨라프의 할머니인 루드밀라 성녀와 블라디슬라브 1세가 안치되어 있으며 돔 구조로 인해 소리 울림이 좋아 가끔씩 음악회장으로 쓰인다고 한다. 분홍색 건물이라 아기자기한 느낌이었는데, 귀여운 외관과 달리 내부는 조용하고 근엄한 분위기였다. 식빵을 닮은 창문과 아치형 구조 때문에 건물이 아늑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낡은 벽돌과 형태가 온전하지 않은 천장화는 세월의 무게를 실감케 했다. 교회 규모가 아담해서 관광객들을 따라 걸으니 금세 출구가 나왔다. 

프란츠 카프카가 집필 활동을 한 황금소로 22번지 작업실 앞에 모여있는 관광객들 

다음 목적지는 황금소로였다. 원래 병사들의 막사로 지어졌으나 16세기 후반 연금술사와 금은세공사들이 살면서 지금의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입장권을 기계에 찍고 들어가니 알록달록한 작은 건물들이 있는 거리가 나왔다. 층고가 낮은 건물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상점과 기념품점이었다. 중세 때 사용했던 갑옷과 투구, 무기를 전시한 전시장도 있었다. 유명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가 집필 활동을 했다는 22번지 작업실 앞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 있었다. 황금소로는 좁은 골목길 하나의 작은 거리였지만, 당시 삶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성 비투스 대성당을 배경으로 한 컷

황금소로까지 구경한 뒤 현재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되고 있는 구 왕궁을 보려고 했으나 관람 시간이 지나서 들어갈 수 없었다. 아쉬웠지만 다음에 또 프라하를 와야하는 이유가 생겼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프라하성에서 풍경 사진만 찍은 게 마음에 걸려서 삼각대를 놓고 성 비투스 대성당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남긴 뒤 성을 나왔다. 오후 6시 반이었는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프라하성을 보기 위해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카를교를 가려면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가야 해서 뒷길을 따라 쭉 내려갔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그림이었는데 특히 성 니콜라스 성당에서 카를교를 가는 길이 예뻤다. 해가 점점 지면서 조명이 켜지니 거리가 낭만적인 분위기로 바뀌었다.

 

프라하성에서 카를교로 가는 길

프라하의 대표 명소 카를교는 체코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1357년 카를 4세 때 만들어져 1402년에 완공됐으며 길이는 520m에 이른다. 카를교의 야경은 정말 장관이었다. 양 옆의 블타바강은 가로등 조명에 비쳐 주황 빛으로 넘실거렸고, 그 위로는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이 둥둥 떠다녔다. 뒤편의 프라하성은 가장 높은 곳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뚜껑 없는 박물관 속 하나의 예술 작품 같은 비경에 눈을 뗄 수 없었다. 다리 위의 성인 조각상들은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카를교를 지키고 있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많은 사람들이 카를교를 찾았는데, 함께 풍경을 바라보며 입을 맞추는 연인들이 눈에 띄었다. 로맨틱한 장소에서 알콩달콩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보니 부러우면서도 가슴 한편이 따뜻해졌다. 왜 많은 사람들이 프라하에 대한 로망을 품는지 납득이 갔다.  

카를교에서 바라본 블타바강
카를교에서 바라본 프라하성

카를교를 계속 걷다보니 다리가 너무 아팠다. 아침 일찍부터 이곳저곳 누비며 10km 가량을 걸어다녔으니 다리가 멀쩡할 리 없었다. 아침 10시에 조식을 먹은 후 식사를 안 한 상태라 배도 매우 고팠다. 그래서 사전에 알아봤던 카를교 부근의 맛집 우 트리 루지를 찾아갔다. 입구 쪽에 앉아 필스너 우르켈과 폭립을 주문했는데 맥주가 먼저 나왔다. 시원한 맥주를 쭉쭉 들이키니 타들어갔던 갈증이 말끔히 해소됐다. 뒤이어 폭립이 나왔는데 간이 짜지 않고 딱 맞아서 맛있게 먹었다. 거의 다 먹어갈 때쯤 낯익은 얼굴이 식당 문을 열고 들어왔다. 몇 시간 전 프라하성 스타벅스에서 사진을 부탁했던 일본인이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둘 다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친구는 자연스럽게 내 테이블에 앉았고, 나도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카를교 근처에 있는 맛집 우 트리 루지(왼쪽), 우 트리 루지에서 시킨 필스너 우르켈
필스너 우르켈과 함께 주문한 폭립

그녀의 이름은 쿠루미, 나이는 24살이었다. 쿠루미와 같이 맥주를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쿠루미는 여행 컨설턴트 일을 한 지 1년이 됐는데 바빠서 이제야 여름 휴가를 즐기는 중이라고 했다. 프라하에 오기 전 독일 뮌헨에서 옥토버페스트를 다녀온 이야기도 생생하게 들려줬다. 내게 가보라고 추천해줬는데 아쉽게도 이번 여행에선 일정상 독일을 가는 게 어려웠다. 다음에 유럽에 올 일이 생기면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쿠루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도 내 이야기를 꺼냈다. 스포츠가 좋아서 스포츠기자 일을 하다가 퇴사를 하고 여행을 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쿠루미는 기자를 실제로 만나는 게 처음이라면서 신기해했다. 요즘 일하는 게 너무 힘들다면서 퇴사한 나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역시 어느 나라든 퇴사는 직장인들의 꿈인가보다. 

쿠루미가 주문한 굴라쉬(왼쪽), 프라하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 쿠루미

쿠루미와 나 모두 완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건 아니었지만 대화가 잘 통해서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웠다. 소중한 인연을 만난 순간을 간직하고 싶어서 같이 사진도 찍고, 인스타그램 다이렉트 메시지로 사진을 공유했다. 그렇게 한참 수다를 떨다가 계산을 마치고 식당을 나왔다. 남은 여행을 잘 마무리하라며 서로의 안녕을 빌고 각자 다른 길을 나섰다. 혼자 여행을 할 때의 좋은 점은 이렇게 예기치도 못하게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나 내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쿠루미 덕분에 소중한 추억의 한 페이지가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호텔 가는 길에 마주한 틴 성모 교회의 야경

우 트리 루지에서 호텔까지 걸어갔는데, 이날 하루종일 걸은 데다 술까지 마셔서 정신이 몽롱했다. 눈이 살짝 풀어지는 게 스스로 느껴져서 일부러 더 뚜벅뚜벅 걸으려고 했다. 걷다 보니 천문시계탑이 있는 구시가 광장이 나왔다.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정면에 보이는 틴 성모 교회의 야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 자리에 멈춰 사진을 계속 찍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아 있는 첨탑이 빛에 반사돼 남색으로 빛났는데 중후한 멋이 풍겼다. 멋진 야경을 구경한 후 걸어서 호텔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너무 피곤했던 탓에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눕자마자 곧장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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