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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노 Oct 27. 2020

'붉은 지붕'이 좋은데 '푸른 지붕'도 좋아

여행 4일차: 체스키크룸로프의 '낮'과 잘츠부르크의 '밤'

2019.09.25 여행 4일차 체코 체스키크룸로프-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체스키크룸로프 숙소 크룸로브스카 포하드카

오전 6시쯤 눈이 떠졌는데 푹신한 침대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일어나서 씻고 외출할 준비를 마치니 오전 8시 30분이었다. 조식을 먹고 싶었지만 약 5시간 후 체스키크룸로프를 떠나야 해서 아침 식사를 건너뛰고 관광을 시작했다. 어젯밤에 다녀온 체스키크룸로프성을 재방문하기 전에 먼저 마을 주변을 산책했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한적한 거리를 배회하니 마음이 평온했다. 이 곳에 살면 아무런 근심 없이 하루하루를 보낼 것 같은 생각에 블타바강 위에 둥둥 떠 있는 청둥오리마저 부러워졌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온전한 나만의 시간을 즐긴 뒤 체스키크룸로프성으로 향했다.

체스키크룸로프 마을 풍경
체스키크룸로프 마을 풍경
마을에서 보이는 체스키크룸로프성

이발사의 다리를 지나 체스키크룸로프성에 도착했다. 성 안으로 들어가니 해자에 귀여운 아기곰 두 마리가 보였다. 한 마리는 자고 있었고, 다른 한 마리는 당근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너무 귀여워서 계속 지켜보다가 당근을 다 먹은 곰이 드러눕는 모습을 보고 발걸음을 뗐다. 망토다리로 올라가는 길에 난간 같은 곳이 있어 문을 활짝 열었더니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어젯밤 체스키크룸로프성에서 전경을 볼 땐 어둠이 내려앉아 차분한 분위기였는데, 오전에 보니 주황색 지붕들이 도드라져 발랄하고 톡톡 튀는 느낌이 들었다. '동화 마을'의 절경에 심취해 있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체스키크룸로프성 입구
체스키크룸로프성 해자에 있는 곰 두 마리
체스키크룸로프성 난간에서 바라본 풍경
체스키크룸로프성 난간에서 바라본 풍경
체스키크룸로프성 난간에서 바라본 풍경

망토다리를 건너자 구멍 뚫린 성벽이 있어서 조그마한 아치형의 구멍을 액자 삼아 체스키크룸로프 역사지구를 조망했다. 울긋불긋 물든 나뭇잎과 아기자기한 마을의 경관이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시켰다. "가을에 유럽을 가는 건 진짜 사기다"라며 부러워했던 친구의 음성이 귓가에 맴돌았다. 가만히 서서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다가 몰려드는 단체 관광객을 피해 자메츠카 정원으로 걸어갔다. 

체스키크룸로프성 망토다리
체스키크룸로프성에서 바라본 전경
체스키크룸로프성에서 바라본 전경
체스키크룸로프성에서 바라본 전경
체스키크룸로프성에서 바라본 전경
체스키크룸로프성에서 바라본 전경

자메츠카 정원은 17세기에 조성된 바로크 양식의 정원으로 체스키크룸로프성 안쪽에 위치해 있다. 당시에는 성주와 그 가족, 그리고 성주가 초대한 사람들만 출입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다. 망토다리에서 성벽을 따라 가파른 경사로를 올라가니 정원 입구가 보였다. 정원 안으로 들어서자 민트색 벤치가 눈에 들어왔다. 녹음이 우거진 공간 속에 있어서 그런지 민트색이 유독 돋보였다. 정원은 엄청난 면적에도 불구하고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각을 맞춰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는 화단은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정원 가운데 있는 커다란 분수와 조각상도 멋스러웠다. 한가롭게 정원을 거닐며 울창한 나무들과 형형색색의 꽃들을 만끽하니 마음이 고요해졌다. 

자메츠카 정원으로 가는 오르막길에서 본 풍경
자메츠카 정원으로 가는 길
자메츠카 정원 입구
 자메츠카 정원 내 민트색 벤치(왼쪽)
자메츠카 정원
자메츠카 정원
자메츠카 정원
자메츠카 정원

정원을 다 둘러본 후 그냥 가기 아쉬워서 체스키크룸로프성 전망대에 들렀다. 체스키크룸로프의 동화 같은 풍경은 몇 번을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떠나기 전에 인증샷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옆에 있던 외국인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그가 찍어준 사진이 마음에 들었지만 한 장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서 중국인에게 사진을 요청했다. 중국인은 흔쾌히 사진을 찍어주겠다면서 내 카메라를 가져갔다. 그때 갑자기 단체 관광객이 우르르 몰려와 사진 찍는 곳을 가로막았다. 이제 막 전망대에 도착한 단체 관광객들은 자리를 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진촬영을 포기해야 하나 싶었는데 중국인이 "잠깐 앉아있다가 사람들이 없어지면 사진을 찍자"고 말했다. 그리고 전망대가 한산해질 때까지 기다려줬다. 오랜 기다림 끝에 나온 결과물은 실망스러웠지만 호의를 베풀어 준 그에게 정말 고마웠다. 

자메츠카 정원에서 전망대로 내려가는 길
자메츠카 정원에서 전망대로 내려가는 길(왼쪽), 체스키크룸로프성 전망대
체스키크룸로프성 전망대에서 본 풍경
체스키크룸로프성 전망대에서 본 풍경

한 끼도 먹지 않은 채 오전 11시까지 돌아다녔더니 배가 무척 고팠다. 황급히 체스키크룸로프성을 빠져나와 에겐베르크 양조장을 찾아갔다. 에겐베르크 양조장은 1560년부터 지금까지 체스키크룸로프 현지 맥주를 생산하고 있는 곳이다. 레스토랑도 함께 운영 중인데, 유서가 깊은 곳답게 건물 외관과 내부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450년의 긴 역사를 자랑하는 소품들도 많았다. 이것저것 구경한 후 자리에 앉아 언필터 라거와 스비치코바를 주문했다. 맥주가 먼저 나왔는데 잔과 코스터가 예뻐서 눈길이 갔다. 단연 맛도 좋았다. 체코에서 마신 맥주 중 가장 신선하고 깔끔한 맛이었다. '역시 양조장에서 갓 나온 현지 맥주는 다르구나'라고 느꼈다. 한 잔을 더 시키고 싶었지만 대낮이라 자제하고 체코 전통 음식인 스비치코바를 먹었다. 스비치코바는 소고기 위에 라즈베리잼과 크림이 올려진 생소한 요리였다. 안 어울릴 것 같은 조합이라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체코식 찐빵과 고기를 곁들여 먹으니 의외로 맛있었다. 체스키크룸로프는 사람도 친절하고 풍경도 멋있고 음식도 맛있는 '사기 캐릭터' 같은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겐베르크 양조장 외관
에겐베르크 레스토랑 내부
에겐베르크 레스토랑 내부
에겐베르크 양조장에서 생산된 체스키크룸로프 현지 맥주
체코 전통 음식 스비치코바

식사를 마치고 호텔에서 짐을 찾은 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로 가는 CK셔틀을 타러 갔다. 탑승 장소는 호텔에서 걸어서 10분 소요되는 시내 극장 앞이었다. 가까운 거리였지만 캐리어를 끌고 울퉁불퉁한 돌길을 지나야해서 무척 멀게 느껴졌다. 힘이 부칠 때마다 잠깐 멈춰서서 체스키크룸로프의 예쁜 건물들을 보며 에너지를 충전했다. 스보르노스티 광장을 거쳐 탑승 장소에 도착하자 곧이어 검정색 승합차가 나타났다. 젊은 여성 기사님이 차에서 내리는 순간, 기사님이 중년의 남성일 거라고 섣불리 예단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한국에선 젊은 여성이 버스나 택시를 운전하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기 때문에 무의식 속에 '운전기사는 남성이다'라는 편견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도 성별, 나이, 학력에 얽매이지 않고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 

짐을 찾으러 호텔로 가는 길
스보르노스티 광장
스보르노스티 광장에 있는 레스토랑
입구가 예쁜 장난감 가게 Duhove paraple
흰색 건물 앞에 알록달록한 의자가 있어서 예뻤던 상점
체스키크룸로프 전경
잘츠부르크행 CK셔틀 탑승 장소

중국인 6명과 함께 CK셔틀을 탔는데 생각보다 내부가 넓어서 편했다. 기사님도 친절하고 시골길 풍경도 좋아서 잘츠부르크로 이동하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체스키크룸로프를 떠나야 해서 아쉬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출발한 지 3시간 만에 마주한 잘츠부르크의 첫인상은 '삭막하다'였다. 잘츠부르크 중앙역 앞에서 내렸는데, 아담한 중세 마을인 체스키크룸로프와 달리 현대 도시의 느낌이 강했다. 역사를 비롯한 큼지막한 건물들과 많은 차들이 눈에 띄었다. 역 근처에는 노숙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애초에 예상했던 잘츠부르크의 모습과 달라서 살짝 당황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인포메이션 센터를 방문했다. 인포메이션 센터를 찾은 이유는 잘츠부르크의 대중교통과 주요 관광지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잘츠부르크 카드를 구매하기 위해서였다. 잘츠부르크에 2박 3일 동안 머물 예정이라 48시간권을 구매한 뒤 숙소인 a&o 잘츠부르크 홉트반호프 호스텔로 향했다. 6인 도미토리를 예약했는데 혹시나 이상한 사람과 같이 방을 쓰게 될까봐 걱정이 앞섰다. 체크인 후 방에 들어가니 다행히 아무도 없어서 싱글 침대에 짐을 풀고 방을 나섰다.  

CK셔틀을 타고 3시간 만에 도착한 잘츠부르크 
a&o 잘츠부르크 홉트반호프 호스텔(왼쪽), 중앙역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구입한 잘츠부르크 카드

오스트리아 서부에 위치한 잘츠부르크는 소금 산지로 명성이 높지만, 관광객들에겐 '모차르트의 고향'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모차르트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들은 명소가 되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원래 이날 모차르트 생가를 방문하려 했으나 입장 마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모차르트의 단골 카페로 유명한 토마셀리를 갔다. 1700년에 문을 연 토마셀리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이다. 카페 외부는 화사한 분홍색 꽃에 묻혀 세월을 가늠할 수 없었으나 카페 내부는 300년의 역사가 느껴졌다. 앤틱한 인테리어에 전통 의상을 입은 직원까지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났다. 모차르트가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상상하니 공간이 더 멋스러워 보였다. 착석해서 메뉴판을 둘러본 뒤 '비엔나 커피'로 불리는 멜란지와 오스트리아 대표 디저트 자허토르테(살구잼 초콜릿 케이크)를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입가심을 위한 물 한 잔과 함께 멜란지가 나왔다. 커피 위에 크림이 잔뜩 올라가 있어서 식감이 부드럽고 맛있었다. 자허토르테는 진한 초콜릿에 달짝지근한 살구잼이 발라져 있어서 멜란지와 잘 어울렸다. 

모차르트 단골 카페 토마셀리 외관 
모차르트 단골 카페 토마셀리 내부
모차르트 단골 카페 토마셀리 내부
카페 토마셀리에서 주문한 멜란지(왼쪽)와 자허토르테

다 먹은 후 쇼핑몰, 레스토랑 등이 늘어선 게트라이데 거리를 걸었다. 구시가의 번화가라서 상점이 즐비했고 사람도 많았다. 전형적인 유럽의 느낌이 물씬 났는데, 상점마다 특색있는 철제 간판이 달려 있어서 더욱 예뻤다. '레드불의 고장'답게 레드불 관련 상품을 판매하는 매장도 있고, 한국 화장품을 판매하는 K-뷰티 매장도 있었다. 명품 브랜드샵부터 작은 기념품점까지 각양각색의 가게들을 구경하고 저녁 6시 30분쯤 묀히스베르크 전망대에 올라갔다. 전망대에서는 잘츠부르크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푸른 물이 흐르는 잘자흐강과 그 위를 가로지르는 마카르트 다리가 정면에 보였다. 잘자흐강을 기준으로 양쪽으로 나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에는 회색빛 지붕들이 낮게 펼쳐져 있었다. 다소 칙칙할 수 있는 회색빛 지붕에 민트색 지붕이 뒤섞여서 시크하고 모던한 분위기가 풍겼다. 아기자기했던 체코의 붉은 지붕과 다르게 세련된 멋이 뿜어져 나왔다. 묀히스베르크 언덕 위에 우뚝 솟은 호엔잘츠부르크성은 멀리서도 그 위엄이 느껴졌다. 시간이 흐르자 하늘이 점점 캄캄해지고 거리에 불빛들이 하나둘씩 켜졌다. 은은한 조명이 도시 곳곳과 건물들을 감싸자 아름다운 야경이 연출됐다. 1시간가량 머물며 경관을 실컷 감상한 후 전망대를 내려왔다.  

게트라이데 거리
레드불 월드(왼쪽)와 K-뷰티 매장
묀히스베르크 전망대에서 본 잘츠부르크 전경
묀히스베르크 전망대에서 본 잘츠부르크 전경
묀히스베르크 전망대에서 본 잘츠부르크 전경
묀히스베르크 전망대에서 본 잘츠부르크 전경
묀히스베르크 전망대에서 본 잘츠부르크 전경
묀히스베르크 전망대에서 본 잘츠부르크 전경
묀히스베르크 전망대에서 본 잘츠부르크 전경
묀히스베르크 전망대에서 본 잘츠부르크 전경

저녁을 먹기 위해 마카르트 다리를 건너 맛집 가블러 브라우로 이동했다. 아늑해 보이는 구석 자리에 앉아 현지 맥주인 밤맥주와 소꼬리찜을 주문했다. 먼저 나온 밤맥주는 영롱한 붉은빛을 띠었는데 청량하고 깔끔한 맛이었다. 소꼬리찜은 향이 살짝 있었지만 사이드 메뉴인 알감자와 같이 먹으니 간이 딱 맞았다. 전망대에서 레스토랑까지 올 때 배도 고프고 생각보다 많이 걸어야 해서 '그냥 가까운 식당 갈 걸'이라고 후회했는데 여기까지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친 후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했다. 

잘츠부르크 맛집 가블러 브라우 입구
잘츠부르크 맛집 가블러 브라우 내부
잘츠부르크 맛집 가블러 브라우 메뉴
가블러 브라우에서 주문한 밤맥주(왼쪽)와 소꼬리찜
가블러 브라우에서 주문한 음식들

맥주 한 잔만 마셨을 뿐인데 정신이 몽롱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대학생 때는 얼굴이 빨개져도 다음날 아침까지 밤새 술을 마셨는데 요즘은 부쩍 술이 약해졌다. 또 스무 살을 갓 넘겼을 때는 여행을 다니면서 많이 걸어 다녀도 멀쩡했는데, 지금은 허리부터 시작해서 다리와 발까지 모든 곳이 아팠다. 거의 10년이 흘렀기 때문에 신체에 변화가 생기는 건 당연한 현상이지만 실제로 체감하니 조금 슬펐다. 호스텔에 도착해 방문을 여니 남자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카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현지 중학교에서 단체로 수학여행을 온 듯했다. 내가 방에 들어가자 아이들은 각자 침대로 돌아가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다행히 내 옆 침대에는 아무도 없어서 호텔에 온 것처럼 편하게 누워 있다가 잠이 들었다. 

가블러 브라우 앞에 주차된 자전거
가블러 브라우 앞 잘츠부르크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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