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노 Nov 19. 2020

잘츠부르크에서 낯선 이들이 말을 걸었다

여행 5일차: 낯선 여행자와 대화에서 얻은 교훈

2019.09.26 여행 5일차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이번 여행 중 첫 호스텔 숙박이라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무 탈 없이 지나갔다. 아침에 일어나 외출 준비를 마치고 오전 9시쯤 호스텔을 나섰다. 어디서 끼니를 해결할까 고민하다가 근처에 있는 스타벅스를 방문했다. 한국 매장과 달리 와플, 팬케이크 등 다양한 베이커리가 진열돼 있었다. 그 중 가장 영롱한 빛깔을 뽐내는 라즈베리 치즈케이크와 펌킨라떼를 시키고 자리에 앉아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잘츠부르크 중앙역의 풍경을 감상했다. 역 주변에 택시가 정차되어 있었는데 BMW·벤츠 차량이 많은 게 눈에 띄었다. 테라스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곧이어 주문했던 라즈베리 치즈케이크와 펌킨라떼가 나왔다. 치즈케이크는 꾸덕꾸덕했는데 라즈베리잼이 얹어져서 달달한 맛이었다. 펌킨라떼는 계피 향이 조금 났지만 달지 않아서 라즈베리 치즈케이크와 잘 어울렸다.

잘츠부르크 중앙역 스타벅스에 진열된 다양한 베이커리
잘츠부르크 중앙역 스타벅스에서 먹은 라즈베리 치즈케이크와 펌킨라떼

스타벅스에서 간단하게 첫 끼를 때운 뒤 버스를 타고 미라벨 궁전에 갔다. 미라벨 궁전은 17세기 볼프 디트리히 대주교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지은 궁전으로, 18세기에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됐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주인공 마리아가 아이들과 뛰어놀며 '도레미 송'을 부른 곳으로도 유명하다. 입구에 들어서니 중앙 분수를 기준으로 좌우 대칭을 이룬 드넓은 정원이 보였다. 화려한 색의 꽃들이 기하학적인 문양을 그리며 만발해 무척 아름다웠다. 저멀리 우뚝 솟은 호엔잘츠부르크 성은 아기자기한 정원에 웅장함을 더해주었다. 

미라벨 궁전
미라벨 궁전
미라벨 궁전

정원을 구경한 후 모차르트가 어린 시절 연주를 선보였다는 마블 홀을 찾았다. 마블 홀은 중앙에 위치한 샹들리에와 건물 군데군데를 장식한 대리석 덕에 고풍스러운 느낌이 났다. 품위 있는 사람들만 입장할 수 있을 것 같은 장엄한 분위기였다. 모차르트가 연주자로서 발을 내딛기 시작한 역사적인 공간에 있으니 기분이 남달랐다. 저녁에 열리는 실내악 공연을 볼까 고민하다가 옷차림이 신경 쓰이기도 하고, 잘츠부르크에서 마지막 밤을 좀 더 역동적으로 즐기고 싶어서 다음을 기약했다.

미라벨 궁전 마블 홀
미라벨 궁전 마블 홀
미라벨 궁전 마블 홀
미라벨 궁전 마블 홀

마블 홀을 나와 페가수스 분수가 있는 정원으로 이동했다. 영화 속에 나온 계단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고 있는데 한국인 여성이 다가와 "찍어드릴까요?"라고 묻길래 "아 네, 감사합니다"라며 카메라를 건넸다. 어색한 포즈로 사진촬영을 마친 뒤 그녀 역시 혼자 온 것 같아 "저도 찍어드릴게요"라고 말했다. 도움을 주고 받은 후 헤어지려던 찰나에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같이 미라벨 궁전 돌아다니면서 사진 찍어주는 거 어때요?" 그렇게 나는 M과 동행을 시작했다.


M은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는 취업준비생이었다. 직장을 다니면 장기간 여행을 다니는 게 어려울 것 같아서 졸업하기 전에 혼자 동유럽 여행을 왔다고 했다. M과 이야기를 나눌수록 나와 공통점이 많다는 걸 느꼈다. 내가 "한국에선 어디 살아요?"라고 묻자 M은 "원래 지방이 고향인데 학교 때문에 목동에 살고 있어요"라고 답했다. 목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목동'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너무 반가웠다. 동시에 M이 어느 학교의 학생일지 대충 짐작이 갔다. 예상대로 M은 내가 졸업한 학교의 옆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게다가 전공도 국어교육과라 기자 출신인 나와 통하는 게 많았다. 내가 "스포츠기자였는데 퇴사하고 여행왔어요"라고 하자 M은 "저 지금 기자님이랑 같이 있는 거예요? 취준생이라 신기해요"라며 활짝 웃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를 싹싹하게 '언니'라고 부르면서 신나게 사진을 찍어주는 모습이 고맙고 예뻤다.

미라벨 궁전
미라벨 궁전

미라벨 궁전 구경을 마치고 모차르트 생가를 갈 예정이었는데 마침 M도 같은 곳을 간다고 해서 함께 이동했다. 사랑의 자물쇠가 가득 채워진 마카르트 다리를 지나 'Mozarts Geburtshaus(모차르트 생가)'라는 독일어가 적힌 노란색 건물을 찾아 들어갔다. 모차르트 생가는 모차르트가 태어나서 17세까지 살던 곳으로, 현재는 모차르트가 사용했던 바이올린, 피아노, 악보, 침대 등이 진열돼 있다. 음악에 조예가 깊지 않아서 엄청난 감흥은 없었지만, 전설적인 인물인 모차르트의 당시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특히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의 위치가 뒤바뀐 피아노는 왠지 모르게 빼빼로가 연상되면서 신기했다. 생가 출구 쪽에는 모차르트 초콜릿을 비롯한 각종 기념품을 판매하는 곳이 있었다. 미니 바이올린이 귀여워서 구매 욕구가 솟아올랐지만, 나중에 '왜 샀을까' 후회할 것 같아 기념품점을 그대로 빠져나왔다. 

사랑의 자물쇠가 가득한 마카르트 다리
마카르트 다리에서 본 잘츠부르크 풍경
모차르트 생가 외관
모차르트 생가에 진열된 건반 위치가 뒤바뀐 피아노
모차르트 생가 기념품점에서 판매하는 미니 바이올린

점심을 먹기 위해 M과 함께 버거리스타에 갔다. 버거리스타는 좌석마다 여섯 종류의 소스가 일렬로 배치돼 있었다. 버거 종류도 다양했는데, 나는 눈에 딱 들어오는 게 없어서 그냥 클래식 버거 세트를 주문했다. 버거 안에 내용물이 많지는 않았지만 패티가 두툼해서 배를 든든히 채울 수 있었다. 감자튀김은 넓적하고 두꺼웠는데, 신선한 생감자의 맛이 느껴졌다. '동유럽은 어딜 가도 감자 맛집이군'이라고 되뇌며 쟁반을 깨끗이 비웠다. 버거리스타 리뷰 중에 '이상한 사람들이 매장에 들어와서 시비를 걸었다'는 글이 종종 있었는데, 다행히 먹는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누군가와 같이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니 즐거웠다.

버거리스타 메뉴
다양한 소스가 제공되는 버거리스타
버거리스타 클래식 버거 세트

버거를 다 먹고 M과 묀히스베르크 전망대에 갔다. 어제와 똑같은 풍경이었지만, 하늘이 파랗고 맑아서 전날보다 더 예뻤다. M과 서로 사진을 찍어준 뒤 근처 숲길을 탐방하고 전망대에서 내려왔다. M은 다른 일정이 있어서 자리를 떠났고, 나는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남아 게트라이데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러다 우연히 정원 테라스가 있는 레스토랑 스턴 브라우를 발견했다.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좋아보여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손님들을 둘러보니 야외 테이블에서 맥주 한 잔씩 하고 있어서 나도 생맥주 한 잔을 시켰다. 평소 여행을 할 때는 '멀리 왔으니 많은 곳을 둘러보자'는 마음으로 바쁘게 돌아다니는데,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니 '여행하면서 이런 여유를 갖는 것도 좋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묀히스베르크 전망대에서 본 잘츠부르크 풍경
묀히스베르크 전망대에서 본 잘츠부르크 풍경
묀히스베르크 전망대에서 본 잘츠부르크 풍경
묀히스베르크 전망대에서 본 잘츠부르크 풍경
스턴 브라우 입구
스턴 브라우 야외 테이블
스턴 브라우에서 마신 맥주

재충전의 시간을 보낸 후 잘츠부르크 대성당으로 향했다. 대성당 앞 광장은 전형적인 관광지의 모습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과 거리 공연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기념품을 파는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흰색 말과 갈색 말이 끄는 마차도 쭉 늘어서 있었다. 잘츠부르크 대성당은 모차르트가 세례를 받은 성당이자 오르간 연주를 한 곳이다. 이 성당의 오르간은 6000여개의 파이프로 만들어져 유럽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입구에는 숫자 774, 1628, 1959가 달린 문 3개가 있는데 각각 성당이 창건된 연도,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된 연도, 제2차 세계대전 후 복구된 연도를 의미한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자 정교한 대리석 장식과 웅장한 오르간이 보였다. 모차르트가 세례를 받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대성당 내부를 둘러본 뒤 밖으로 나왔다.

잘츠부르크 대성당 앞 광장
잘츠부르크 대성당 입구
잘츠부르크 대성당
잘츠부르크 대성당
잘츠부르크 대성당
잘츠부르크 대성당
잘츠부르크 대성당
잘츠부르크 대성당

쾌청했던 하늘이 조금씩 흐려지더니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았다. 우산은 없었지만 그대로 일정을 마무리하긴 아쉬워서 푸니쿨라를 타고 호엔잘츠부르크 성채 올라갔다. 호엔잘츠부르크 성채는 독일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지어졌는데, 한 번도 함락되지 않아 유럽에서 가장 보존이 잘 된 성으로 꼽힌다. 성에 도착해 아래를 내려다보니 잘자흐강이 흐르는 시내뿐만 아니라 나무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까지 다 보였다. 잘츠부르크 특유의 회색빛 풍경과 초록빛 자연에 취해 있을 무렵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가 더 쏟아지기 전에 성 꼭대기에 있는 전망대를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호엔잘츠부르크 성채 푸니쿨라 타는곳
호엔잘츠부르크 성채에서 바라본 잘츠부르크 풍경
호엔잘츠부르크 성채에서 바라본 잘츠부르크 풍경
호엔잘츠부르크 성채에서 바라본 잘츠부르크 풍경
호엔잘츠부르크 성채에서 바라본 잘츠부르크 풍경

전망대를 가려면 좁은 계단을 빙글빙글 돌아서 올라가야 했다. 다리가 아프고 힘들었지만, 오스트리아 국기가 펄럭이는 전망대에 발을 디디자 고단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갑자기 비가 세차게 쏟아져 외투와 청바지가 홀딱 젖고 말았다. '이미 옷이 젖었으니 그냥 비를 맞자'는 생각으로 비에 맞서 전경을 감상했으나 고도가 높은 곳에서 비를 계속 맞고 있으니 추웠다. 몇 분간 버티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성 내부에 있는 박물관으로 대피했다. 박물관에는 성에서 사용하던 각종 무기와 시대별 군인들의 모습 등이 전시돼 있었다.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박물관 구경을 하고 있는데 미라벨 궁전에서 만났던 M에게 연락이 왔다. M은 "지금 호엔잘츠부르크 성채로 가고 있는데 언니가 있을 것 같아서 전화해봤어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재회해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못다한 이야기를 나눴다. 폭우 때문에 하늘이 뿌옇게 변해서 내가 봤던 멋진 풍경을 M에게 보여주지 못한 게 아쉬웠는데, M은 나름대로 운치있는 풍경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호엔잘츠부르크 성채 전망대에서 바라본 잘츠부르크 풍경
호엔잘츠부르크 성채 전망대에서 바라본 잘츠부르크 풍경
호엔잘츠부르크 성채 전망대에서 바라본 잘츠부르크 풍경
호엔잘츠부르크 성채 박물관에 진열된 대포(왼쪽)와 무기
호엔잘츠부르크 성채에서 바라본 잘츠부르크 풍경
카피텔 광장에 있는 조형물 sphaera와 호엔잘츠부르크 성채

M의 우산을 같이 쓰면서 돌아다니다가 푸니쿨라를 타고 광장으로 내려왔다. 비가 계속 내리자 M은 우산이 없는 나를 숙소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처음엔 미안한 마음에 "아냐 괜찮아"라며 거절했지만, M의 숙소와 내가 묵는 호스텔이 1분 거리라는 이야기를 듣고 "콜"을 외쳤다. 호스텔에 도착해 M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방으로 들어가니 배가 너무 고팠다. 짐을 내려놓고 바로 로비로 나와 근처 맛집을 검색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외국인이 다가와 "아까 모차르트 생가에서 너 봤어"라며 아는 척을 했다. 솔직히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민망해할 것 같아서 "아 그래? 반가워"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그가 "저녁 안 먹었으면 같이 먹을래?"라고 물었다. 혹시 이상한 사람일까봐 걱정이 됐지만, 한편으로는 '혼자 밥 먹으면 심심하니까 같이 먹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임라우어 호텔 레스토랑

그와 함께 임라우어 호텔 레스토랑에서 슈니첼과 맥주를 즐기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호주 사람인 A는 1만명이 넘는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여행 유튜버였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니 A는 "서울과 부산을 가봤다"면서 본인이 아는 한국어를 말했다. 기본 인사말인 '안녕하세요'부터 식당에서 직원을 부르는 '여기요'까지 꽤 많은 단어를 알고 있었다. 심지어 발음도 한국인처럼 정확했다. A는 "여행을 가면 그 나라의 문화를 체험하는 걸 좋아한다. 현지인들과 어울리다 보니 다양한 언어를 습득했다"고 설명했다. A와 대화를 할수록 배울 점이 많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부러웠던 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행력'이었다. 

임라우어 호텔 레스토랑에서 먹은 슈니첼
임라우어 호텔 레스토랑에서 먹은 슈니첼과 맥주

A는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가기 전에 '호텔 홍보 영상을 찍어줄테니 무료로 숙박하게 해달라'며 여러 호텔에 이메일을 보낸다고 했다. 실제로 최근 터키를 갈 때 촬영 기획안을 첨부해서 호텔 15곳에 이메일을 전송했는데, 한 곳에서 연락이 와 공짜로 2박 3일간 호텔에 머물렀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무모해 보여도 일단 시작하면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구나'라는 걸 느꼈다. 그는 또 몇 달 동안 디제잉을 배워서 클럽 DJ를 하고, 드럼을 배워서 공연도 한다고 했다. A를 보면서 '나도 하고 싶은 일을 머릿속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하나씩 실천해나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저녁을 다 먹은 후 호스텔 로비에 앉아 위스키가 섞인 콜라를 나눠 마시며 A와 대화를 이어갔다. A의 유튜브 영상도 같이 감상하다가 시간이 늦어져서 인스타그램 맞팔로우를 하고 헤어졌다. 오늘도 새로운 인연을 맺은 것에 감사함을 느끼며 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붉은 지붕'이 좋은데 '푸른 지붕'도 좋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