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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노 Dec 10. 2020

드디어 만났다, 살고 싶은 평온한 호숫가 마을

여행 6일차: 나만 알고 싶은 휴양지, 장크트길겐과 장크트볼프강

2019.09.27 여행 6일차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장크트길겐-장크트볼프강

잘츠부르크 중앙역 스타벅스

잘츠부르크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아침. 체크아웃 시간인 오전 10시에 맞춰 호스텔을 나왔다. 중앙역 물품보관소에 짐을 맡긴 후 브런치를 먹을 만한 식당이 있는지 살펴봤다.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해 근처 대형마트에 들어갔으나 별 소득 없이 모차르트 초콜릿만 잔뜩 구경했다. 30분 넘게 어슬렁거리다가 결국 전날에 이어 스타벅스의 문을 두드렸다. 당근 머핀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창 밖 풍경이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에 앉으니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간단하게 끼니를 때운 뒤 장크트길겐으로 가는 150번 버스를 탔다. 잘츠부르크 근방에는 장크트길겐, 장크트볼프강, 할슈타트 등 자연 경관이 빼어난 잘츠카머구트 마을이 있는데,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되는 곳 중 하나라 들뜬 마음으로 버스에 몸을 맡겼다. 회색 지붕이 가득한 잘츠부르크 시내를 벗어나자 하늘색 호수와 작은 주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위스를 연상케 하는 멋진 경치를 즐기다 보니 어느덧 장크트길겐에 도착했다. 

잘츠부르크에서 장크트길겐으로 가는 길 풍경
잘츠부르크에서 장크트길겐으로 가는 길 풍경
장크트길겐 마을의 놀이터(왼쪽)와 선착장
볼프강 호수
볼프강 호수
볼프강 호수
모차르트 어머니 생가(왼쪽)와 장크트길겐 공동묘지

장크트길겐 버스 정류장에서 마을 방향으로 내려가니 볼프강 호수와 놀이터가 보였다. 꽤 많은 관광객들이 벤치 혹은 계단에 앉아 요트가 호수 위에 둥둥 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한적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나는 우선 선착장 앞 매표소에 가서 이날 최종 목적지인 장크트볼프강으로 가는 배편을 알아봤다. 4시 30분에 출발하는 승선권을 구매한 뒤 직원에게 짐을 맡기고 본격적으로 장크트길겐 관광에 나섰다. 약 2시간 30분의 시간이 남았는데 모차르트 어머니의 생가와 성당 근처의 공동묘지를 둘러보고 나니 딱히 할 게 없었다. 넋 놓고 마을 풍경만 감상하기에는 시간이 아까워서 케이블카를 타고 츠뵐퍼호른 전망대를 가기로 결심했다. 마침 하늘도 맑아 전망대에서 마을 전경을 내려다보기 딱 좋은 날씨였다. 

츠뵐퍼호른 케이블카
츠뵐퍼호른 케이블카를 타고 바라본 풍경
츠뵐퍼호른 케이블카를 타고 바라본 풍경
츠뵐퍼호른 케이블카를 타고 바라본 풍경
츠뵐퍼호른 케이블카를 타고 바라본 풍경

1957년에 설치된 츠뵐퍼호른 케이블카는 60년이 넘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외관은 노란색과 빨간색 두 가지 색상이었는데, 철통처럼 생겨서 한눈에 봐도 상당히 낡았음을 알 수 있었다. 케이블카가 줄에 매달려 움직일 때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보다 연식이 훨씬 오래된 케이블카를 타고 해발 고도 1500m의 산을 올라가야 한다니 조금은 무서웠다. 혼자 타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한국인 가이드, 외국인 부부와 함께 케이블카에 탑승했다. 케이블카는 예상과 달리 흔들림이 적고 안정적이었다.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갈 때마다 달라지는 호숫가 마을의 풍경을 동영상으로 담고 있는데, 한국인 가이드가 "여기는 언제 와도 멋있어요"라며 장크트길겐과 츠뵐퍼호른에 대해 설명해줬다. 남들은 돈 내고 듣는 설명을 무료로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종착점에 도달해 가이드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츠뵐퍼호른 탐방을 시작했다. 

츠뵐퍼호른
츠뵐퍼호른
츠뵐퍼호른
츠뵐퍼호른
츠뵐퍼호른

케이블카에서 내리자 근처에 식당이 보였다. 배가 무척 고팠지만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멋진 뷰를 빨리 즐기고 싶어서 일단 지나쳤다. 왼편으로 꺾어 트레킹 코스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니 정면에는 에메랄드빛의 호수와 아기자기한 마을이, 뒤편으로는 푸른 잎이 우거진 나무와 산봉우리가 보였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절경이었다. 관광객이 별로 없어서 흔들 의자를 독차지한 채 평온하게 청정 자연을 즐겼다.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전경을 감상하니 눈과 마음이 정화됐다. '여기선 인증샷을 꼭 남겨야겠다' 싶어 삼각대를 놓고 높이와 각도를 조절하며 사진을 마구 찍었다. 

츠뵐퍼호른
츠뵐퍼호른
츠뵐퍼호른
츠뵐퍼호른
츠뵐퍼호른
츠뵐퍼호른 케이블카 탑승장
츠뵐퍼호른 케이블카에서 본 풍경
츠뵐퍼호른 케이블카에서 본 풍경

사진촬영을 하다가 시간이 많이 지나서 산 정상으로 부랴부랴 올라갔다. 불과 몇 미터 차이인데 정상에서 보는 풍경은 또 달랐다. 웅장한 자연을 바라보니 세상이 넓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나의 근심 걱정 따위는 자연의 위대함에 비해 작고 부질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경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일상에 찌들었던 마음이 치유가 됐다. 시간이 빠듯한 걸 알면서도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고, 결국 유람선 탑승 시간 30분 전이 되어서야 케이블카를 타러 갔다. 탑승장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화장실을 들렀는데 남자 화장실 앞에 한국어로 '신사'가 적혀 있었다. 얼마나 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이 곳을 방문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다시 케이블카를 타려고 줄을 섰는데 대기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10분을 넘게 기다린 후 내 차례가 와서 케이블카에 탑승했다. 산 아래로 내려갈수록 아기자기한 마을 풍경이 점점 더 또렷이 보였다. 장크트길겐에 사는 사람들은 본인들이 이렇게 멋진 곳에 산다는 걸 알까? 여행객의 시각에선 언젠가 꼭 살고 싶은 예쁘고 고요한 호숫가 마을인데, 현지인에겐 어쩌면 당연하고 평범한 일상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장크트길겐 선착장 매표소
볼프강 호수
볼프강 호수
장크트길겐 마을 풍경
장크트길겐 식당 피셔 비르트
장크트길겐 식당 피셔 비르트
피셔 비르트에서 주문한 슈니첼과 맥주
장크트길겐 식당 피셔 비르트

케이블카에서 내려 시계를 보니 유람선 탑승 시간이 이미 지나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선착장까지 뛰어갔지만 배는 떠나고 없었다. 좌절하며 선착장 앞 매표소에 들어가니 직원이 "안 그래도 너를 찾고 있었어"라고 말했다. 알고 보니 그 직원은 내 짐을 보관하고 있어서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집에 가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6시에 막배 있으니까 놓치지 말고 꼭 타"라며 표까지 다시 끊어줬다. 직원이 없었으면 짐도 못 찾고 장크트길겐에 새로 숙소를 찾아야 하는 아찔한 상황이 발생할 뻔했다. '내 알 바 아냐'라며 그냥 퇴근하지 않고 자신의 일처럼 신경써 준 그가 너무 고마웠다. '이럴거면 애초에 저녁 6시 배를 예약해 츠뵐퍼호른 전망대에서 컵라면도 먹고 좀 더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걸'하는 아쉬움도 남았다. 


1시간 정도 시간이 있어서 못다한 마을 구경을 한 후 선착장 근처에 있는 식당 피셔 비르트에 갔다. 잘츠부르크 슈니첼과 현지 맥주를 시켰는데, 볼프강 호수를 바라보며 한적하게 식사를 하니 세상 모든 걸 얻은 기분이었다. 지금 느끼는 분위기를 사진으로나마 간직하고 싶어서 식당 테이블에 삼각대를 놓고 셀카를 찍기 시작했다. 그러자 식당 직원이 "내가 찍어줄게"하며 카메라를 가져가 셔터를 눌렀다. 친절한 직원과 맛있는 음식 덕분에 기분 좋게 배를 채우고, 탑승 시간에 맞춰 장크트볼프강으로 가는 유람선을 탔다. 

장크트길겐에서 장크트볼프강으로 가는 유람선
유람선에서 본 풍경
유람선에서 본 풍경

가장 늦은 시간에 출발하는 유람선이라 탑승객이 많지 않아서 원하는 자리에 앉아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점차 멀어지는 장크트길겐에 안녕을 고하려 하는데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외국인이 "혼자 왔어?"라며 말을 걸었다. 그래서 나는 "응, 동유럽에서 혼자 한 달간 여행할 예정이야"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난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왔는데 7월부터 세계여행을 하고 있어. 얼마 전에 아이슬란드에 다녀왔는데 정말 좋더라. 곧 그리스에 가서 남편을 만날 거야"라고 말했다. 몇 개월 동안 세계여행을 다닐 만큼 마음의 여유가 있는 그녀가 부러웠다. 


내가 한 달 퇴사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갔다 와서 뭐 할건데?", "너무 오래 쉬면 이직할 때 힘들어"였다. 남들보다 뒤처지면 안 된다고 강조하는 초경쟁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질문과 조언들이었다. 하지만 외고 입시, 대학 입시, 그리고 취업까지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숨차게 달려온 나에게 잠시 '쉼'이라는 선물을 주고 싶었다. 가족의 눈치를 보거나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나만 생각하고 싶었다. 그래서 계획한 게 한 달 여행이었고 나름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녀를 보면서 나는 여전히 사회적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느꼈다. 획일화된 환경에서 일생을 살았으니 저 깊은 곳에 자리한 무의식이 쉽게 바뀔 리 없었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한 것 같아 어딘지 모르게 씁쓸했다. 그녀와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배가 장크트볼프강에 다다랐다.  

장크트볼프강
장크트볼프강
장크트볼프강 숙소 제하우스 파밀리 라이퍼
장크트볼프강 숙소 내부
장크트볼프강 숙소 방에서 본 풍경(왼쪽), 숙소 로비에서 본 풍경
장크트볼프강 숙소 앞 마당에서 본 풍경
장크트볼프강 유람선
장크트볼프강
장크트볼프강
장크트볼프강

장크트볼프강은 숲과 호수로 둘러싸인 작고 평온한 마을인데, 장크트길겐보다 유동 인구가 적어서 프라이빗한 휴양지에 온 것 같은 기분을 선사했다. 숙소인 제하우스 파밀리 라이퍼도 마음에 쏙 들었다. 앞에는 호수, 뒤에는 산이 있어서 전망이 좋았고 방도 생각보다 넓었다. 부엌 때문에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했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숙소 선택이 탁월했다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방에 짐을 풀고 산책에 나섰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하늘이 어두워졌다. 마을 구경을 더 하고 싶었지만 인적이 드문 밤길을 걷는 게 겁이 나서 숙소로 향했다. 선착장에서 숙소까지 가는 길에 가로등이 없어 휴대폰 손전등과 차량 불빛에 의존해 걸었다. 치안이 좋은 곳이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숙소에 무사히 도착한 후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숙소 자판기에서 과자를 사서 방에 들어갔다. 과자와 함께 잘츠부르크에서 구입한 모차르트 초콜릿을 먹으며 일기를 쓰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잘츠부르크에서 산 모차르트 초콜릿(왼쪽), 장크트볼프강 숙소에서 하루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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