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노 Dec 18. 2020

'칙칙폭폭' 기차가 지상낙원으로 올라갑니다

여행 7일차: 장크트볼프강, 천혜의 자연과 BTS 노래가 나를 울렸다

2019.09.28 여행 7일차 오스트리아 장크트볼프강

장크트볼프강 숙소에서 본 풍경
장크트볼프강 숙소에서 본 풍경
장크트볼프강 숙소에서 본 풍경
장크트볼프강 숙소에서 본 풍경

아침 8시에 일어나 창문을 보니 일기 예보대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산봉우리에 운무가 자욱한 풍경은 비몽사몽 상태인 나를 확 깨웠다. 창문을 열고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운치 있는 풍경을 바라보니 '이렇게 공기도 맑고 전망도 좋은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수십 번 들었다. 부엌에 있는 창문과 침대 옆에 있는 창문을 왔다갔다하며 사진을 찍은 후 가만히 앉아 창 밖을 응시했다. 이 세상에 오로지 나와 자연만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면서 마음이 안정됐다. 평소 여행할 때는 많은 곳을 둘러보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데, 이날은 비가 오기도 하고 숙소에 있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돼서 여유 있게 아침을 보냈다. 전날 밤 먹다 남은 과자를 입에 넣으며 쉬다가 오전 11시쯤 방 문을 나섰다.  

장크트볼프강 숙소 로비에서 본 풍경
장크트볼프강 숙소 마당에서 본 풍경
장크트볼프강 숙소 마당에서 본 풍경
장크트볼프강 숙소 마당에서 본 풍경
샤프베르크 산악열차 타는곳
샤프베르크 산악열차 타는곳
장크트볼프강 선착장
장크트볼프강 선착장
장크트볼프강 선착장
장크트볼프강 선착장

숙소 계단을 내려오다가 로비가 잘 꾸며진 것 같아서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의 좁고 길다란 창문들 사이로 호수와 산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이 연출됐다. 잠시 전경을 감상하다가 투숙객만 이용할 수 있는 숙소 앞 마당으로 갔다. 잔잔한 호수 위로 배가 지나가는데 고독하면서도 평온해 보였다. 가까이서 자연을 만끽한 후 샤프베르크 산악열차 탑승장을 방문했다. 비는 거의 그쳤지만 산은 여전히 안개로 뒤덮여 있어서 열차를 탈지 말지 고민이 됐다. 장크트길겐에서 츠뵐퍼호른 전망대를 갔기 때문에 산을 또 올라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샤프베르크 산악열차의 실물을 본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빨간색 증기 기관차가 너무 예쁘고 풍경과 잘 어울려서 꼭 타야겠다고 결심했다. 시간이 흐르면 안개가 걷힐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안고 낮 1시 30분에 출발하는 표를 예약했다. 

장크트볼프강 마을
장크트볼프강 마을
장크트볼프강 맛집 Kaffeewerkstatt
Kaffeewerkstatt 앞에 주차된 올드카
장크트볼프강 맛집 Kaffeewerkstatt
장크트볼프강 맛집 Kaffeewerkstatt 메뉴(왼쪽), 아이스 카푸치노
장크트볼프강 거리를 지나가는 올드카 두 대
장크트볼프강 맛집 Kaffeewerkstatt에서 먹은 카이저 슈마렌
장크트볼프강 맛집 Kaffeewerkstatt에서 바라본 풍경

산악열차를 탈 때까지 남은 시간에는 장크트볼프강 마을을 구경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좁은 길 양 옆으로 상점이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대부분 오래된 건물인 데다 색깔도 다양해서 중세 동화 마을에 온 것 같았다. 마을 구경도 잠시, 배가 너무 고파서 두리번거리며 식당을 찾다가 Kaffeewerkstatt를 발견했다. 붉은색 외관이 눈에 띄어서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다녀간 사람들의 평가가 좋았다. 오스트리아식 팬케이크인 카이저 슈마렌을 먹었다는 후기가 많았는데, 맛있어 보여서 주저하지 않고 식당으로 입장했다. 


식당 외관은 작은 성처럼 생겨서 중후한 분위기였는데 내부 인테리어는 아기자기했다. 어디에 앉을까 고민하다가 비 온 뒤의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마을 풍경을 즐기고 싶어서 야외에 자리를 잡았다. 메뉴판을 자세히 살펴본 후 아이스 카푸치노와 카이저 슈마렌을 주문했다. 먼저 나온 커피를 들이켜고 거리 전경을 보는데, 멋진 올드카 두 대가 지나가면서 유럽 감성을 물씬 풍겼다. 고전 영화에 나올 법한 올드카가 거리를 누비는 모습을 눈 앞에서 보니 신기했다. 잠시 후 컷팅된 팬케이크에 과일과 잼이 곁들여진 카이저 슈마렌이 나왔다. 슈가파우더가 뿌려져 있었는데 너무 달지 않고 맛있었다. 계란이 많이 들어간 카스테라를 꼬불꼬불하게 만들어서 잘라먹는 느낌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황제의 디저트'로 불리는 전통 음식을 먹으니 현지인과 동화된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밖을 쳐다보니 하늘은 언제 비가 왔냐는 듯 파랗게 변해 있었다. 

장크트볼프강 마을 풍경
장크트볼프강 풍경
샤프베르크 산악열차 타는 곳
샤프베르크 산악열차 내부
샤프베르크 산악열차에서 본 풍경
샤프베르크 산악열차에서 본 풍경
샤프베르크 산악열차에서 본 풍경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하고 탑승 시간에 맞춰 샤프베르크 산악열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날씨가 점차 맑아져서 오후 시간 표를 예약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프베르크 산악열차는 1893년부터 운행된 증기 기관차로, 무려 12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1700m가 넘는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데 옛날 기차의 소리가 정겹고 좋았다. 기차에서 보는 경치도 예술이었다. 알프스의 초원과 작은 마을, 그리고 청록색의 호수까지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내 앞에서 엄마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덤덤하게 앉아 있던 아이도 어느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 카메라를 들이대며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멋진 풍경을 눈에 담다 보니 30분이 훌쩍 지나 기차가 종착역에서 멈췄다. 

샤프베르크 정상 
샤프베르크 정상
샤프베르크 정상
샤프베르크 정상
샤프베르크 정상
샤프베르크 정상
샤프베르크 정상
샤프베르크 정상
샤프베르크 정상

열차에서 내렸는데 고도가 높은 곳이라 그런지 바람이 엄청 불고 추웠다. 하지만 에메랄드 호수와 알프스 산맥이 어우러진 장관을 최대한 즐기고 싶어서 굴하지 않고 탐방을 시작했다. 우선, 기차를 타고 고산지대에 오른 색다른 경험을 간직하기 위해 산 정상에 정착해 있는 열차 사진을 찍었다. 120년의 세월을 품은 붉은색의 기차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도 돋보였다. 기차 구경 후 산책로를 따라 전망대로 올라갔다. 위로 올라갈수록 시야가 트이면서 호수가 더 넓게 보였다. 마을과 가까운 호수 가장자리는 상아색과 하늘색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색깔이 고왔다. 가운데 호수는 보면서도 믿기 힘들 정도로 예쁜 에메랄드빛이었다. 같은 자리에서 각도만 조금 바꿔도 풍경이 달라져서 1초 간격으로 셔터를 계속 눌렀다. 탄성을 내지르며 절경을 감상하다 인증샷을 남기고 싶어서 옆에 있던 외국인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다 찍고 카메라를 건네받는데 그가 "어디서 왔어?"라고 물었다. 나는 "한국에서 왔어. 혼자 여행 중이야"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나는 독일에서 왔어. 친구들이랑 오전 10시에 트레킹을 시작했는데 5시간 만에 정상에 도달했어"라고 말했다. 이 높은 곳을 등산해서 오다니! 무모해 보이는 일에 도전할 용기가 있는 것도, 그리고 그 일을 해낸 것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마음만 먹고 노력하면 세상에 불가능이란 없나 보다.   

샤프베르크스피츠 호텔 식당 입구
샤프베르크스피츠 호텔 식당 내부
샤프베르크스피츠 호텔 식당 내부

시간이 지날수록 바람이 더 세차게 불어서 급히 샤프베르크스피츠 호텔 식당으로 대피했다. 식당 입구에는 현지 맥주인 스티글을 광고하는 간판과 산악열차 탑승 시간을 알리는 화면이 있었다. 한적했던 바깥과 달리 식당 내부는 손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리가 없어서 10분 정도 기다리다가 직원의 안내를 받고 착석했다. 스티글 맥주를 시킨 후 주변을 둘러보니 한 소년이 전통 의상을 입고 서빙을 하고 있었다. 멜빵바지 차림으로 열심히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나르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기특했다. 맥주를 마시면서 밀린 일기를 쓰다가 오후 4시쯤 밖으로 나섰다. 

샤프베르크스피츠 호텔에서 열차 탑승장으로 내려가는 길
샤프베르크 정상
샤프베르크 정상
샤프베르크 정상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산악열차
샤프베르크 산악철도의 끝
샤프베르크 산악철도
샤프베르크 산악열차에서 본 풍경
샤프베르크 산악열차에서 본 풍경
샤프베르크 산악열차에서 본 풍경
샤프베르크 산악열차에서 내려 출구로 빠져나가는 관광객들

아까보다 구름이 많이 껴 있었지만 시선이 닿는 곳마다 여전히 아름다웠다. 영롱한 옥색빛의 호수가 드넓게 펼쳐져 있고 수많은 산맥들이 호수를 품고 있는 풍경은 천혜의 자연이 빚어낸 하나의 예술 작품 같았다. 청정 지역에 있으니 속이 뻥 뚫리면서 모든 걱정이 날아갔다. '여기가 지상낙원이구나'하며 말없이 절경을 감상하는데 때마침 이어폰에서 BTS의 'Euphoria'가 흘러나왔다. 가사와 멜로디가 몽환적이라 내가 서 있는 이 곳이 더욱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자연이 주는 감동에 노래의 분위기가 더해져 가슴이 벅차올랐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왔다. 탁 트인 풍광을 보며 감정의 여운을 충분히 느낀 뒤 5시에 출발하는 마지막 열차에 탑승했다. 기차가 산에서 마을로 내려갈수록 호수는 눈높이에 맞춰 점점 가까워졌다. 고지대에서 보는 것과 또 다른 수려한 경관에 좀처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장크트볼프강 선착장
장크트볼프강 마을
장크트볼프강 마을
장크트볼프강 건물의 그림 간판
장크트볼프강 마을
장크트볼프강 마을
장크트볼프강 호숫가
장크트볼프강 호숫가
장크트볼프강 호숫가
장크트볼프강 호숫가
장크트볼프강 마을
장크트볼프강 마을
장크트볼프강 마을
장크트볼프강 마을
장크트볼프강 마을

열차에서 내려 선착장 앞 호수를 구경하다가 마을 쪽으로 다시 걸어갔다. 거리가 깔끔하고 건물들이 알록달록해서 마치 테마파크에 온 것 같았다. 건물 창가마다 놓인 화분과 그림 간판은 아기자기한 마을에 고풍스러운 멋을 입혔다. 어둠이 깊어지면서 조명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하자 건물들이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 고요한 밤의 정취를 느끼면서 골목골목 예쁜 마을을 누비다 호숫가를 발견했다. 의자에 누워 한참 동안 호수를 바라보니 잘츠카머구트 지역을 다니는 유람선과 작은 보트가 여러 번 오갔다. 보트에서 낚시를 하며 호수 위를 둥둥 떠다니는 현지인은 내 선망의 대상이었다. 저렇게 기분이 내킬 때마다 호수 위를 떠돌아다니면서 광활한 자연을 보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힘든 일도 다 잊힐 것만 같았다. 물가에서는 커다란 백조가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아이들과 놀고 있었는데, 자연을 벗삼아 놀 수 있는 환경이 부러웠다. 좀 더 머물고 싶었지만 저녁을 먹기 위해 의자에서 몸을 뗐다. 

장크트볼프강 식당 도르프 알름
장크트볼프강 식당 도르프 알름
장크트볼프강 식당 도르프 알름
장크트볼프강 식당 도르프 알름
장크트볼프강 식당 도르프 알름에서 시킨 레몬 맥주와 굴라쉬
장크트볼프강 식당 도르프 알름에서 시킨 레몬 맥주와 굴라쉬
장크트볼프강 식당 도르프 알름
장크트볼프강 식당 도르프 알름

사전에 알아본 식당이 만석이라 반대편에 위치한 식당 도르프 알름으로 이동했다. 도르프 알름은 숲 속의 별장을 떠오르게 하는 외관이 인상적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인테리어 소재 대부분이 나무라 진짜 산장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두운 실내를 밝히는 촛불은 맹렬한 추위를 가르며 높은 산을 정복하고 온 등산객들에게 수고했다고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아늑하고 포근한 공간에 있으니 하루의 긴 여정 끝에 몰려온 피로가 사르르 풀렸다. 전통 의상을 입고 있는 직원들도 식당 분위기에 맞게 친절했다. 스티글 레몬 맥주와 굴라쉬를 시켜 먹었는데, 맥주는 레몬 맛이 과하지 않고 깔끔해서 무척 맛있었다. 한 잔을 더 시키고 싶었지만 머리가 어지러울 것 같아서 참았다. 굴라쉬는 갈비찜과 비슷했는데 고기가 연해서 만족스러웠다. 장크트볼프강에서의 마지막 밤을 느긋하게 즐긴 뒤 숙소로 복귀했다. 자연을 좋아해서 시골살이의 로망이 있던 나에게 장크트볼프강은 그동안 꿈꿔왔던 이상적인 마을이었다. 앞으로 남은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이 곳에만 쭉 있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에 몇 년 후 재방문하는 것으로 스스로와 타협했다. 아쉬움을 삼키며 다음날 계획을 짜다가 잠이 들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드디어 만났다, 살고 싶은 평온한 호숫가 마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