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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노 Aug 14. 2020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행복하지 않아

스포츠기자,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생애 첫 직장을 얻은 사회초년생인지라 사무실이라는 공간, 직장상사와 관계 등 모든 게 낯설었다. 포털사이트에 내가 작성한 기사가 나오는 게 신기해 캡처한 후 부모님께 자랑을 하기도 했다. 처음의 설렘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입사 후 6개월 동안 디지털뉴스부 수습기자로 일하면서 평소 내가 싫어했던 '어뷰징'(abusing) 기사를 써야 했다. '어뷰징'이란 조회수(PV, Page View)를 끌어올리기 위해 실시간 검색어를 활용한 기사를 만드는 것이다. 조회수는 곧 광고 수익과 연결되기 때문에 수많은 매체들이 어뷰징을 한다. 신입 기자가 들어오면 기사 작성 방법을 알려준다는 명목으로 어뷰징을 시키기도 하고, 따로 알바를 고용하기도 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언론사도 결국 돈을 벌어야 운영이 되는 회사라는 것을.


입사 후 6개월이 지나고 '수습기자' 딱지를 뗐다. 회사에서는 원하는 부서로 보내주겠다고 했으나 스포츠부 정원은 이미 꽉 차 있었다. 결국 디지털뉴스부에서 계속 일하다가 경제부로 발령을 받았다. 생소한 분야라 막막했지만 하나 둘 배워가는 재미가 있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경제부에서 일을 배우고 있을 때 스포츠부의 한 선배가 퇴사를 했다. 그리고 그 선배의 빈 자리를 내가 채우게 됐다. 디지털뉴스부 시절 함께 일했던 스포츠 부장이 나를 추천해 준 덕분에 스포츠기자로 첫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꿈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나의 첫 스포츠 취재는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국가대표선수단 결단식이었다. 회사 선배와 함께 결단식이 열리는 SK올림픽핸드볼경기장을 가는데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체육계 관계자들만 참석하는 현장에 나도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 믿기지 않았다. TV에서만 보던 스포츠 스타들을 만날 생각에 설렜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어떤 내용을 취재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 막막하고 걱정이 됐다. 현장에 도착해 '초보 기자' 티를 내며 쭈뼛쭈뼛 하다가 다행히 대학교 때 친분이 있던 농구선수 A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A의 도움을 받아 다른 선수도 인터뷰했고,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기사를 작성했다.


이후 매일 아침 기사 아이템 2개를 내고, 마감 시간인 오후 4시까지 기사를 완성하는 일상이 반복됐다. 담당 종목은 농구와 골프였지만 다른 종목도 커버했다. 낮에는 마감 시간이 빠듯해서 주로 전화 취재를 했다. 구단 사무국장, 연맹 홍보팀장, 감독, 선수, 해설위원 등 다양한 사람들과 통화하면서 나름대로 심층적인 기사를 쓰려고 노력했다. 미디어데이나 기자회견 같은 행사가 있을 때에는 현장을 찾았고, 중요한 경기가 있는 날에는 경기장에 가서 상보를 쓰고 감독 및 선수를 인터뷰했다.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스포츠를 보면서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꼈다.

2년 가까이 일할 때쯤 슬럼프가 찾아왔다. 그동안 기자 생활을 계속 했던 이유는 성취감 때문이었다. 글을 쓸 때 '창작의 고통'을 느꼈지만, 그 과정을 이겨내고 결과물을 낼 때 짜릿했다. 신문과 인터넷에 내 이름이 달린 기사가 나온 걸 보면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취재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알아낼 때, 각 종목에서 내로라하는 분들을 인터뷰할 때에도 정말 뿌듯했다. '골키퍼 레전드' 김병지 전 선수와 축구 이야기를 하고, '만수' 유재학 현대모비스 감독과 농구 이야기를 하는 상상 속 장면이 현실에서 이뤄졌다. 꿈꿨던 일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이 기특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스트레스가 성취감을 넘어섰다. 그토록 좋아하던 스포츠가 이젠 매일 처리해야 하는 일의 개념으로 다가왔다. 손흥민이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하면 기쁜 것보다 '기사로 챙겨야 할 경기가 많아지겠구나', '외신 반응 많이 써야겠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최근 손흥민이 좋은 모습을 보이는 이유를 다각도로 분석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팠다. 스포츠를 오롯이 즐길 수 없게 되자 삶의 즐거움이 사라졌다.


일과 삶의 경계가 없는 것도 힘들었다. 기사를 다 작성해도 다음날 발제할 아이템을 찾느라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이슈가 있으면 '이런 기사를 써봐야겠다'하면서 아이디어가 샘솟았지만, 별다른 사안이 없을 때에는 머리를 쥐어싸맸다. 조울증에 걸린 것처럼 하루가 만족스러우면 다음 하루가 괴로웠다. 또 저녁에 중요한 사건이 터지면 근무 시간이 아니어도 기사를 써야 했는데, 늘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왠지 모를 불안감에 시달렸다. 살기 위해 일을 하는 건데, 일을 하기 위해 사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글을 쓰는 게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꼼꼼한 성격 탓에 기사 하나를 완성하는 데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맞춤법은 물론이고 내가 쓴 문장이 기사에서 흔히 쓰는 표현인지 일일이 확인했다. 더욱 완벽한 기사를 만들고 싶은 욕심에 글을 썼다 지우는 작업도 무한정 반복했다. 그럴수록 스스로를 갉아먹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정신과 상담을 고민할 정도로 심신이 지쳐갔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좋아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어서 퇴사를 망설였지만, 결정적으로 회사에 비전이 없다는 판단이 들어 사직서를 제출했다.


퇴사 소식을 알리니 편집국장, 스포츠부장을 비롯한 몇몇 분들이 아쉬움을 표했다. 그러면서 여태껏 나에 대해 느꼈던 점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꼼꼼하다', '책임감이 강하다', '성실하다' 등 좋은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동안 기사를 잘 쓰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누군가를 의식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묵묵히 일했을 뿐이다. 그런데 같은 일을 하는 선배들이 내 노력을 알아봐주고 인정해주니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앞으로도 어떤 일을 하든 열심히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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