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인턴이 다시 학교로 돌아왔을 때, 손에 무기가 생긴 기분이었다. 어딜 지원해도 쉽게 붙었고 남들은 어렵다는 '일'이 왜 이렇게 즐겁고 욕심나는지, 어쩌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시간을 기꺼이 팔았다. 굵직한 회사들에서 인턴으로, 계약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정규직까지 닿으면 될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적어도 나에게 성공담을 늘어놓던 선배들은 그랬으니까. 학교보다 회사가 더 나의 자리 같았고, 얼른 뿌리를 내리고 싶었다.
첫 회사는 막 자라나는 기업이었다. 성장, 발전, 끈기 그리고 일에 미쳐있는 사람들을 모은다는 일념 하에 전문가 집단을 표방하는 곳이었다. 새벽 4시까지 일하고 그 아침 9시에 출근하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함께 일할 동료를 수면실에 들어가서 찾아 나오기도 하고, 운동할 시간이 없어서 업무 중 짬을 내 다녀와 다시 자리에 앉곤 했다. 입사 첫날, 나에게 기대하는 부분이라고 건네받았던 A4용지 빼곡한 리스트를 하나하나 지워가며 맞는 사람이 되고자 했다. 거친 피드백들이 시퍼렇게 흔적을 남겼지만 그마저도 앞으로 나아가는 거라는 조언과 함께 꼼꼼히 수용하려 했다. 그렇게 처음 제대로 일을 배웠다. 자기의 맡은 바 소임을 다하지 않으면 간식창고 컵라면 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곳에서 열심히 갈아가며. 이 시기의 나는 엄마보다 사수 얼굴을 더 많이 봤다. 퇴근하는 택시에서는 울더라도, 회사에서는 꼿꼿하려 했다.
그러다 결국 탈이 났다. 너무 빠른 곳에서, 아무도 멈춰주지 않는 곳에서, 마음이 조급한 초년생은 뛰어다니다 하얗게 새 버렸다. 당시 조직에서 가장 높은 점수로 수습을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회사를 옮겼다. 두 번째 회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바스락거리는 몸과 마음이 조금씩 날리는 모습으로.
이직한 회사는 복학 후 아르바이트로 있던 곳이었는데, 같은 팀에서 계약직 매니저의 자리가 났다며 제안을 받았다. 더 큰 회사였고, 늦은 퇴근이어도 하루를 넘기는 일은 잘 없었으며, 지금보다 많은 업무를 경험할 수 있었기에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앞으로도 내 뒤를 밟아 경력 기간 내내 함께할 '사람'이라는 장애물을 처음 만났다.
나이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다른 성별의 사수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아슬한 선을 지키며 친해지는 과정이 필요했고, 조금은 거친 방식들을 수용해야 했으며, 공기 중에 언제나 함께하는 '장난스러운' 멸시에도 익숙해져야 했다. 그 와중에 일을 제대로 해낼수록 나에게 할당되는 양은 점점 늘어났다. 더 많이, 더 빠르게, 그리고 실수 없이 해내야 했다. 일로도 바빠 죽겠는데 사수는 더 도움이 안 됐다. 사근사근하게 굴면 일을 빼줬고 공적으로 대하면 일을 배로 얹어줬다. 전자처럼 굴면 공과 사를 넘어선 말과 행동들이 시작됐고 주변에서는 '오~'같은 하등 쓰잘데 없는 감탄사를 얹고는 했다. 당연히 당시 애인과도 문제가 생겼다. 왜 거절을 못하는지, 왜 주변에 알리지 못하는지 따지고 들던 그는 어린 여자 계약직과 장기근속 남자 사수의 위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공과 사를 넘은 건 그 사람인데, 내 공과 사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일을 그저 잘하고 싶었는데 쉽게 되지 않았다. '열심히'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사회의 생리를 몰랐다. 낮은 비용으로 최대한 많은 일을 시켜 효율을 내야 하는 기업에게 계약직 1명은 톱니로도 보이지 않을 만큼 작다. 그 톱니가 녹이 슬고 마모가 되는지, 제대로 맞물리고 있는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나조차도 그랬다. 자리를 잡으면, 내가 제대로 일을 하면, 열심히 하고 잘 보이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즈음 귀에서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반복될 거라는 걸 그때 깨달았으면 더 버텼을까? 언젠가는 일이 문제였고, 또 다른 때에는 사람이 문제였다면, 앞으로는 뭐가 문제일지 생각했어야 했다. 아니, 어쩌면 문제는 계속 바뀌는데 나만 그 자리에 멈춰 있는 건 아니었을까 고민을 해야 했지만 그런 사치를 부릴 시간은 없었다. 수많은 구설, 멀리서 들려오는 삐- 소리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다. 나의 조급함과 불안함은 그렇게 추진력이 되었고, 기꺼이 있는 힘껏 도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