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고구마

by 이안나

예전에 본 짧은 만화가 있는데, 인삼 밭에 심어져 있는 고구마는 주변만 보고 본인이 인삼인 줄 안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나중엔 본인이 고구마인 걸 알게 되지만, 고구마는 본인이 인삼인 줄 알고 지낸 기간 동안 아주 행복해 보였다. 나도 마찬가지다. 좋은 곳에서 멋진 사람들 사이에 있다 보니 나도 그런 곳에 속한 그런 사람인 줄 알고 있던 거다. 현실은 꽤 차갑고 나는 꽤 아무 의미 없는데 말이다. 시간은 흘렀고 결국 나는 제자리로 동그마니 돌아왔다. 그러면 안 됐는데, 나는 일로 내 일상을 지탱해 왔다. 집과 회사의 반복이 당연했고 모든 고민과 자신감도 일에서 나왔다. 이제 막 알 것 같은데 뚝 끊겨버리니 허무하기도 했다. 큰 기둥이 없어지니 조급함이, 쓸모에 대한 고민이, 자기 동정이 들이닥쳤다. 고로 진창의 시작이었다.


상황이 주체가 되고, 그 상황에게 끊임없이 피해 입는 기분을 느끼는 것이 자기 동정이다.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고, 그 후회가 또 자라서 지금 내가 피해자임을 주지 시킨다. 하지만 세상을 원망해 봤자, 상황을 탓해봤자 변하는 게 하나도 없다. 그 상황 안에서 잘 해내고 성과를 만들어낸 건 받은 월급의 대가지 상황을 변화시켜 줄 동아줄이 아니었는데 그걸 몰랐다. "성장했군요. 그것 또한 기쁜 일이네요." 정도인 거다.

하지만 2년이 마무리된 날부터 나는 세상에서 제일 운 없는 사람 같이 느껴졌다. 만화 속 고구마는 본인이 고구마인 걸 알아도 그저 행복해하는데 나는 고구마인 게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내가 나여서, 언제나 뭔가 잘못 선택하고 어렵게 만드는 사람이라서 불행한가 싶었다. 이 불운이 내 능력 부족에 의한 게 아니길 바라며 다음 행선지를 찾았다. 정해진 계약기간이 있는 건 알고 있던 사실이었으니 그렇게 슬퍼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조금 시간을 두고 봤어도 됐을 텐데 뭐가 그렇게 급했을까 싶다. 그땐 일을 안 하면 죽을 것 같았다.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외부요인도 분명히 있었다. 주변에서 가장 먼저 일을 시작한 편이었고 그만큼 먼저 자리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쯤 되니 나보다 천천히 출발해서 이미 자리를 잡은 친구들이 있었다. 각자의 속도가 있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견뎌낼 수 없었다. 또, 같은 계약직으로 시작해서 전환이 된 사람들을 보며 왜 나는 저렇게 되지 못할까 부러움도 있었다.


그렇게 다급한 마음으로, 어영부영 찾아들어간 회사들이 무려 4개다. 2년간 4개의 회사를 돌아다닌 거다. 정규직이니까, 아는 사람이 있으니까, 회사가 나쁘지 않으니까 등의 이유로 쉼 없이 자리를 옯겼다. 정규직이라면 그 안에서 내가 해낼 것들을 찾으려 혈안이었고 계약직이라면 전환되리라는 희망을 놓지 못했다. 어느 회사를 가도 좋은 평가를 들어서, 역량을 증명해 보라는 말에 더 욕심이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은 재직 기간과 잦은 퇴사에는 각자의 이유가 있었다. 세상은 버텨야 했다고 말하고 나도 어느 정도 그렇게 생각한다. 완벽한 회사가 어디 있으며, 모두가 조금은 버티며 산다는 말에도 일정 부분 동의한다. 이력서는 결과로 말하고, 나 같아도 이런 누더기 같은 경력은 유의 깊게 보지 않을 테니까. 내가 버티는 역치가 낮다는 말도, 자기 동정과 자의식과잉에 휩싸여 잘못된 선택을 여러 번 했던 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력서 속 글씨 뒤에는 못다 설명한 내가 있다. 숨 못 쉬고 네댓 번은 쓰러진 내가 있고, 약 봉투를 움켜쥐고 숨죽여 울던 내가 있다. 한쪽 귀가 거의 들리지 않던 나도 있고, 먹지도 잠들지도 못하던 나도 거기에 있다. 나만 아는 내가 그 텅 비어버린 경력들 사이사이 적혀있다. 설명하지 않은 내가 모여 누더기가 되었다.


몇 번의 실수를 기어코 반복하고서야, 쏟아지는 장대비 아래에 서서야 비로소 멈출 용기가 생겼다. 이걸 용기라고 해도 괜찮을까? 더 이상 달릴 힘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멈췄다. 짐작했던 병명을 들을 용기가 아니라, 듣지 않으면 안 되는 몸 상태가 됐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나를 마주할 용기가 아닌, 마주하지 않으면 정말 무너질 것 같은 절박함이 생겼다. 내 인생 주인공은 내가 맞지만, 세계의 관점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이제는 알기에 잠깐 트랙에서 내려왔다. 그렇게 불행한 고구마 하나가 덩그러니 앉아서 뒤돌아보기 시작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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