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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아누 Jan 27. 2023

이별과 죽음에 관한 두 가지 우주선 이야기


영원한 이별과 죽음의 차이는 무엇일까? 최근에 읽었던 두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과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공통적으로 나온 재밌는 예시가 있어서 가져왔다. 


*****


우선 첫 번째 이야기다. 

여러분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태양계를 탐험하기 위해 광속 우주선에 탑승하게 되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지구를 떠나 있을 것이다. 적어도 100년이 지나야 지구를 귀환할 것이다 (상대성 이론 덕분에 친구는 열 살 정도밖에 나이를 먹지 않을 테지만, 여러분은 이미 죽어 있을 것이다). 또한 우주선과의 통신이 이륙 후 20분 만에 완전히 두절돼 귀환할 때까지 어떤 대화도 주고받을 수가 없다. 친구와의 교류는 전혀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실상 가장 아끼는 친구를 잃어버리게 된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두 번째 이야기다. 

우주선이 이륙한지 20분만에 끔찍한 폭발 사고가 일어나고, 친구를 포함한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




분명, 첫 번째 이야기보다는 두 번째 이야기가 더 끔찍한 사건인듯하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일까? 첫 번째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이미 친구와 영원한 작별인사를 나눴기에 친구와의 이별이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이는 두 번째 이야기에서도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부분이기에, 분명 우리가 두 번째 이야기가 더 슬프게 느껴지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셸리 케이건 교수는 두 번째 이야기가 더 슬픈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꽤 많은 양의 지문을 할애하는데, 답을 찾기 위한 셸리 교수의 방식이 논리적임에는 이견이 없으나 사실 나는 그 결과가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셸리 교수에 따르면 두 번째 이야기가 더 슬픈 이유는 죽음이 이별보다 나쁘기 때문이며, 정확히는 죽음이 사랑하는 사람의 삶의 모든 축복을 앗아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분명, 셸리 교수가 비존재가 나쁜 이유를 추론하는 방식이나 "기회비용"이라는 죽음이라는 주제에서는 다소 참신한 개념을 활용하여 죽음의 나쁜 점을 앞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느낄 수 있었던 삶의 축복과 연결 짓는 점은 새로웠다 (자세한 추론 방식에 관심 있으신 분은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읽기를 추천한다, 어려운 내용이고 필자도 100% 이해되지는 않아서 여기에서 굳이 더 설명하진 않겠다). 하지만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두 번째 이야기가 더 슬프게 느껴지는 이유가 정말 내가 사랑하는 친구가 앞으로 받을 수 있는 삶의 축복들을 박탈당해서 때문일까? 



여기서부터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나는 사랑하는 친구가 남은 인생동안 삶의 축복이 있을 것이라고 단정 짓는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군다나 머나먼 우주로 홀로 떠나는 친구인데, 앞으로의 인생이 얼마나 외롭고 고단할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친구가 우주로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외딴 행성에 불시착하게 되었다면 친구는 별다른 탐험도 하지 못한 채 외롭게 죽어갈 것이다. 만약 앞으로의 여생에 고통만 가득하다면 죽음이 축복을 앗아갔기에 나쁘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내 생각에는, 두 번째 이야기가 더 나쁜 이유는 죽음이 빼앗아간 것이 친구가 느낄 수 있었던 삶의 축복이 아니라 축복이 될 수 있었던 "가능성"을 앗아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삶이 소중한 이유는 삶 자체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기대와 희망이 존재하는 그 상태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친구도 운이 안 좋으면 사고로 죽거나,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 채 외로이 다른 행성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작별인사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태양계를 탐험하기 위한 설렘과 열정이 가득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최악의 불확실성조차 이겨낼 수 있는게 바로 기대와 희망, 이것이 곧 "살아있음" 이 가진 가장 큰 가치이자 친구가 박탈당한 가장 큰 가치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죽음이 왜 나쁜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하지만 "죽음이 왜 나쁜가"를 고민하다보면 결국에는 "왜 삶이 소중한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사실 지금까지 삶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던 사람들에게 삶이 소중하다고 말하는건 어찌보면 주제 넘을 수 있는 말이다. 그럼에도 삶이 버려질 수 없는 이유는 언젠가 꽃을 피울 수 있는 가능성때문이 아닐까. 사랑하는 친구를 머나먼 태양계로 보낼 수 있었던 이유도 애초에 그 사람의 가능성을 응원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유추해보며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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