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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샤 Jan 11. 2019

내가 가진 모든 것

청각장애인 세상의 편견을 뚫고 전 세계를 여행하다 

점심때가 되면 내 발길은 자연스레 돌핀 레스토랑으로 향한다. 시끄러운 중심가를 지나 조용한 골목길에 들어선다. 큰 나무 그늘 아래 한적한 여유로움이 묻어있는 기분 좋은 나의 아지트. 망설임 없이 냇가 쪽을 향해 앉는다. 이곳에 앉으면 타는 듯한 더위도, 지저분한 잡념도 흘러가는 물소리와 함께 사라진다. 


"헤이 아샤." 

"헬로 마헨드라! 좋아 보이네."

"신나는 일이 있긴 하지, 오늘도 같은 걸로 주면 될까? "

"응, 꿀 생강차로 진하게 부탁해"


라다크에 온 뒤로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무얼 봐야 한다든지, 해야 한다든지, 누굴 만나야 한다든지 하는 계획 없이 그저 자연스럽게 하루가 흘러간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마주하는 눈 덮인 히말라야 산맥, 큼지막한 창으로 들어오는 기분 좋은 햇살, 파란 하늘, 새하얀 구름들이 오순도순 사이좋게 떠다니는 모습 등. '레'에선 이런 청명하고 기분 좋은 하늘을 매일 볼 수 있다. 비만 내리는 우기도 찡그리는 검은 구름도 이곳에선 존재하지 않는 단어가 되어 버린다. '하늘이 정말 예뻐' 이런 말을 매일 같이 할 수 있는 곳. 자연의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내게 되는 곳. 나는 지금 인도 레에 있다.      

"아샤님, 주문한 음식이 나왔습니다." 

"하하 그 말투 뭐야?"

"나 요즘 하루하루가 신나. 아주 재미있는 친구를 만났거든."  

"누군데?"

마헨드라가 친구라고 말을 하면 십중팔구 새로운 여행자의 등장을 의미한다.

"그는 정말 특별한 친구야. 태어나서 이렇게 감동적인 사람은 처음이야!"

그렇게 운을 띄우고 특별한 친구의 이야기를 하는 마헨드라는 얘기하는 내내 기쁨과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마헨드라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다. 


"그는 말이야, 실크처럼 부드러운 긴 머리 결을 가졌어, 어찌나 찰랑거리는지 누구라도 만지고 싶게 하는 매력을 지녔지. 그의 눈은 두 가지 색으로 이루어져 있어. 파란색과 갈색. 24살 때부터 세계일주 중인데 길 위에 선지 벌써 4년째라고 해. 아시아를 지나 인도에서 육로로 중동, 유럽까지 간다고 하더라고. 그는 작은 체구를 가졌지만 강인함이 느껴지는 사람이고 얼굴에는 자비와 기쁨이 넘쳐,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 봐!" 


갓 결혼한 마헨드라를 이렇게 흔들어 놓는 남자라니,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듯 새로운 여행자의 이야기를 계속하는 그에게 내가 물었다. 

"근데 눈 색깔은 왜 틀려? 렌즈 낀 거야?"

“신기하지? 나도 궁금해서 똑같이 그에게 질문했어. 그랬더니 그가 두 손으로 하늘을 가리킨 후 자신의 눈에 갖다 대는 거야. 꼭 '하늘이 제게 두 눈을 선물로 주었지요'라고 말하려는 듯이 말이야”

마헨드라가 신나서 말을 잇는다. 

"세상 사람들은 그 걸 오드아이(이색 홍채 Heterochromia iridium)라고 부르지."


"들어보기만 했는데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구나. 근데 어느 나라 사람이야?"

"일본 사람." 

"이름이 뭐야?"

"그의 이름은 노리야. 그는 언어의 천재야. 20개 언어를 알아." 

“에? 뭐라고? 20개 언어?”

“응, 정확히 말하자면 수화 말이야. 새로운 나라를 갈 때마다 그곳의 수화를 배운대. 각 나라마다 다른 언어가 있듯이 수화도 나라마다 다 틀리대.”

“그 남자 왜 수화를 배워?”

“응, 그가 청각장애인이기 때문이야.”

“에? 그런데 4년째 세계 일주를 하고 있다고? 그럼 둘이 어떻게 대화한 거야?"

"하하 그는 영어를 상당히 잘하거든, 매일 4시간씩 전자사전으로 영어를 공부한대. 그는 심지어 스페인어도 할 줄 알아. 우리는 주로 펜을 이용해 대화를 해. 그 친구와 대화를 시작하면 식당 냅킨이 남아나질 않는다니까."

"이럴 수가. 멋지다 그 사람. 나도 만나보고 싶어!" 

"그는 어제 판공초로 떠났어. 이틀 뒤에 다시 온댔으니까 아샤도 그날 아침에 와. 그는 항상 우리 가게에 아침을 먹으러 오거든" 


마헨드라와 이야기하느라 주문한 계란 카레가 식은 줄도 몰랐다. 하지만 대화를 끝낸 뒤, 그가 왜 그리 신났는지 알 것 같았다. 나도 그를 만나볼 생각에 벌써부터 설레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이틀 뒤 아침.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 잔뜩 부푼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돌핀 식당으로 갔다. 정말 그가 있을까, 뭐부터 물어보지.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골목길에 들어서니 식당이 눈에 들어오고 평화로운 아침 햇살 아래 머리 긴 남자애가 홀로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책상 위에 놓인 전자사전을 힐끗힐끗 보며 뭔가를 적고 있다. 난 그의 앞에 서서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날 쳐다보는 그의 동그란 눈. 정말 양쪽 눈의 색깔이 틀리다. 신기하다. 내가 앉아도 되냐는 제스처를 하자 그가 끄덕거렸다. 난 냅킨을 한 장 꺼내 내 소개를 적기 시작했다. 


- 안녕. 난 아샤라고 해. 한국에서 왔어. 네가 노리지? 마헨드라한테 이야기 들었어. 만나서 반가워

노리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냅킨에 답변을 달았다. 

- 만나서 반가워. 여행 중이니?


우리는 아침 식사를 같이 하면서 여행 이야기를 나눴다. 영어를 유창하게 쓰는 그는 전자사전으로 매일 영어와 스페인어를 공부한다고 했다. 기차나 버스로 이동할 때도 틈틈이 한다고 한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우리는 수다를 떨었다. 

냅킨들이 다 떨어지고 두 번째 리필을 해가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 다음엔 인도 어디로 가?

내가 물었다.

- 8월 중순쯤 파키스탄으로 갈 거 같아.

- 그래? 나도 그때쯤 파키스탄으로 갈 거 같아. 

- 하하 잘하면 파키스탄에서 볼 수도 있겠구나. 파키스탄 어디를 여행할진 다 짰어?

- 아직은 잘 모르겠어. 공부를 해봐야겠지?

- 그렇다면 훈자는 꼭 잊지 마.. 파키스탄 히말라야에 위치해 있는데 지상낙원을 그대로 옮겨놓은 곳이라며 소문이 자자하더라고.

- 오호! 그렇다면 꼭 가봐야지.

내 신나는 반응에 노리가 방긋 웃는다. 


- 아샤, 오늘은 뭐 할 거야?”

- 난 스피뚝을 보러 가려해.

- 나도 가려고 했던 곳인데 그럼 같이 가지 않을래?

- 나야 동행이 있으면 좋지!


우리는 1시간 뒤 버스정류장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버스정류장에 등장한 긴 생머리의 노리 군은 호리호리하고 작은 본인 몸에는 좀 무거워 보이는 큰 렌즈의 DSLR을 들고 등장했다. 내가 카메라가 크다는 제스처를 하자 옆구리 가방에서 작은 디지털카메라를 꺼내 보이며 씩 웃는다. 큰 카메라는 사진용이고 작은 건 동영상 촬영용이란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11세기에 지어진 스피뚝 불교사원으로 향했다. 버스는 휑한 도로가에 우리를 내려주고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레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스피뚝 사원은 통째로 조각한 바위 꼭대기 위에 사원을 얹어 둔 것 같다. 라다크 사원들은 모두 돌산 정상에 있어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휘청거린다. 안 그래도 해발 3500m가 넘는 마을에 사원들은 왜 이리 높이 지어놓았는지…. 사원으로 등산을 다니는 게 불만인 나와 달리 빈약해 보이는 노리는 무거운 카메라를 목에 건 채 잽싸게 계단을 올라간다. 난 계단을 몇 개 오를 때마다 한 번씩 숨을 고르며 천천히 올라갔다. 계속 숨이 차는 게 고산 때문인지 아니면 눈앞에 병풍처럼 펼쳐진 웅장한 전망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이 가슴 뻥 뚫리게 멋진 곳임은 분명하다. 천천히 꼭대기에 올라서니 사원을 둘러싼 인더스 강과 히말라야 산맥이 한눈에 들어오는 360도 전망이 눈앞에 눈부시게 펼쳐졌다. 말을 잃게 한다. 아니 말이 필요 없는 건지도.


 촬영에 푹 빠져 있는 노리가 보인다. 그는 DSLR 카메라로 셔터를 쉴 새 없이 누르다가 이번엔 디지털카메라를 꺼내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천천히 움직이며 전체 전망을 담고는 이내 한 손을 길게 뻗어 본인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수화로 누군가에게 이 멋진 장소를 설명하는 듯이 말이다. 그것도 아주 길게. 그의 얼굴은 환희로 가득 찼다. 그의 손동작 하나하나에 기쁨이 실려 있었다. 이 아름다운 순간을 눈으로 표정으로 수화로 온몸으로 표현하는 그의 모습은 우릴 비추는 태양만큼이나 반짝반짝거렸다.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듯한 이 곳에서 그는 특유의 작은 글씨체로 또박또박 메모를 적어 내게 건넸다. 


- 운명이란 우리 손으로 만드는 거야. 우리가 운명의 대한 통제력을 잃게 되면, 결국 운명에 지배당하게 되는 거야. 
- 내가 원하는 건 청각장애인들의 자유야. 그들은 몰라. 본인들이 자신의 삶을 한정하고 틀 안에 가두는 가해자라는 걸. 난 그들이 자유롭게 집 밖으로, 도시 밖으로, 나라 밖으로, 세상 밖으로 나오길 간절히 원해. 난 이 여행을 통해 내가 얼마나 멋진 세상에 살고 있는지 매일같이 느끼고 있어. 비록 소리 없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아름다운 이 세계를 볼 수 있게 두 눈을 주신 신께 감사해.


노리는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장애인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세계일주를 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이 걷는 이 길이 청각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길 바란다는 노리. 그는 오늘도 자신의 두 눈에 세상의 감동적인 순간들을 담아 일본의 청각 장애인들에게 수화로 생생하게 전달한다. 


그의 뒤를 따르며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해 감사함을 느꼈다. 듣고, 보고, 먹고, 걷고, 생각할 수 있는 이 기본적인 자유들. 이 중 한 가지 자유라도 누리지 못한다면 얼마나 슬플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기에 소중해 하기는커녕 눈이 왜 이렇게 작아, 코가 왜 이렇게 낮아라며 불평불만만 늘어놓던 나였다. 소리가 없는 세상. 하지만 두 눈을 주신 신에게 매일 감사해하는 노리에게서 난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의 소중함을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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