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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주 Mar 03. 2021

백팩을 채울 때, 무거운 짐을 맨 위에 올리는 이유

#2 당신은 낯선 이에게 얼마나 무거운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까?


[들어가기에 앞서, 이 글은 2020년 초 퇴사 직후 여행을 회상하며 쓴 글이다. 그 때 적었더라면 더 좋았을테지만 원래 사람일은 곱씹을수록 우러나는 법이니까. 게다가 코로나로 발이 묶인 지금, 여행을 떠올리는 일은 하나의 현실 도피가 되어버렸다. 어쩌면 1년이 넘게 지나버린 여행을 떠올리기에 지금이 적기가 아닐까? 싶어 다시 그 때를 떠올린다.]


 "몇 년 전에 엄마가 돌아가셨어. 우울할 때 친구를 따라 절을 다니게 되었어. 덕분에 이제는 괜찮아졌고, 그래서 부처님의 흔적을 따라 여행하고 있어."

 안나는 속에 있던 무거운 이야기를 실타래 풀어내듯 내게 꺼내놓았다. 적당한 위로의 말을 찾지는 못했지만, 나도 안나를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있던 곳은 롯파이 야시장 야경 명소인 방콕의 한 쇼핑몰 주차장. 색색으로 물든 야시장 천막을 내려다보며 주변 사람들에게 쉽게 꺼내놓기 어려웠다는 가족사를 내게 이야기해준 안나는 나와 만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은 타인이었다.


 '그놈'과의 만남은 내가 완전한 홀로 여행을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호스텔 같은 방 사람들과 말을 트는 원인이 되었다. 여행 이틀째 되는 날, '그놈'의 체크 아웃을 확인하려다가 같은 방을 사용하는 중국인 아주머니와 대화를 텄다. 아침이라 정신없이 인사만 나누고 숙소에 돌아왔는데, 저녁이 되니까 방 전체와 친해진 중국인 아주머니 덕분에 내 또래 친구들과 안면을 틀 수 있었다. 일본에서 온 안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나, 내일 아유타야 갈 거야."

 "오! 나도! 나랑 같이 갈래?"

 "좋아. 그럼 우리 같이 가자. 너도 같이 갈래?"


 안나는 다른 친구와 마침 근교 여행 동선이 겹친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착착 여행 일정을 맞추더니 내게도 근교 여행을 제안했다. 정신없는 까오산 로드에 지쳐있던 나에게는 정말 고마운 제안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만난 지 30분도 되지 않아 동행자가 되었다.


 물론 그 짧은 여행이 안나와 나 사이를 특별하게 만들어준 것은 아니었다. 생판 남이 아니긴 했어도 말이다. 에어컨 없는 기차에서 한 시간 반 수다를 떨고, 네다섯 시간 땡볕에서 자전거를 굴렸으니 남이라기보다는 아는 사람, 동료 정도?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그 사람을 판단할 정도로 많지 않아 편견도 기대도 없는 사이. 그냥 혼자 다녀오기 꺼려졌던 먼 사원 도시에 함께 발들였던 전략적 전우. 안 나와 나는 그 정도 사이였다.


 야시장에 안나와 내가 단 둘이 간 것도 대단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아유타야에서 돌아오면서, 다음날 태국을 떠난다는 안나가 마지막으로 보고 싶던 야경지에 가자고 모두에게 제안했다. 그중 지하철을 더 타고 야시장을 돌아다닐 기력이 남아있던 게 나뿐이었던 것이다. 그뿐이다.


 롯파이 야시장까지 가는 길은 안나가 찾았고, 안나가 보여준 사진 속 야경 스팟을 찾은 건 나였다. (대한민국 여행 블로거 만세!) 야시장 치킨으로 배를 채우고, 쇼핑몰에 올라가 야경을 보는 내내 우리가 나눈 대화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안나는 내게 자신의 무거운 이야기를 했고,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 백팩을 꾸릴 때, 무거운 물건은 짐 맨 아래에 놓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다시 꺼내려면 위에 있는 짐을 다 꺼내놓기도 어렵거니와, 백팩을 메고 움직일 때 무게중심이 맞지 않아서라고 했다. 한 곳에 우직하게 자리를 잡아야 하는 건물이나 탑이라면 응당 아래가 무거워야겠지만. 자꾸 움직이고 거처를 옮겨 다녀야 하는 백패커라면 가장 무거운 짐을 등 어깻죽지에 붙이고 언제든지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왜, 그런 말이 있다. 오히려 남한테 말하는 것이 더 편한 이야기가 있다고. 내가 뿌리내린 곳에서는 너무 무거워 꺼내기도 어려운 주제의 말들이 낯선 곳 새로운 사람에게는 쉽게 내뱉을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어쩌면 내가 안나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놀라는 대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던 이유는, 나도 안나만큼 무거운 이야기를 언제든 꺼내놓을 준비가 된 백패커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무게중심이 바로 잡힌 사람은 쉽게 쓰러지거나 지치지 않는다. 무거운 이야기를 꼭꼭 숨겨놓지 않고 꺼내볼 수 있는 사람은 단단하다. 안나는 단단한 백패커였다. 나는 안나의 용기에


 "이걸 보고 싶어서 이 야시장에 왔어. 태국 마지막 날에 보게 되었네."

 안나는 야시장도 찍고, 나와 셀카도 찍었다. 안나가 보낸 2주 태국 여행의 마지막 밤이자, 내가 태국에서 보낼 한 달 중 세 번째 밤이었다. 이 날의 경험이 나에게는 속 이야기를 꽁꽁 숨겨놓지 않게 되어 여행을 연 계기가 되었는데, 안나에게도 태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떠올리며 곱씹을 밤이 되었을까?


 남은 건 롯파이 야시장의 알록달록 야경뿐이니 모를 수밖에. 그렇게 하루 남짓 만나 무거운 짐을 털어버린 백패커들은 다시 가방을 꾸려 제 갈 길을 떠났다.


 +


 숙소로 돌아가는 길, 안나랑 같이 야시장을 지나다가 망고스틴을 발견했다. 이미 군것질을 너무 많이 했던 참이라 고민하다가, 결국 나만 망고스틴을 샀다.

 "한국에는 이런 말이 있지. 맛있는 건 0 칼로리야!"

 그러니까 안나가 일본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고 얘기해줬다.

 "어떤 개그맨이 한 말인데, 도넛 같은 동그란 음식은 다 0 칼로리래. 0 모양이니까!"


 칼로리의 늪에서 욜로를 외치는 건 세계 어디를 가도 비슷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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