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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주 Mar 02. 2021

나는 네 '뉴 와이프'가 아니다, 이놈아.

#1 까오산 로드 여행자를 조심하세요. 호스텔 그 놈!

[들어가기에 앞서, 이 글은 2020년 초 퇴사 직후 여행을 회상하며 쓴 글이다. 그 때 적었더라면 더 좋았을테지만 원래 사람일은 곱씹을수록 우러나는 법이니까. 게다가 코로나로 발이 묶인 지금, 여행을 떠올리는 일은 하나의 현실 도피가 되어버렸다. 어쩌면 1년이 넘게 지나버린 여행을 떠올리기에 지금이 적기가 아닐까? 싶어 다시 그 때를 떠올린다.]


[주의! 이 글 읽고, 여자가 혼자 여행 다니다가 큰일날 뻔 했다니, 어려서 세상 무서운 줄 모른다니, 그럴 줄 알았다니, 하는 말 하는 사람들 모두 한 달 동안 지하철 탈 때 마다 자리 없음!]


 태국에 대한 첫인상이 그렇게 안좋을 줄은 몰랐다. 비행기를 예매할 때도. 출국 전날 밤 내 상체만한 백팩에 짐을 쌀 때에도. 추운 날씨에 얇은 후리스를 입고 여름 날씨의 돈므앙 국제 공항에 도착했을 때 까지만 해도!


 치앙마이행 야간 열차에 대한 로망(+ 너무 늦게 여행을 결정하는 바람에 방콕행의 두 배 되는 치앙마이행 비행기표값) 때문에 방콕에서 일주일을 보낸 뒤, 치앙마이에 머물기로 했다. 그 때의 나는 방콕도 치앙마이도 잘 모르는 무계획 여행자였기 때문에, 배낭여행객들의 성지, 까오산 로드 주변에 숙소를 잡았다. 거가 어떤 곳인줄도 모르고!


 국제 공항에서 숙소까지 가면서 마주한 방콕의 첫 인상은 기다림이었다. 셔틀도 기다려. 숙소 체크인 시간도 기다려. 식당 메뉴도 오래 기다려. (심지어 식당은 구글맵을 잘못 보는 바람에 채식 식당이었다. 아주 당혹스러운 맛이 나는 음식에 태국 여행 3시간 만에 방콕행을 후회할 뻔 했다지.) 그게 그 날 밤의 불길한 사건에 대한 전조였을까?


 아마 까오산 로드의 네온이 켜지기 전이라서 그랬을 거다, 싶어 밤까지 충전을 하기로 했다. 호스텔로 돌아와 늦은 낮잠을 잤다. 마치 쓰나미가 오기 전, 파도 한 번 치지 않는 고요한 모래사장같이 보드라운 잠이었다지.


 눈을 뜨자 밤은 어두워져 있었다. 까오산 로드로 나갈 채비를 마치고, 나가기 전 방콕 관광 지도를 받으러 호스텔 로비의 카운터에 갔다. 상냥한 호스텔 이모가 지도를 찾아주러 뒤돌아 있던 사이에, 카운터 바 옆에 선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짧은 눈 인사가 오갔다.

 "안녕! 혼자 왔어?"

 고개를 끄덕이자, 그 남자가 슬쩍 주먹을 내밀었다. 아, 주먹 인사구나! 나도 주먹을 내밀었다. 주먹끼리 콩!

 그리고 나는 손목을 붙잡혀 호스텔 밖으로 끌려 나갔다. 아, 내가 방금 한 게 주먹 인사가 아니라 쌀보리였나.


 그는 아니 그놈은, 호스텔 이모가 나한테 건네는 지도까지 낚아채고는 나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내가 방콕에 도착한 지 약 14시간째에, 그러니까 낯선 도시에서 보내는 첫째 날 밤 8시쯤에 벌어진 일이었다. 여름처럼 후텁지근했음에도 1월이라 그런지 밖은 깜깜했고, 번화가와 떨어져 있는 호스텔 바깥은 인적도 없었다. 그놈은 내 손을 잡고 계속 나를 어디론가 이끌었다. 내 힘으로 멈추기 어려운 힘이었다.


 일단 웃음이 나왔다. 어이없고 당황스러운 웃음. 소리가 툭툭 끊어져서 헛! 헛하고 나오는 웃음. 그놈도 웃었다. 잇몸이 아주 만개해 있더라고. 그 얼굴에 무섭기보다는 얼이 빠져서 물었다.

 "지금 어디 가는 거야?"

 "내 친구한테 갈 거야."

 "너 술 마셨니?"

 "아니! 마시러 갈 거야!"

 "나는 가기 싫은데?"

 "아니, 너도 갈거야!"

 아니, 나는 네 놈 이름도 모른다 이놈아. 물론 이름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네놈 이름 알 건 없고, 지금 날 끌고 어디로 가는 거냐고.


 손목을 빼려고 했지만 놔주질 않았고, 아프다고 하니까 깍지를 꼈다. 깍지 낀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있었는데, 그걸 보더니 그놈이 묻더라.

 "너 남자 친구 있니?"

 있다고 했어야 했는데! 넋이 나가서 사실대로 없다고 불어버렸다. 또 잇몸 만개. 정말 어이가 없으면 머리가 하얘진다. 영어도 잊어서 순간 한국말을 하게 되더라. 아니, 아니, 아니.


 두어 블록 걸으니까 셔터가 내려간, 불이 켜진 가게가 나왔다. 그 앞에 현지 사람 같은 남자가 셋, 누가 봐도 관광객인 하와이안 셔츠 입은 남자가 하나. 저 놈들이 붙으면 진짜 못 빠져나오겠구나 싶어서 손을 막 빼려고 하는데, 하와이안이 나한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야, 나는 하와이안이 구세주처럼 보였다. 한국어 쓰는 서양인 구세주. 내가 상황 설명을 하려는데 그놈은 하와이안이랑 눈인사만 하더니 계속 걷더라. 나는 계속 끌려갔다. 하와이안도 다른 현지인들도 따라오지 않았다. 더 어두운 곳으로 그놈이랑 나만 걸었다.


 원래 갈등은 대화로 풀어야지. 무서워서 머리가 단순해진 건지, 베이직이 베스트라서 그런 건지, 나는 그놈이랑 통성명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나는 김왈이라고 해. 넌 이름이 뭐니?"

 "나는 000이야. 가나에서 왔어." (이름은 전혀 기억이 안 난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그렇구나. 너는 방콕에 언제 왔니?"

 "지난주에 왔어. 몇 년 전에도 왔는데 너무 좋아서 또 온 거야."

 "하하. 그렇구나. 나는 방콕이 이번이 처음인데 오늘이 첫날이야."

 "그래? 그럼 오늘 밤을 핫하게 보내야지!"

 "하하. 나는 사실 쉬려고 여행 왔어. 그래서 호스텔에 돌아가고 싶어."

 "안돼!"

 그렇게 돌려 돌려 말했는데도 거절당했다. 대화가 안 통해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나 호스텔 가고 싶어."

 "안돼!"

 "나 돌아 갈래."

 "안돼!"

 차선책으로, 나는 오늘 피곤하니까 내일 밤에 놀자고 했다. 그놈은 오늘이 여행 마지막 날이라고 꼭 오늘이어야 한다고 했다. 손을 빼려고 하니까 손등에 뽀뽀하더라. 인생.


 그리고 뒤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하와이안이 등장했다. 하와이안은 그놈이랑 뭐라 뭐라 이야기했다. 하와이안은 나한테도 다시 인사를 했는데, 그놈이 말을 안 멈추더라. 술 냄새가 안 나기는 했지만 그놈은 취한 게 분명했다.

 "인사해. 내 뉴 와이프야!"

 그리고 다시 손등에 뽀뽀. 팔이 꼬리였다면 내 소원은 도마뱀이 되어 끊고 달아나는 것이었다.


 그나마 하와이안은 나랑 대화를 할 정신이 있어 보여서 의견 피력을 다시 했다.

 "나 호스텔 갈래."

 적어도 하와이안은 정신이 말짱해 보였다. 자그마치 설득을 할 줄 알더라. 같이 놀면 재미있을 거다. 원래 방콕에서는 혼자 온 백패커들이 다 같이 모여서 노는 거다. 여행 첫 날인 기념으로 우리가 술을 사겠다. 물론 그 와중에도 그놈은 계속 내 손을 잡고 끌고 돌리고 난리고.


 그들을 자극하고 싶지 않아서 차마 말 못 했는데,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생겨서 용기가 났다. 대화의 핑퐁이 그나마 정상적으로 바뀌자, 나는 하와이안에게 내 감정을 피력했다.

 "나 너희가 무서워!"

 하와이안은 내 말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놈을 멈춰 세운 다음, 진짜 자기는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고 손짓 발짓을 다 하더라. 물론 그놈은 계속 걸으려고 난리였다.


 "그래 너희 착한 애들 같아. 그런데 솔직히 나는 무서워!"

 가만히 놔두면 억울해서 펄펄 뛸 기세의 하와이안을 계속 진정시키면서도 나는 계속 말했다. 무서워! 무서워!


 하와이안은 자기가 치한 취급당했다는 사실이 서러웠는지 나라 잃은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그놈의 손아귀에서 내 손을 풀어줬다.

 "그래 알았어. 숙소로 돌아가. 우리끼리 놀게."

 그놈은 계속 내 손을 잡으려고 난리였고, 하와이안은 그 손을 막느라 난리였다. (난리라는 말을 계속 쓰고 싶지는 않은데, 진짜 난리였다. 정말 말 그대로 난리. 난리 난리 생난리.)


 결국 하와이안이 그놈을 부둥켜안고 가버리면서 사건은 끝났다. 어딘지도 모르는 컴컴한 골목에 혼자 남은 나는 신의 선물 같은 구글맵으로 왔던 길을 되짚어 호스텔로 돌아왔다. 호스텔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카운터를 찾았다. 그놈한테 뺏긴 지도를 다시 받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그놈의 숙박 여부를 물어보려고.


 저 무 뽑히듯 끌려가는 거 보셨죠? 그놈 얼굴 보셨죠? 그놈이 어디 가는지도 안 알려주고 지금까지 저 끌고 돌아다녀서 겨우 돌아왔어요. 그놈 말로는 자기가 내일 밤 떠난다는데 그게 사실인가요? 사실이었으면 좋겠네요. 안 그러면 제가 나갈 거니까요. 저 무서워요! (물론 영어로 말하느라고 이 정도로 강경하게 말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제대로 전해진 것 같았다. 호스텔 이모 표정으로 볼 때, 이모 눈에는 내가 염치없는 외국 놈한테 놀라서 올망 거리는 딸뻘 여행자처럼 보였을테니까!)


 이모는 내가 그놈한테 놔달라고 할 때보다 더 어이없고 화난 표정으로, 그놈의 숙박부를 찾아내셨다. 다행스럽게도, 진짜 그놈의 체크 아웃은 내일이었다. 혹시 그놈이 너 돈 뺏거나 물리적으로 때렸냐, 이모는 그놈 짐을 당장에라도 길거리에 던져버릴 기세로 말씀하셨고, 그게 참 든든했다.


 쓰담쓰담 우쭈쭈 나를 달래준 카운터 이모 덕분에 놀란 마음이 풀렸다. 다시 떠올려도 그놈은 쓰레기였지만, 긴 태국 한 달 살이에 앞서 액땜했다고 치지 뭐! 방에 올라가 땀난 몸에 다시 물을 끼얹고 침대에 누웠다. 그 놈한테 막 끌려 갈 때에는 그냥 얼이 빠져 있었는데, 혼자 이불을 덮고 컴컴한 곳에 누워있으니 그제야 몸이 떨렸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네 시간 가까이 떨어져 있는 타국이었지만 아는 사람이 만나고 싶었다. 적어도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그래서 태국 여행 오픈 채팅방을 찾아 들어갔다. 마침 까오산 로드에서 술을 마시는 이들이 있었고, 나는 혼자있기 싫다는 일념 하나로 까오산 로드의 펍을 비집고 들어가 몇 시간 춤을 췄다! 갈때도 올때도 그 놈을 다시 마주칠까 두려워 숙소까지 빙 돌아왔지만, 심장을 울리는 까오산 로드의 K팝-올드팝 리믹스가 내 안의 용기를 충전시켜줬다. 사람이 싫어서 온 여행 첫 날, 사람을 찾게 만들다니. 그 놈의 영향력에 크고 느린 빈정 박수를 보낸다. 짝. 짝. 짝. 짝.


 까오산의 기운으로 배포는 충전했지만 체력은 방전되는 바람에, 숙소 앞 과일 노점에서 망고를 사왔다. 늦은 간식으로 달큰한 생망고를 으깨 먹으니, 이제야 진짜 여행이 시작되나 싶었다. 호된 신고식을 치뤘으니, 이제 이상한 사람은 그만 꼬였으면. 아니, 애초에 혼자 여행이었으니 혼자 평화롭게 여행할 수 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계속 되뇌었다.

 '오늘은 태국에서 보낼 한 달 중에서 제일 재수 없는 날이었을거야! 액땜 한 번 제대로 했다.'


+

 호스텔 로비 2층에 앉아 망고를 먹고 있는데, 그 놈은 어디가고 하와이안 혼자 올라오더라. 눈이 마주치고 먼저 인사하길래 끄덕 했는데, 옆에 오더니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자기 진짜 수상한 사람 아니라고. 미국에서 왔는데 한국인 친구들한테 한국말도 배웠다고. 한국말을 하는 게 착한 사람 인증 마크는 아니었지만, 나를 안심시키려고 하던 그 노력 덕분에 하와이안은 스리슬쩍 무서운 사람 리스트에서 내려갔다.


 그래, 넌 봐준다. 가라. 잘 자라고 악수청하길래 그런 마음으로 손을 내밀었더니 웬걸, 하와이안도 손등에 뽀뽀 하더라. 그래, 친구가 어디 가니. 너도 다시 볼 일 없으니까 저리 가라, 이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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