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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주 Oct 17. 2021

동거인이 우주가 보낸 신호 받고 비건 된  ssul.

도고, 그래서 넌 왜 비건이 된 거야?

 다시 도고의 비건 선포일로 돌아가서, 솔직히 도고의 비건 선언을 그저 말랑하게 받아들인 건 아니다. 첫 글에서 쓴 것보다 더 길고 딥한 토론이 있었다. 그런데 그 토론은 비건과는 전혀 관련 없는, 사이비에 관한 거였다.


 도고가 비건이 되겠다고 하자마자 난 물었다.


 "왜?"


 비건을 결심할 이유야 많겠지만, 바로 어제까지 나랑 같은 집에서 같은 음식을 먹던 하우스 메이트가 고작 하루 집을 비웠다고 비건이 되었는데 안 물을 수가 없었다. 동물권? 환경? 건강? 어떤 이유에서건 내가 말릴 수는 없었겠지만. 그런데, 도고는 내 예상을 벗어난 대답을 내놓았다.


 "미디어 커리큘럼이라고 알아?"


 도고의 설명에 따르면 미디어 커리큘럼이란, 온 우주가 나한테 메시지를 보낸다는 이론이다.


 명문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뉴욕 최고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가 될 기회를 잡음에도 행복하지 않은 레베카.

 자꾸 '행복'이라는 글자가 눈에 밟힌다. 텔레비전 광고에서도, 회사 옆 건물 전면 플랜 카드에서도, 신문 가판대에서도!

 그런 레베카 앞에 우연히 중학교 때 두 달 만났던 전남친 조쉬가 나타난다.

 '맞아! 난 조쉬랑 사귀던 그 두 달이 가장 행복했어!

 조쉬랑 사귈 때 가장 행복했으니까, 내가 행복할 방법은 조쉬랑 사귀는 것. 그런데 조쉬가 고향인 캘리포니아로 돌아간다고? 그럼 나도 캘리포니아로 가!

 그렇게 레베카는 뉴욕에서의 커리어를 버리고 캘리포니아로 간다. 조쉬와 다시 사귀어 행복을 찾기 위해!


 위 내용은 미국 뮤지컬 드라마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1화 내용인데, 도고의 설명을 듣고 딱 내 머릿속에 떠오른 미디어 커리큘럼의 예시였다. 행복에 대한 노이로제에 걸린 여자가 과거의 행복했던 추억을 따라 커리어를 버리는 이야기. 드라마 결과적으로 레베카는 행복을 찾기는 하지만, 그 과정이 좋은 방법이었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우주가 나한테 내 미래에 대한 메시지를 보내준다는 말은, 다분히 종교적이고 유사과학스러우며 사이비 냄새가 났다. 물론 듣기에 따라서는 동기 부여를 위한 좋은 이론이 될 수 있겠지만, 문제는 도고한테 있었다.


 도고는 사이비가 사이비인 줄도 모르고 공부하러 집회까지 따라가는 애였다.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0에 수렴하는 데다가 귀도 얇아서 '야! 너 큰일 날 뻔했잖아!' 할 만한 에피소드도 많았다. 그런 애 입에서 미디어 커리큘럼이 나왔으니, 그 출처를 묻는 건 당연했다


 "그걸 어디서 배웠는데?"

 "그냥 책에서 읽었어."

 "그 책은 누가 준 건데?"

 "그냥 읽었어."

 "책은 어떤 책인데?"

 "그냥 비건 책이야."


 도고의 대답에 '그냥'이 많으니까 불안했다. 얘가 어디서 이상한 사람한테 이상한 이야기를 들은 게 아닌지, 이상한 논리에 설득당해서 이렇게 갑자기 비건을 시작한다는 게 아닌지. 도고의 부연설명은 더 이상했다.


 "나도 미디어 커리큘럼에 대해서 생각해봤거든. 우주가 나한테 보낸 메시지가 뭘까, 싶어서. 그런데 나도 메시지를 받았더라고! 채식을 하라고."


 우주의 계시로 비건을 시작한 사람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몇 번이나 도고한테 '이번에는' 사이비가 아닌지, 이상한 책은 아닌지 되물었다. 도고는 거듭날 안심 시키면서 유명한 책에서 읽은 거라고 했다. 유명한 책은 많다고! 유명한 책 말고, 멀쩡한 책이냐고! 나는 울부짖었다.


 마침 도고가 철학 독서 모임을 시작한 탓에 나는 한동안 그 모임의 순수성을 의심해야 했다. 모임원 중에 이상한 사람은 없는지, 거기서 읽는 책 중에 이상한 책은 없는지! 다행스럽게도 도고의 철학 독서 모임은 같은 일하는 사람들끼리의 친목 모임이었고, 책도 말짱했다. 하지만 도고가 '그 책'을 나한테 보여주기 전까지 계속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우주적 메시지'가 뭔지!


 [아무튼 비건]


 도고가 읽은 책은 이 책이었다. 정말 말짱한 비건책인데, 놀랍게도 미디어 커리큘럼이 등장하는 건 초반 두세 페이지뿐이었다. 애초에 비건 책을 읽고 비건을 결심했다고 했으면 이 정도로 마음 졸이지 않았을 텐데!


 책에서 설명하는 미디어 커리큘럼을 살짝 설명하자면 이렇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다양한 매체들이 있는데, 이 매체에서 우리는 반복해서 들리는 메시지를 찾게 된다. 우연인지 스스로가 무의식적으로 찾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어른거리는 신호를 따라가다 보면 내 인생에서 정말 필요한 것, 혹은 내가 바라던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저자가 설명하는 미디어 커리큘럼은 추상적이기는 해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스스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신경을 쓰고 있다면 눈에 밟히는 뭔가가 있을 테니까. 저자는 이렇게 동물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움직임이 비건으로 이어졌다고 자신의 경험을 풀었다. 이해가 쏙쏙 되는 비건 계기였다. 도고랑은 다르게!


 이렇게 나를 괴롭히던 도고 사이비 설은 끝났다. 속이 후련하기는 한데, 좀 찜찜했다. 아니, 진작 이렇게 설명해줬으면 그동안 삽질은 안 했지! 도고한테 찡찡거려봤자, 속없는 도고는 히히 웃고 만다. 그래, 니가 비건이 좋다니 나도 좋다, 야. 넌 무슨 결심이 서면 꼭 계기는 글로 정리해서 가지고 다녀라.


+

 도고가 읽은 책, [아무튼 비건]에서는 이 이론을 'M.C'(Media curriculum, 매체 커리큘럼)이라고 소개한다. 도고의 말로는, 이 책을 읽고 비건을 결심하는 사람이 많은 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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