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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학 교전

줄리어스 시저 (1953)

by Albert 이홍규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29896


시작하는 말: 표기에 관하여

이 글의 주인공이자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는 영어에서는 “줄리어스 시저”로 발음이 됩니다. 문자 “J”는 고대 로마 시절의 라틴어에서는 현대의 “Y”에 가깝게 발음되었지만, 중세 프랑스어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dz” 발음으로 바뀌고, 중세 영어가 그 영향을 받게 되면서 셰익스피어의 시대에는 이미 “J”는 “dz” 발음으로만 표현되었습니다. 문자 “C” 또한 고대 라틴어에서는 “K” 발음이지만 중세 영어에 와서 “C”는 “K” 또는 “Si” 발음 모두를 포괄하는 단어가 되면서 “Julius Caesar”는 “줄리어스 시저”라는 원형을 알 수 없는 발음으로 변했습니다. 고대 로마 시절을 감안하면, 한글로 표시되는 발음 방법이 정확하나,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영상화 작품은 시대상만큼 그 언어 또한 중요합니다. 이 글에서는 만약 지칭하는 인물이 역사적 인물일 경우는 로마식 발음으로, 반대로 셰익스피어의 작품 내 그려지는 인물을 지칭하는 경우는 영어 발음인 “줄리어스 시저”, “마크 안토니”라고 음차 하도록 하겠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줄리우스 시저>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도 “브루투스, 너 마저도 (Et tu, Brute)”라는 유명한 대사는 어디선가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이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기반으로 집필되었기 때문인데, 플루타르코스가 기록한 카이사르의 인생은 셰익스피어가 아니더라도 수많은 문학, 미술 작품에 영감을 주었고, 현대에 와서도 영미권에서는 카이사르의 암살이 거행된 3월 15일을 의미하는 “Ides of March”는 일종의 고유명사처럼 사용될 정도로 대중문화에 뿌리 깊이 자리 잡았다.


<줄리어스 시저>는 아마 셰익스피어가 집필한 작품 중 원전이 가장 유명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현대에 와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영미권 중고등 학생들이 읽기 어려워하는 교과 과정으로 유명하다. 창작가들에게는 그 작품을 영상화시키는 작업 또한 난이도가 높기로 유명하다. 중세 영국의 감성과 대사를 현대에도 유의미한 형태로 재연하는 것은 영화 역사가 시작된 이후부터,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오랜 시간 동안 영미권 배우들의 숙원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줄리어스 시저>를 읽다 보면 셰익스피어 본인 또한 유명한 역사서를 각본화한 입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셰익스피어 또한 그리스어로 집필되어 로마시대를 배경으로 한 모두가 알고 있는 유명한 고대 역사를 17세기 당시의 현대인이 소화할 수 있도록 각색하고 무대화하는 작업을 거친 것이다.


이는 <줄리어스 시저>라는 작품의 연구 및 해석을 즐겁게 만드는 부분이다. 원전과 비교하여 셰익스피어가 각색한 부분이 무엇인지, 그리고 현대에 와서 다시 이 작품을 영상화할 때 어떠한 각색을 하는지를 비교하면 어렴풋이 고대와 중세, 그리고 현대 창작가와 관객의 감성이 가진 연관성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시대, 이 작품이 집필된 시기를 모두 감안하면 그 주제의 정치성 또한 해석의 여지 및 시사성, 후대에 미친 영향 또한 의미가 깊다.


3의 법칙

루이스 칼헌 (줄리어스 시저 역), <줄리어스 시저> (1953)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삶, 정확히 말하면 그가 살아간 로마 시대는 유난히 3이라는 숫자와 깊게 연결되어 있다. 카이사르의 정치 인생에 았어 터닝포인트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와 함께 그 유명한 삼두정치를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포르투갈 지역 원정을 성공한 카이사르는 로마로 금의환향하여 권력의 중심인 집정관 위치를 노린다.


하지만 그의 지나치게 빠른 성공을 두려워한 원로원의 견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이에 본인보다 훨씬 무공이 높고 인기가 뛰어난 장군 폼페이우스와 로마 최고의 거부 크라수스를 설득해 본인이 집정관이 될 시 둘의 의견을 적극 타진하겠다는 약속을 해 집정관 선거에서 성공적으로 당선이 된다. 이를 일컬어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의 1차 삼두정치로 칭한다. 카이사르의 사후에는 직속 혈연 후계자인 양자 옥타비우스, 가신 중 대표 얼굴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그리고 가신 중 가장 커다란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레피두스 세 명이 다시 한번 2차 삼두정치를 이루게 된다.


삼두정치는 라틴어로는 “triumvir”, 영어로는 “triumvirate”라는 일반 명사가 존재할 정도로 유서 깊은 개념인데, 셰익스피어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으면서 이 개념을 놓쳤을 리가 없다. 때문에 그가 무대화한 <줄리어스 시저>는 제목에 카이사르의 이름이 들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3명의 주인공을 가진 독특한 작품이 된다. 분량 순서로는 브루투스, 마크 안토니, 카시우스를 주인공으로 볼 수 있고, 인물상으로 나눈다면, 시저, 브루투스, 마크 안토니를 주인공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군상극적인 구조는 단순히 분량 분배의 목적만으로 설계된 것은 아니다. 셰익스피어가 이 유명한 원전을 작품화하였을 때 가장 많은 노력을 쏟은 부분은 다름이 아니라 “웅변”과 “설득”이다. 만인지상 위치에 가장 가까이 갔던 시저의 매력, 그를 암살하기로 결심하고 공모자들을 끌어들이는 암살자 카시우스와 브루투스, 그리고 시저의 죽음 이후 혼란한 로마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한 두 세력의 유세 모두 저 두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웅변”과 “설득”은 다름 아닌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rhetoric)”의 목적이기도 하다.


현대에도 유명한 개념이지만 “수사학”은 설득과 변론을 위해서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라는 3 요소를 중요시한다. 로고스(logos)는 이성과 원리를 가리키며, 현대에서 말하는 논리(logic)의 어원이 된다. 파토스(pathos)는 감성과 정서를 가리키며, 현대에서 말하는 공감(empathy)의 어원이 된다. 에토스(ethos)는 화자 본인의 성품 및 인물상 자체를 가리키며, 현대에서 말하는 윤리(ethics)의 어원이 된다.


<줄리어스 시저>의 수사학

존 길구드 (카시우스 역), 제임스 메이슨 (브루투스 역), <줄리어스 시저> (1953)

이 작품을 이끌어간다고 볼 수 있는 3명의 인물인 시저, 브루투스, 마크 안토니 3명의 인물의 웅변 및 대화법을 읽어보면 각 인물이 어떠한 요소를 가장 부각시키는지 볼 수 있다.


작품 내에서 시저는 본인의 생각을 이야기할 때, 1인칭이 아니라 3인칭으로 말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이는 작품 내에서 시저 외에 다른 인물은 가지고 있지 않은 유별난 수사법이다. 특히 시저가 암살당하기 직전, 그의 부인 칼퍼니아는 전날 밤 악몽을 꾼 것을 이유로 시저에게 원로원 출두를 한사코 말리는데, 시저의 대사는 지속적으로 3인칭으로 이루어진다.


시저:
신들이 내가 비겁한지 시험하고 있군-
시저가 심장이 없는 야수일까,
두려움에 떨어 집에만 틀어박혀 있을지.
아니, 시저는 거절한다. 위험의 화신은 잘 알고 있지,
시저가 그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을.
그와 나는 같은 날에 태어난 사자일지언정,
내가 더 노련하고 사납다네.
그렇기에 시저는 나아가리라.

출처: <줄리어스 시저>, 3막 2장


시저의 변론법은 화자가 “시저”이기에 가능하다. 위험의 화신이랑 같은 날에 태어났다는 이유라던가, 위험의 화신보다 본인이 더 위험하다는 어이없는 변론 전개는 그 화자가 “시저”이기 때문에 당위성을 가지고, 현대 영어의 관용구에도 “나는 준비된 채로 태어났어 (I was born ready)”와 같은 형태로 이어진다. 이는 수사학의 “에토스”의 정수와도 같다. 그 어떠한 이성적, 감성적, 호소에도 관계없이 시저는 시저이기 때문에 나아가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당당하게 나아간 시저는 원로원에서 아내 칼퍼니아의 악몽과 같은 형태로 암살당한다. 그의 암살 직후 로마는 당연하게도 혼돈에 빠지게 되는데, 이를 진정시키는 인물이 바로 암살 중 마지막으로 비수를 꽂은 인물이자, 시저가 가장 총애하던 측근인 브루투스다.


작품은 <줄리우스 시저>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지만 내용과 비중 상 굳이 한 명의 주인공을 꼽자면 바로 브루투스일 것이다. 브루투스를 주인공으로 본다면, 이 이야기는 아버지와도 같은 주군이 독재자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고 느끼는 고뇌, 그의 결심, 암살 거행, 거사 이후 패전, 이어지는 자살로 아주 교과서적인 비극의 서사 구조를 가진다. 브루투스는 시저를 암살한 직후 분노에 차 원로원 앞에 모인 군중을 상대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한다.


제임스 메이슨 (브루투스 역), <줄리어스 시저> (1953)
브루투스:
끝까지 인내를 가지고 들으시오.
로마인들이여, 동포들이여, 사랑하는 이들이여! 들으시오,
내 이유를, 그리고 침묵해주시오, 잘 듣기 위하여. 믿어주시오,
내 명예를- 그리고 내 명예를 존중해 주시오-
당신들이 믿어온 내 명예를. 지혜롭게 나를 비난해주시오,
그리고 당신들의 감각을 일깨워 주시오- 더 나은 판단을 하도록.
만약 여기 모인 이들 중에, 한 명이라도 시저의
친구가 있다면, 나는 브루투스가 가진 시저에 대한 애정이
그의 애정보다 부족하지 않았다 말하리라. 만약 그 친구가,
왜 브루투스가 시저를 배반했는지를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오.
내가 가진 시저에 대한 애정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로마에 대한 애정이 더 컸다고. 시저가 살아남아 당신들이
노예로 죽는 운명을 원합니까? 시저가 나를 아낀 만큼 나는 통곡합니다.
그가 이룬 업적에 나는 즐거워합니다. 그가 보여준
용기를 나는 존경합니다. 하지만, 그가 가진 야망에, 나는
그를 처벌했습니다. 눈물로 그의 애정을 답하고, 즐거움으로
그의 업적을 답하고, 존경으로 그의 용기를 답하고, 죽음으로
그의 야망을 답합니다. 여기 모인 이 중 노예로 살아갈
정도로 낮은 자가 있습니까? 있다면 말하시오, 내가 그를 모욕했으니.
여기 모인 이 중 로마인이기를 거부할 정도로 무례한 자가 있습니까?
있다면 말하시오, 내가 그를 모욕했으니. 여기 모인 이 중
조국을 사랑하지 않을 정도로 악한 자가 있습니까? 있다면 말하시오,
내가 그를 모욕했으니. 이제 대답을 기다립니다.

출처: <줄리어스 시저>, 3막 2장


브루투스의 연설은 로마인들의 이성에 호소한다. 먼저 연설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만약 이성적인 비판이라면 수용할 의지가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 후, 로마인들 모두가 알고 있을 본인과 시저의 끈끈했던 관계를 먼저 고백한다. 그러나 그 사적 관계보다 더 중요했던 의무, 즉 국가에 대한 애정 앞에서 시저에 대한 애정은 우선도가 떨어진다. 또한 시저가 훌륭한 행동을 했을 때는 상응하는 대우를 했지만, 시저의 야망이 너무 커져 독재가 가시화되었을 때 상응하는 대우는 처벌이었다고 주장한다.


브루투스가 상징하는 수사학의 요소는 당연하게도 “로고스”이다. 브루투스는 모든 일의 인과관계를 중심으로 연설을 전개해간다.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시저의 죽음에 분노하던 로마인들은 침착성을 되찾는다. 브루투스의 로고스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성공했을 것이다. 만약 그다음에 무대에 오른 이가 없었다면.


시저의 최측근이자 풍운아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마크 안토니는 브루투스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원로원에서 시저의 시체를 들고 걸어 나오는 기개를 보이며 그야말로 기가 막힌 등장을 한다. 브루투스에게 거의 넘어갔었던 로마인들은 이미 죽어서 “이성”과 “논리”의 영역에 위치해 있던 시저를 직접 눈으로 맞닥뜨려야 했고, 마크 안토니는 유명한 “하지만 브루투스는 명예로운 사람입니다. (And Brutus is an honourable man.)” 연설로 브루투스의 편에 넘어갈 뻔했던 로마인들의 이성에 작은 금이 가게 만든다.


이 연설은 직접적인 번역은 하지 않지만, “시저가 정말로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기에 죽었는지 (로고스)”와 “그래도 그를 죽인 브루투스는 명예로운 사람이니 믿어보자 (에토스)”라는 메시지를 교차하여 연속으로 전개해 나간다. 수사학에서 어떠한 하나의 요소가 과잉되거나 두 요소가 대립이 되면 부각되는 위화감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이 연설은 현대에도 그 우아함을 따라가는 예시를 찾기가 어렵다.


현대에서도 말하는 “이성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감성적으로 끌리는” 주느세콰(je ne sais quoi) 같은 개념이 있다. 마크 안토니의 연설을 들은 로마인들의 심중에 왠지 모르는 불안한 기색이 자리잡기 시작했을 때, 마크 안토니는 다음과 같은 쐐기를 박아버린다.


말론 브란도 (마크 안토니 역), <줄리어스 시저> (1953)
안토니:
어제라면 시저의 말들은 어쩌면
세계를 멈췄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그는 저기 누워있군요.
그리고 아무도 그에게 경의를 표할 만큼 겸손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 만약 내가 당신들을 흔들어
그대들의 심장과 생각을 분노와 반란으로 채운다면,
나는 브루투스에게 잘못을, 카시우스에게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가 알다시피, 명예로운 이들이지요.
나는 그들에게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죽은 이에게 잘못을, 나 자신과 당신들에게 잘못을 하지요,
그렇게 명예로운 이들에게 잘못을 저지르기 보다는요.
하지만 여기 시저의 낙인이 찍힌 두루마리가 있습니다.
그의 옷장에서 찾았습니다- 그의 유언을요.
만약 일반인들이 이 문서를 읽을 수만 있다면-
물론 저는 이 문서를 읽지는 않겠지만,
만약 읽은 이들은 모두 시저의 시체에 있는 상처에 입을 맞추고,
그의 성스러운 피에 손수건을 적시고,
그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추억을 위해 가질 수 있기를 빌고,
죽을 때 자신들의 유언에 이를 언급하며,
아름다운 유산으로 남겨
자식들에게 물려줄 것입니다.

출처: <줄리어스 시저>, 3막 2장


여기까지 읽었다면 당연히 알겠지만 마크 안토니는 수사학의 3 요소중 “파토스”를 중심적으로 차용한다. 그는 시저의 유언장을 꺼내, 그것을 읽는 모든 이들이 얼마나 시저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가 위대한지를 깨닫게 될지를 묘사한다. 그의 연설은 감성에 호소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감성에 호소한다고 하여 그의 연설에 논리가 부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마크 안토니의 연설의 전개는 이성적 판단 기준이 확실한 브루투스의 연설보다 넘어야 할 언덕이 더 많다.


마크 안토니는 지속적으로 암살자들, 즉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명예를 언급하고, 그 사이에 시저의 명예를 배치한다. 위에 번역된 연설 직전의 연설에서, 시저의 명예는 처음에는 마크 안토니라는 화자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다음에 시저의 명예는 가난한 이들을 보고 울 정도로 뛰어난 공감능력이며, 다음에는 왕관을 세 번이나 거절할 정도의 겸손함이며, 다음에는 읽고서는 울지 않을 이가 없다는 유언장이다.


위에 번역된 연설은 바로 그 유언장의 내용을 읽는 것으로 진행되는데, 모든 로마인들에게 75 드라크마를 나누어주고, 본인의 사적 정원을 시민에게 개방하겠다는 내용이다. 로마인들은 시저의 명예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명예보다 더 컸음을 깨닫고 분노에 차 거리로 뛰어나가 암살자들을 도시에서 내쫓는다. 마크 안토니는 로마인들을 자기의 편으로 만들고 시저의 양자인 옥타비우스와 함께 로마의 운명을 건 전쟁에 돌입한다.


이러한 수사학 방법의 교차를 통해 셰익스피어가 보여준 것은 단순히 어떠한 요소의 우위성이나 각 인물의 가치평가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 중에서 대중에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감정에 대한 호소였으며, 심지어 전개의 끝에는 모든 로마인들에게 현금 지급이라는 포퓰리즘적인 결론이 자리하고 있다. 마크 안토니는 이 극에서 악역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셰익스피어가 파토스를 기반한 설득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 효과를 통해 어떠한 경고를 보내고 있다고 해석해 볼 수는 있다.


이 교차 연설은 <줄리어스 시저>의 하이라이트이자, 이 작품의 모든 무대화에 있어서 배우들에게 가장 커다란 중압감을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1953년, 할리우드의 황금기 중심, 조지프 맹키위츠 감독이 <줄리어스 시저>를 영상화하고, 마크 안토니 역할에 젊은 말론 브란도를 캐스팅하였을 때도 배우 본인을 포함하여 많은 관계자들이 아직 연기력이 증명되지 않은 브란도가 마크 안토니의 연설을 잘 소화할 수 있을지를 걱정하였다.


브란도 연기론

말론 브란도 (마크 안토니 역), <줄리어스 시저> (1953)

<줄리어스 시저>는 1953년 7월에 개봉했는데, 참고로 같은 해 연말에는 우리가 흔히 와이드스크린(2.55:1)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시네마스코프 기법을 사용한 첫 영화인 <성의(The Robe)>가 처음으로 개봉했다. 이후 할리우드는 텔레비전과 차별화를 두기 위하여 시네마스코프와 같이 와이드스크린 화면비로 넘어가게 되었고, <줄리어스 시저>는 로마를 배경으로 한 작품 중 거의 마지막으로 아카데미 애퍼처, 즉 1.33:1의 비율을 가진 영화로 남는다. 이는 <줄리어스 시저>가 로마의 공화정 시대의 마지막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 우연이다.


아카데미 애퍼처는 지금은 많이 쓰이지 않는 비율이기에 관람 시 어색할 수도 있지만, 화면 비율 상 인물이 차지하는 범위가 넓기 때문에 오히려 셰익스피어 연극과 같은 성격 묘사(character study)에 치중한 영화에는 잘 어울린다.


그리고 영화 <줄리어스 시저>는 바로 이 “성격 묘사”를 중점으로 둔다. 물론 모든 영화가 다 그렇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다. <줄리어스 시저>는 2년 전에 개봉한 <쿠오 바디스>의 세트를 재사용했는데, 감독 맹키위츠는 일부러 흑백으로 촬영을 했다 (출처). <쿠오 바디스>에서 잘 표현된 화려한 색상과 아름다운 세트를 기억한다면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맹키위츠는 마치 뉴스와도 같은 (“newsreel approach”) 효과를 내고 싶어 했으며, 세트와 미술이 아니라 인물들의 대화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흐름을 표현하는 것을 영화의 목표로 삼았다. 즉, 영화의 다른 부분의 표현력을 제한하면서까지 인물의 성격 묘사에 집중했다는 의미다. 이는 한편으로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얼마나 중요했는지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제임스 메이슨 (브루투스 역), <줄리어스 시저> (1953)

극 중 주인공의 위치인 브루투스 역의 제임스 메이슨은 차분하고 고뇌에 찬 셰익스피어식 비극의 주인공을 훌륭하게 연기해 냈다. 후에 히치콕 감독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1959), 큐브릭 감독의 <롤리타> (1962) 등 전설적인 연출가의 대표 작품의 주연을 꿰차는 되는 제임스 메이슨의 연기력은 이 당시에 이미 완성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존 길구드 (카시우스 역), <줄리어스 시저> (1953)

한국에서는 유명하지 않을 수 있지만 카시우스 역의 존 길구드는 영국 최고 연극 명문가인 테리가의 출신으로 로런스 올리비에와 함께 영국 연극계를 이끌어가는 거장 배우이자 연출가였다. 역사적으로는 브루투스의 임팩트에 밀리는 카시우스는, 적어도 이 영화 내에서 존 길구드의 연기력을 통해 구현된 인물상은 그 불안함의 전달력이라는 점에서는 제임스 메이슨을 능가하고 있다.


제임스 메이슨과 존 길구드는 모두 영국에서 성장하고 올드빅 극단에서 고전적인 연기 수업을 받은 셰익스피어 전문가들이었으며, 그에 부끄럽지 않은 연기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받은 것은 미국 출신의 젊은 배우 말론 브란도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20년에 와서 말론 브란도라는 배우의 연기력, 그 배우 한 명이 영화사 및 연기론(論)에 미친 역할이 얼마나 커다란 지 모르는 사람은 많이 없다. 1953년 당시만 해도 채 30살이 되지 않았던 말론 브란도는 막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통해 전국적인 데뷔를 했고, 그 충격적인 연기 방법은 할리우드에서 볼 수 없었던 형태였다. 지금에는 브란도가 보여준 “자연스러운 연기”가 연기론의 대세지만, 이전까지만 해도 할리우드를 지배하는 연기론은 흔히 말하는 연극톤의 과장된 방식이었다. 때문에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카랑카랑한 발음이나 발성이 아니라 누가 들어도 자연스러운 톤의 연기를 한 브란도의 시도는 일부 보수적인 평론가들로부터 “웅얼이 (the mumbler)”라는 별명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출처).


이 영화에서 브란도는 본인이 자연스러운 반항아 콘셉트뿐만 아니라, 고전적인 셰익스피어 연기까지 자유자재로 해낼 수 있음을 증명했다. 영화에서 마크 안토니는 극의 초반 부분에서는 존재감이 희미하다가 중반부 시저의 죽음 이후부터 분량이 극대화되는데, 극에서 분량으로는 제임스 메이슨이 분한 브루투스보다 적지만, 오히려 영화에서 톱 빌링을 따내며 제1 주인공으로 인정받았으며,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 후보에도 올랐다.


말론 브란도는 영화사에서는 대부의 돈 콜레오네 역할이 가장 유명한데, 젊은 시절에는 출중한 외모와 연기력을 모두 갖춘 섹스 심벌이자 슈퍼스타였다. 이 영화에서도 초반부터 상의탈의를 하고 등장할 정도로 청춘스타 이미지를 밀어주기도 하며, 역사적으로도 바람둥이였고 후에는 클레오파트라와 세기의 염문을 뿌린 풍운아 마크 안토니의 이미지와도 어울리는 완벽한 캐스팅이었다.


이 연기력의 교과서 같은 배우들, 제임스 메이슨의 브루투스와 말론 브란도의 마크 안토니는 극의 클라이맥스, 즉 시저 사후의 교차 연설 부분을 그 어떠한 액션 장면도 없이 숨 막히는 언어의 전투로 구현해낸다. 이 장면만으로도 영화를 관람한 이들에게 이 작품을 다시 영상화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만들 정도로 현대에 보아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흡입력이 있다.


영화상에서는 마치 관객의 눈을 대변하듯, 마크 안토니의 연설을 들으며 점점 분위기가 고조되는 로마 시민들의 모습이 교차되어 보인다. 그들은 불과 5분 전까지는 브루투스에게 설득되어 독재자가 될 뻔한 시저를 욕하고 있었지만, 곧 수려한 외모의 마크 안토니의 파토스 충만한 연설을 듣고는 흥분하여 로마 시내를 쑥대밭으로 만든다. 셰익스피어가 이 작품을 집필하고 상영한 1599년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연로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고 있었는데, 시저 사후의 혼란이 당시 영국의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라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출처). 맹키위츠 감독의 연출과 네 명의 대배우가 보여준 연기에는 어떠한 정치적 메시지보다는 수사학, 즉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에 대한 연구가 돋보인다. 이들이 셰익스피어의 고풍스러운 대사를 전달하는 모습을 감상하다 보면 왜 배우들이 셰익스피어에게 홀리는지, 그 주느세콰가 어느 정도 이해가 갈 것만 같다.


셰익스피어 영상화 한줄평:

시대가 변하는 계기와 그 시대를 바꾸는 인물들에 대한 슬로우번 정치 드라마의 고전




맺는 말: 번역에 관하여

셰익스피어 작품의 일부분을 직접 한글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셰익스피어 작품은 약강 5보격(iambic pentameter)이라 불리는 운율을 지닌 운문(verse)인데, 운율까지 살리지는 못하지만, 최대한 행바꿈을 지킨 형태로 번역합니다.

이 글에서는 번역된 대사가 상당히 길어서 원문을 부득이하게 삭제합니다.

MIT에서 호스팅 하고 있는 셰익스피어 원서를 번역 대상으로 사용합니다.

<줄리어스 시저> 원서: http://shakespeare.mit.edu/julius_caesar/full.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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