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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이 끝나면

로미오와 줄리엣 (1968)

by Albert 이홍규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3421


코러스:
두 가문이 높은 명망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베로나에 우리의 무대를 만들리,
해묵은 반목이 새로운 혼란으로 이어지는
이곳에 시민의 손들이 피로 더럽혀지리.
이 와중 두 숙적 가문의 중심에 서서
하늘의 별을 화나게 한 두 연인이 자살을 하고;
그들의 가련한 사랑은 불장난을 넘어서
죽음으로 부모들의 비극도 함께 끝나오.

출처: <로미오와 줄리엣>, 서막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여러 번 경험할수록 유명한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물며 그런데 그것을 무대화하고 영상화하는 창작자는 어떨까. 로저 이버트는 1968년 프랑크 제페릴리 감독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리뷰하면서, 그 대사들이 너무나도 유명한 나머지, 관객들은 그 대사가 나올 상황이 되면 대사들을 기다리게 된다고 밝히며 대문호의 작품을 영화화하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지 완곡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출처). 이는 사실 관객 입장에서도 그 어떠한 엔터테인먼트를 즐기는 형태와도 다르다.


좋아하는 감독이 새로운 영화를 만들면, 많은 팬들은 그 이야기가 궁금해서 영화관으로 달려간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스포일러 금지와 같은 규칙이 정해지고, 이 규칙은 사실 법적으로 처벌이 불가능하다 뿐이지 거의 영화계의 황금률처럼 여겨진다. 쿠엔틴 타란티노와 같은 영화광 감독들은 깐느 영화제에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를 관람한 언론 매체에게 스포일러를 하지 말아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하기도 한다 (출처).


이에 비교해 보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관람하는 마음가짐은 상당히 다를 수밖에 없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가문의 반대를 이기지 못해 동반 자살한다는 이야기는 스포일러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거의 상식의 수준에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행이 될지 미리 알면서 작품을 감상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실 그 서사가 가진 유명세가 너무 뛰어난 나머지 문학적 성취도가 저평가되는 경향이 있는데 심지어 이러한 경향은 새뮤얼 피프스를 위시한 동시대의 연극 비평가들에게도 나타나는 반응이었다 (출처), 하지만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두 연인의 대사가 페트라르카 소네트에서 셰익스피어 소네트 형식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을 줄리엣이 로미오를 길들인다는 서사와 연결시키는 해석도 존재하며 (출처), 아예 그것을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영국 르네상스로 변화해가는 과정에 비추는 관점 또한 흥미롭다 (출처).


하지만 이러한 제반 상황에 대한 지식이나 문맥에 대한 이해는 작품이 처음이 상영된 16세기 말의 관객에게는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직관성이 존재했을 수는 있어도, 400년 후, 작품의 매체가 무대 위에서 영상이라는 형태로 바뀌면서 쉽게 느낄 수 있는 종류는 아닐 것이다. 현대의 일반적 영화 관객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영화를 보면서 음률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기를 바라는 창작자가 존재할리도 없다.


이 두 가지 요소, 즉 기승전결이 공개된 채 시작되는 상황과, 작품이 가진 문학적 성취가 직관적으로 전달되기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아마 셰익스피어 작품을 영상화하려는 창작자들이 당면하게 되는 문제의 근원이 아닐까 싶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자체를 좋아하는 독자 입장에서도 이와 같은 이유로 어떠한 작품을 쉬이 남들에게 추천하기는 어렵기에 항상 원작에 대한 이해가 없이 영상물 자체만으로 평가를 해보려 한다. 하지만 그 대상이 "서로의 집안이 반대하는 젊은이들의 비극적인 사랑"의 고유명사와도 같은 <로미오와 줄리엣>일 경우에는 어느 정도 객관성을 유지하면서도 색다른 평론을 한다는 시도조차 엄두가 나지 않기에, 그 어떠한 글보다 기획 과정이 오래 걸렸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


올리비아 핫세 (줄리엣 역), 레너드 위팅 (로미오 역), <로미오와 줄리엣> (1968)
로렌스 신부:
이 폭풍 같은 즐거움은 폭풍처럼 끝날 것이고,
순간은 행복해 보이더라도, 화염과 폭죽처럼
입 맞추는 순간 모두를 태우네. 가장 달콤한 꿀도
그 황홀한 단 맛 속에 숨은 간교함으로
먹는 이의 입맛을 교란시키기 마련이지.
그러니 사랑도 절제하게. 긴 사랑을 위해서.
너무 빠른 사랑도 너무 느린 사랑과 함께 끝난다네.

출처: <로미오와 줄리엣>, 2막 6장
상황: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밀 결혼식에 주례를 서는 로렌스 신부는 식을 앞두고 흥분한 로미오를 침착하게 가라 앉히기 위해 설득한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2016년 영화 <컨택트(Arrival)>의 원작이 된 테드 창의 단편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Story of Your Life)>에서는 아주 해묵은 주제인 운명론과 자유의지에 대한 담론을 상당히 신선하게 다루고 있는데, 작품의 주인공인 언어학자 루이스 뱅크스는 언어의 구분법 중 정보전달(informative) vs. 역할 수행(performative) 개념을 소개한다. 이 개념이 자유의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는 것을 추천하지만, 테드 창은 어떠한 소통은 그것이 입 밖으로 나왔을 때만 의미를 가진다는 이야기를 한다.


예를 들자면, "당신을 체포합니다"에서 이어지는 미란다 원칙에 대한 설명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 말이 실제로 경찰관의 입에서 나오기 전에는 그 어떠한 효력이 없다. 결혼식의 모든 하객은 그 결혼이 실제로 어떻게 진행될지 알고 있지만, 이 성혼 의식은 주례가 "신랑 신부가 부부임을 선포한다"라고 말하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다.


언어행위 이론에서는 이러한 형태의 소통을 역할 수행적 소통(performative utterances)이라고 일컫는데, 재미있는 것은 performance라는 영어 단어에는 수행이라는 의미뿐만이 아니라 공연이라는 의미도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즉, performative communication은 한국어로는 역할 수행적 소통이자 공연적 소통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결혼식의 모든 하객은 어차피 이루어질 결말을 보기 위하여 긴 예식을 기다린다. 이런 그들에게 미래에 대한 예지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말하기보다는 그 예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 형태와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 하객으로 가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때문에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관람하는 것은 재미있게도 결혼식을 참가하는 하객의 자세와 닮아 있다. 관객은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극의 결말을 알고 있거나 심한 경우는 모든 대사를 다 알고 있다. 어떻게 보면 <로미오와 줄리엣>은 20세기, 21세기에 와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들은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지 알고 있어도 그 상황이 벌어지는 순간을 즐기기 위해 몇 번이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보게 된다. 이는 좋아하는 작품이 극장에 상영될 때 N회차 관람을 하는 관객의 태도와도 같다. 대사를 달달 외우는 상황이 되어도, 그들은 그 작품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을 경험하는 그 순간의 카타르시스를 갈구하게 된다.


좋아하는 작품을 여러 번 보는 이유를 굳이 설명한 것은, 이는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작품, 그리고 제페릴리 감독의 1968년 영상화를 감상할 때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제페릴리 감독이 이 작품에서 주목하고 집중한 부분이 바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순간의 직접성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전부일 때

올리비아 핫세 (줄리엣 역), 레너드 위팅 (로미오 역), <로미오와 줄리엣> (1968)
줄리엣:
오 로미오, 로미오! 그대는 어디 있나요 로미오?
당신 아버지와 가문의 이름을 거부해주세요;
만약 그렇게 못하겠다면, 내게 사랑을 맹세해주세요.
그러면 나라도 더 이상 카풀렛이길 거부할게요.

출처: <로미오와 줄리엣>, 2막 2장
상황: 줄리엣은 가면무도회가 끝나고 자기 전 발코니에 올라와 로미오가 아래서 듣고 있는 줄 모르고, 로미오와 자신의 가문이 숙적이라는 사실에 낙담하며 독백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인공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나이가 어린 주인공들인데 줄리엣은 작품상 여러 번 13~14세라고 명시가 되며, 로미오는 정확한 나이가 정의되어 있지는 않지만 사회적 통념상 줄리엣과 사랑에 빠질 수 있는 나이 차이, 즉 20세 아래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셰익스피어가 이렇게 어린 나이의 주인공들을 등장시킨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마 그들이 느끼는 사랑의 감정이 그들의 행동을 극적으로 몰고 가는 서사에 개연성을 부여시키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된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유명한 가면무도회에서 만나 첫눈에 반하고, 그들이 결혼을 약속하고 예식을 올리고, 독약을 먹고 죽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4일에 불과하다. 이러한 극적 변화에 관객들이 공감하기 위해서는 주인공들의 나이가 어려야 한다. 개인적 편차는 있겠지만 연애라는 감정에 첫눈을 뜨게 되고 상사병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불타오르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은 보통 10대 중반이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두 주인공들을 보면서 본인들의 10대를 생각하며 둘의 사랑을 공감하고 응원한다.


하지만 주인공들의 나이는 작품 외적으로는 큰 문제를 가지게 되는데, 다름이 아니라 10대 배우들이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무리 없이 소화하기가 몹시 어렵기 때문이다. 단순히 대사를 외우는 것도 벅찬데, 소네트 운율을 살리고, 적절한 감정을 실어 연기하는 10대 남녀 배우가 심지어 첫눈에 반한다는 전개가 개연성을 가질 정도로 뛰어난 외모도 동반해야 한다. 때문에 제페릴리 감독의 영상화 이전 <로미오와 줄리엣>은 주연 배우들의 나이가 대부분 적어도 20대 이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1968년, 제페릴리 감독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다름이 아니라 이 작품의 영상화 중 남녀 주연배우가 실제 주인공들의 나이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인기를 몰았다. 개봉 당시 로미오 역할의 레너드 위팅은 18세, 올리비아 핫세는 17세였는데, 이들의 뛰어난 비주얼은 셰익스피어라면 질색을 하던 청소년 관객들에게 <로미오와 줄리엣>의 본질, 즉 셰익스피어 작품 중 유일하게 "하이틴 로맨스" 장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20세기 최고의 명반 중 하나로 꼽히는 라디오헤드의 OK Computer의 수록곡 Exit Music (For a Film)은 톰 요크가 13살에 제페릴리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관람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톰 요크는 그 영화를 보고 엄청나게 울었으며, "둘이 동침한 다음날 아침 도망가지 않은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라고 술회한다 (출처). 물론 원작 각본에서 반 가까이 되는 분량을 잘라냈지만, 원작의 대사를 그대로 살린 상태에서 13세의 소년에게 이러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은 제페릴리 감독의 연출 방향이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1968년 제페릴리 감독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든, 1996년 바즈 루어만 감독의 <로미오+줄리엣>이든, 이 작품을 감상하러 영화관으로 몰려간 청소년들이 이야기와 그 결말을 모르고 보았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주연 배우들의 뛰어난 외모와 아름다운 무대, 의상과 화면은 누구나 알고 있을 대사와 이야기들이 영상에서 현실화되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정확히 사랑에 빠지는 순간, 발코니에서 키스를 하는 순간, 줄리엣이 죽은 로미오를 따라 함께 자살하는 순간 느껴지는 감성을 극대화시키게 만든다. 이 경우, 1968년의 올리비아 핫세, 또는 1996년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외적 매력은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더 비극적으로 만드는데 일조하게 된다.


10대 때만큼 사랑이 전부이고, 그 사실이 직관적이고 직접적으로 와 닿는 시기는 다시는 오지 않기에, 제페릴리 감독은 셰익스피어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오히려 경험이 없는 10대 배우들을 통해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될 것이라고 판단했고, 로저 이버트 또한 만약 두 배우가 1, 2년만 연기 경력이 더 길었어도 오히려 그 풋풋함을 연기 속에 함유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동의한다 (출처).


비극의 본질

올리비아 핫세 (줄리엣 역), 레너드 위팅 (로미오 역), <로미오와 줄리엣> (1968)
에스칼루스 공작:
이 아침은 비통한 평화와 함께 왔구나,
태양도 슬퍼하기에 머리를 비추지 않고 있으니.
자, 가서 이 슬픈 이야기를 더 하자꾸나,
어떤 이들은 용서받고 어떤 이들은 죗값을 치르리.
지금까지 이보다 슬픈 이야기는 없었음을,
기억하자, 줄리엣과 그녀의 로미오를.

출처: <로미오와 줄리엣>, 5막 3장
상황: 로미오와 줄리엣의 동반 자살 이후, 그들을 추도하는 베로나의 공작.


각본을 읽거나, 연극을 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로미오와 줄리엣>의 엔딩을 경험한 모든 관객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한 가지 공통적 감정은 안타까움이 아닐까. 끊겨 있는 선로를 달려가는 기차를 보는 것처럼 관객들은 지속적으로 이야기가 어디를 향하는지 알고 있음에도 제발 그 방향으로 가지 않기를 바라고, 본인이 알고 있는 대로 끝났음에도 두 어린 연인의 비극적 결말에 안타까워한다. 이는 어떻게 보면, 마치 자기 전 냉장고를 계속 열어보는 행위와도 비슷한, 모순적인 행동일 수도 있다. 왜 바뀌지 않을 결과에 대해 안타까워하는가.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물론 그 대상이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고대 아테네의 비극이기는 했지만, 관객들은 아에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관람하면서 인간에게 메워진 굴레에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고통 속에 있는 인간의 심연을 받아들임으로 비극을 인간의 생에 관한 긍정으로 승화시킨다고 주장했다. 그가 아폴론적이라고 칭하는 예술은 현생의 어둠을 빛으로 덮으려 했지만,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을 통해 현실에 존재하는 고통을 기쁨과 같은 긍정적 자세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정신적 노예를 묶고 있는 사슬을 끊는 해답이었던 것이다.


니체는 서양 예술이 고대 아테네의 비극에서 이미 정점을 찍었으며, 그 이후로 리하르트 바그너의 비극적인 오페라를 통해 부흥될 것이라는 주장을 전개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서사에 셰익스피어가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이 의아할 수밖에 없다. 아닌 게 아니라 니체가 <비극의 탄생>을 쓰기 위해 준비한 자료에는 셰익스피어에 대한 언급이 존재하며, 셰익스피어가 "소포클레스의 현신"이며 "우리 시대의 과업은 우리의 음악을 위한 문화를 찾는 것"인데, 역사상 유일하게 셰익스피어만이 그 작업을 성공적으로 해냈다고 평가한다 (출처).


<로미오와 줄리엣>를 관람하는 경험이 니체가 이야기하는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을 통한 자기 긍정인지 판단하는 것은 관객 개개인에게 맡겨야 하겠지만 비극적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젊음을 처절한 아름다움으로 연출한 제페릴리 감독이 어느 정도 포괄적인 범위에서 이러한 사상을 수용했으리라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다. 50년이 지난 후에 보아도 이 영화의 미적 감각에는 가감할 부분이 보이지 않는다. 첫 연기였기에, 10대였기에 가능했다는 평가를 받는 아름다운 올리비아 핫세와 레너드 위팅, 감각적으로 그들을 영상에 담아낸 파스콸리노 드 산티스 촬영감독, 건강한 성적 매력을 담은 의상과 미술, 이 모두는 그 비극을 극대화시키는데 시너지를 내고 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컨택트(Arrival)>를 연출하면서 원작인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벗어나는 몇 가지 결정을 내렸는데,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가장 가장 큰 차이점은 다음 대사에 있다.


에이미 애덤스 (루이스 뱅크스 역), <컨택트(Arrival)>, 2016


처음부터 나는 목적지를 알고 있었고, 그에 따라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나는 과연 환희의 극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고통의 극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최소를 이룰까, 아니면 최대를 이룰까?

출처: <Story of Your Life>, Ted Chiang


여정을 알고 있고… 목적지를 알고 있음에도…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모든 순간을 환영한다.

출처: <컨택트(Arrival)>, Denis Villeneuve


이 대사들이 각각의 작품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고 비교하기 위해서는 소설의 완독과 영화의 관람을 요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면서 문득 이 대사들이 다시 떠올랐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들의 사랑이 파국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알고 있었다. 무덤에서 죽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약을 먹은) 줄리엣을 본 로미오가 내릴 수 있었던 결정은 그녀를 죽음으로 따라가는 것뿐이었다. 자신을 따라 죽어있는 로미오를 본 줄리엣이 선택할 수 있는 길 또한 그와 죽음에서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 순간을 슬픔이 아니라 당연한 길로 받아들인다. 죽음과 비극만이 자연스럽고 유일한 선택지였던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을 관람하는 모든 관객 또한 주인공들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그들은 끝이 정해져 있는 것을 모든 순간 인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들에게 다시 공감을 한다. 죽음만이 유일한 길임에도 불구하고 그 비극을 수 없이 여러 번 재경험하고, 비극이 끝나면, 그때마다 다시 안타까워한다.


셰익스피어 영상화 한줄평:

빠르게 불타올라 아름답고 위험한 청춘의 사랑을 그려냈기에 불멸의 작품이 되었다는 아이러니 마저도 예술




맺는 말: 번역에 관하여

셰익스피어 작품의 일부분을 직접 한글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셰익스피어 작품은 약강 5보격(iambic pentameter)이라 불리는 운율을 지닌 운문(verse)인데, 운율까지 살리지는 못하지만, 최대한 행바꿈을 지킨 형태로 번역합니다.

MIT에서 호스팅 하고 있는 셰익스피어 원서를 번역 대상으로 사용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 원서: http://shakespeare.mit.edu/romeo_juliet/full.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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