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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bert 이홍규 May 11. 2020

[원서 서평] 『곧 도래할 왕』, 도로시 더넷

맥베스와 토르핀, 역사와 야사

20세기 후반에 활동하고 2001년에 작고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작가 도로시 더넷은 한국인 독자에게는 생소한 이름일 수도 있지만 (심지어 영문학 외에서는 주류 작가로 평하기도 힘들지만), 더넷이 1961년부터 1975년 사이 발표한 《라이몬드 연대기 (Lymond Chronicles), 1986년부터 2000년 사이 발표한 니콜로 가문사 (House of Niccolo)로 이어지는 장대한 연작 역사소설군은 치밀한 고증과 영문학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유려한 필력으로 소규모의 결속력 강한 팬덤을 양산해 냈다. 현재 판타지 문학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가이 가브리엘 케이를 위시한 많은 현대 작가들 또한 도로시 더넷에게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하기도 한다 (출처).


더넷에게 유명세를 안겨준 작품 라이몬드 연대기(총 6권)와 니콜로 가문사(총 8권)는 각각 16세기 중반과 15세기 말의 유럽 전역을 배경으로 한 거대한 스케일의 역사 활극이지만, 정작 작가 본인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작품은 1권으로 완결된 장편 소설 『곧 도래할 왕 (King Hereafter)』이다 (출처).


4부로 이루어져 700페이지가 넘어가는 이 대하소설은 동명의 셰익스피어 연극으로 유명해진 11세기 초반 스코틀랜드를 다스린 역사적 왕 막 베하드, 즉 맥베스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소설의 제목 또한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마녀의 대사인 “All hail, Macbeth, that shalt be king hereafter! (맥베스 만세, 곧 도래할 이시어!)”에서 가져왔는데, 이 제목 및 몇 가지 소소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더넷의 맥베스(Macbeth, 역사상 막 베하드)는 셰익스피어가 그린 비극의 맥베스와는 완벽하게 다른 인물로 그려진다.


더넷은 『곧 도래할 왕』의 집필을 위한 조사 중, 스코틀랜드의 왕 맥베스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오크니의 바이킹 영주 용맹한 토르핀(Thorfinn the Mighty)이 동일한 인물이었다는 가설을 세우고 이를 토대로 소설을 전개해 나간다. 참고로 이 둘이 동일한 인물이라는 가설은 주류 역사계에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지만, 더넷은 두 인물이 비슷한 시기에 로마를 방문하여 교황과 접견했다는 역사적 기록 및, 동시대에 바로 인근 지역에서 활동했음에도, 둘 중 한 인물을 다룬 기록에는 다른 이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더넷의 대담한 가설은 작품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이 대부분 치밀한 역사적 고증 위에 묘사되었다는 점과 더불어 이미 역사의 흐름을 알고 있는 독자에게도 이러한 시점을 감안해 본 경험이 없기에, 진행을 예측하기 어렵게 만들어 소설적 흥미를 더한다.


알바(스코틀랜드의 옛 이름)의 왕 말콤의 손자이자 왕국의 후계자 던컨의 이부형제인 토르핀은 부친 시구르드의 죽음 이후 모친인 베호크가 던컨의 부친과 재혼하자, 시구르드의 가신인 토르켈의 아래에서 바이킹으로 자라난다. 꺽두룩한 키와 인상적일 정도로 못생긴 외모를 가진 토르핀이었지만, 큰 키가 주는 무력과 비상한 두뇌를 바탕으로 뛰어난 지도자로 성장하게 된다. 오크니 영주가 된 그는 머리(Moray) 영주와의 전쟁에서 승리 후 그의 아름다운 미망인 그로아(Groa, 역사 그루오크)를 아내로 맞는다. 이는 그로아가 스웨덴의 유력 바이킹 군주인 핀 아르나손의 딸이기 때문에 내려진 전략적 결정이었지만 그로아는 토르핀의 예상과는 달리 대단히 지혜롭고 당찬 여성이었으며, 냉랭하게 시작된 부부의 관계는 짧지만 정곡을 찌르는 대화 및 배려를 통해 차츰 발전하기 시작한다.


토르핀/맥베스의 묘사를 읽고 바로 떠올린 배우, 애덤 드라이버 (Photograph: The Man Who Killed Don Quixote)


소설의 내용은 맥베스와 토르핀 두 역사적 인물의 행적을 위화감 없이 합쳐 진행되지만 더넷은 여기에 생동감을 부여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문학적 장치를 사용하는데,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그녀가 인물의 시점을 사용하는 방법이다.


소설은 지리적, 시간적으로 철저하게 토르핀의 삶을 따라가지만, 독자가 그의 시점에서 사건을 보거나 생각을 듣게 되는 일은 거의 없다. 작가는 대부분의 시점을 해당 사건에서 토르핀의 주위에 있는 인물들의 눈을 통해 그의 행동을 조명한다. 라이몬드 연대기와 니콜로 가문사에서도 사용되는 이러한 문학적 기법은 독자가 처음 소설을 시작하게 되면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작품이 진행될수록 그녀의 문장력에 찬사를 보내게 만든다.


하나의 주인공을 조명하는 3인칭/선택적 전지 시점은, 엄연히 주인공이 존재하는 소설 구조 안에서도 군상극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그의 아내 그로아, 평생의 친구인 술리엔, 대부 토르켈 포스트리, 아이슬란드 전사 이슬레이프르, 조카이자 라이벌인 로근발드 등 주변 인물들에게 입체성을 부여하고 독자가 쉬이 특정 인물을 응원할 수 없게 만든다. 이는 소설의 전반부를 이끌어가는 토르핀과 로근발드의 애증 섞인 관계 및 그 둘의 치열한 전투를 흥미롭게 만드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


토르핀의 시점이 자주 나오지 않음으로 독자는 그의 계획, 사상, 감정 변화에 대해 지속적으로 추리하고 집중해야 한다. 이는 이 작품이 이미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의 행적을 따라가는 역사 소설임에도 전개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들고, 시작과 끝은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그 끝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 미스터리를 더한다.


실제로 소설에서 토르핀은 등장인물 중 가장 뛰어난 두뇌 및 판단력을 보여주지만, 독자 또한 그가 사건을 계획하는 시점에서 배제가 되기 때문에 토르핀의 계획이 성공적으로 실행이 되면 등장인물들과 비등한 수준으로 놀라운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


머리(Moray)의 모르군드가 말했다. ‘그는 룰라크의 결혼식부터 이 것을 계획하고 있었던 거야.’
투아탈 수도원장이 말했다. ‘우리를 하나의 나라로 만들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이 것을 계획하고 있었던 거지.”
머리의 모르군드는 탄식 했다. ‘하나님 용서하소서, 저는 이 왕이 좋습니다.’

3부 6장


이러한 문학적 장치 외에도 더넷은 영문학에서도 비교를 할만한 작가가 딱히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수려한 문장력을 자랑하는데, 그녀의 섬세한 묘사가 가장 생동감 있게 살아나는 부분이 바로 그로아와 토르핀의 관계가 발전하는 과정이다. 소설은 시작부터 수많은 인명과 지명을 툭툭 던진다. 만약 중세 스코틀랜드 및 바이킹의 역사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다면 인물의 역사적 중요도나 장소의 전략적 가치를 이해하기 힘들다.


이 와중, 토르핀과 그로아의 첫 만남, 그가 그녀를 단순히 자신의 아들을 낳기 위한 도구로 대하는 모습은 그로테스크할 정도로 뒤틀려져 있다. 하지만 이러한 만남 중 촌철살인과도 같은 대사가 오가며 서로에 대한 존중이 깊어지고, 1부 마지막 토르핀과 그로아가 만들어내는 육체적, 정신적 교감은 기다린 시간만큼 커다란 감동을 선사한다.


그녀는 손을 로브 안쪽에 넣은 채 그의 앞에 선 채로 말했다. ‘만약 당신이 제게 그 말을 하는 순간이 왔을 때 만약 그것이 거짓말이라면 알아차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만약 거짓말이 아니라면 절대로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리라 생각했지요. 만약 내가 당신에게 그 말을 한다면 아마 당신이 단순히 예절 정도로 받아들이고 약간 고마워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도대체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신을 보면 당신을 믿게 돼요. 만약 내가 당신께 같은 말을 한다면, 나를 믿어주실 건가요?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을 항상 사랑했어요… 심지어 6분 동안… 아니, 4분 동안이라도… 우리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던지 상관없이 말이에요.’

1부 21장


더넷은 건조한 역사적 사건 나열 사이에 토르핀과 그로아의 따뜻한 사랑 이야기를 배치하여 독자에게 둘의 대화 장면과 톡 쏘는 위트를 기다리게 만든다. 토르핀은 또한 아내 앞에서를 제외하고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절대 웃지 않으며,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음울한 조소로 가득 차 있지만, 그로아와 단 둘이 있는 순간만은 완전히 진실된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연유로, 더넷의 그로아는 셰익스피어의 레이디 맥베스와는 완전히 차별되는 독자적 인물상을 구축하고 토르핀과 독자 모두에게 정서적 지침돌의 역할을 하게 된다.


도로시 더넷 (Photograph: Martin Argles/The Guardian)


젊은 사변소설 작가 알라야 던 존슨은 NPR에 더넷에 대한 찬사를 기고하였는데 (출처), 가이 가브리엘 케이의 언급을 빌려, 더넷 소설에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은 등장인물들의 지적 수준을 향상해도 된다는 자유라고 고백한다.


더넷의 등장인물들은 실생활의 대화처럼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주제를 가지고 각자 공개하고 싶은 만큼의 정보를 치밀하게 계산하며 전달한다. 등장인물들의 지적 수준을 올리는 것은 단순히 이들에게 입체성을 부여하는 장치 이외에도 독자에 대한 존중으로 보이기도 한다.


더넷은 쉬운 소설을 쓰기를 거부한다. 하지만 독자가 더넷의 작품을 읽으며 느끼는 난이도는 그 작품을 완독했을 때 느끼는 카타르시스와 정비례한다. 주관적인 평가가 될 수밖에 없지만 도로시 더넷의 작품들은 20세기의 고전이며, 작가는 몇 세기 후에도 20세기 역사소설의 대가로 기억 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상해본다.


『곧 도래할 왕』의 마지막이 몇 장 남지 않았을 때, 800페이지에 가까운 이 소설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을 읽기 시작하기 전부터 역사가 어떻게 흐를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진중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역사적 서사를 읽으며, 어느새 그 이면의 야사 인물 중 하나가 된 독자는 11세기 스코틀랜드와 토르핀/맥 베하드를 떠나야만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덧. 서평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와 차별을 두기 위하여 막 베하드라는 국내 역사학계의 음차 표기를 기재하였지만, 더넷의 작품에서는 Macbeth로 등장하니 참고 바랍니다. 소설 내에서 작가는 주인공을 지칭할 때 Macbeth라는 기독교식 이름보다는 Thorfinn이라는 바이킹식 이름을 더 자주 사용합니다.]


(끝)


『King Hereafter』(1982), Dorothy Dunnett

https://www.goodreads.com/book/show/958158.King_Hereaf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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