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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bert 이홍규 Jun 01. 2020

[원서 서평] 『행진북』, 루이스 라무르

미국의 뒤마, 루이스 라무르의 유일한 중세 유럽 역사활극

루이스 라무르(Louis L’Amour)는 2020년 한국에서는 생소한 미국 작가이다. 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왕성하게 활동한 라무르는 당시 가장 유명했던 대중문학 작가 중 한 명이자, 서부를 무대로 한 펄프 장르에 이름을 남겼는데, 그의 장단편 소설 대다수가 할리우드의 황금기에 TV 시대극이나 영화로 만들어져 활동 당시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다.


라무르의 서부극 소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새켓(Sackett) 가문의 다양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새켓 시리즈》로, 단편, 중편, 장편 소설을 모두 포함하여 20개가 넘는 작품들이 있는데 아직도 많은 팬들이 있을 정도로 미국 초기 개척 정신의 정수를 담아낸 드라마로 평가받는다.


12세기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한 모험 활극, 『행진북 (The Walking Drum)』은 시대적 배경 때문에 루이스 라무르 작품군에서 가장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84년에 출판된 『행진북』은 이미 당시 76세의 고령이었던 작가의 새로운 시도였으며, 완숙된 문체와 방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중세의 유럽과 중동을 질주하는 주인공 마투린 커보샤드의 굴곡진 인생을 생동감 넘치게 담아낸다.


브르타뉴 지방의 켈트족 소년 마투린 커보샤드는 호족의 우두머리이자 해적인 부친에게서는 항해술과 무기술을, 드루이드인 모계로부터는 의술을 배우는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소년 시절을 보내지만 아버지인 장 커보샤드가 탄 배가 난파당하자마자 그의 정적들에게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긴다. 도망치던 중 다른 해적에게 붙잡혀 갤리선의 노예가 된 그는 카디즈에서 기지를 발휘해 탈출하고 부친이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무슬림 스페인의 중심지인 코르도바로 향한다.


유럽과 아랍의 문화와 지식이 모인 코르도바에서 마투린은 패기 어린 소년에서 뛰어난 전사이자 지식을 자랑하는 명사로 성장하지만, 권력을 향한 정치적 암투에 휘말려 코르도바를 탈출한다. 그는 카라반 상단의 일원이 되어 파리, 키예프,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향하게 되고,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마침내는 페르시아 제국까지 도착한다.


『행진북』에서 마투린 커보샤드가 거치는 여정의 순서를 표시한 12세기 중세 유럽의 지도


소설이 담고 있는 지정학적/문화적 범위는 이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 중에서도 상당히 넓은 편에 속하기 때문에 마투린의 인생은 마치 무협 소설과도 같은 활극처럼 읽히다가도 무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배경을 소개하기 위하여 역사서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이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인데, 1인칭으로 진행되는 소설의 특성상, 처음 도착하는 도시와 국가의 역사를 객관적이고 비편향적인 시선에서 술술 읊는 주인공의 서술을 읽다 보면 마치 시간 여행을 해 중세 유럽에 도착한 현대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작가는 이러한 주인공의 배경지식이 당위성을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서사 장치를 준비하지만 (마투린의 성장 배경, 그가 읽는 책들), 활극과 역사 서술을 매끄럽게 융합시키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500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은 길다면 길 수도 있겠지만, 유럽, 무슬림 스페인, 키예프 루스, 비잔틴 제국, 페르시아 제국이라는 배경을 모두 담기에는 지나치게 부족할 수도 있다. 때문에 마투린이 각 도시와 문화권에서 맺게 되는 인간관계는 휘발성이 강하고, 후에 다시 만나게 되는 인물들 또한 입체성이 결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베스트셀러 작가를 놓치지 않은 작가의 필력을 통해 역사적 고증과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의 카메오, 펄프 소설 특유의 장르적 재미, 그 사이에 녹아있는 작가 특유의 보수적 개척정신을 성공적으로 버무려 냈다. 이 작품 하나만으로 라무르라는 작가를 미국의 뒤마와 같은 대중문학 작가라고 평하게 될 정도로 그의 문체는 흡입력과 속도감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행진북』이라는 제목은 마투린이 카라반 상단 시절 키예프부터 콘스탄티노플까지 이르는 여정 중 들었던 카라반의 행진을 돕는 북소리를 의미한다. “우리는 행진을 하며 종종 노래를 했고, 언제나 행진 북소리와 함께 했다. 내 생의 모든 순간 그 북소리를 기억하게 될 정도로, 나라는 사람의 기질 가장 깊은 곳에 각인되었다. 행진의 북소리… 우리가 걷는 모든 걸음을 기록하는 무겁고 체계적인 타음. 그 북은 후열에 위치한 마차에 실려서, 행진의 속도를 빠르거나 느리게 조종하는 역할을 했다. 우리 모두는 그 고동 속에 살았고, 우리 상단과, 우리를 따르는 다른 상단 전체를 아우르는 맥박의 역할을 했다.”


라무르는 초원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상단이 체계를 갖추고 움직이기 위해서는 북소리가 필요했을 것이라 상상했고, 그것을 카라반 전체에 혈액을 공급하는 심장으로 묘사했다. 이는 책을 관통하는 주제인 개척과 도전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주인공 마투린은 분명히 부와 명예 모두를 가지고 태어난 행운아지만 그의 굴곡진 인생은 그가 조금이라도 편해질 때마다 가진 모든 것을 빼앗고 새롭고 적대적인 환경으로 내몬다.


때문에 마투린은 지식과 신체적 우위를 누구도 강탈해 갈 수 없는 자산으로 평가하며 홀린 사람처럼 독서를 하고 사상 체계를 견고히 쌓는다. 그의 삶을 지속해 가는 것은 어떠한 부귀나 명예, 위치라는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고,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는 형이상학적 욕구에 가깝다. 바로 이것이 마투린의 심장이며, 그의 드럼 소리다.


(끝)


『The Walking Drum』(1984), Louis L'Amour

https://www.goodreads.com/book/show/327548.The_Walking_D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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