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먼저 접하고 관람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듄〉(2001)에 관한 자세한 생각은 「대서사극, 사막의 시」에 별도로 올렸습니다.
프랭크 허버트의 1965년 SF소설 『듄』은 출간 후 50년이 넘게 지났지만 아직도 SF 장르에서는 넘을 수 없는 고전과도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 어떻게 보면 판타지 소설계에서 『반지의 제왕』이 차지한 위치와도 비견될 수 있는데, 『반지의 제왕』이나 『듄』은, 물론 작품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오히려 그 작품이 끼친 영향이 더 유명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2000년대 초반,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 모두 성공적으로 영상화가 된 『반지의 제왕』의 경우, 책을 읽지 않은 사람도 내용을 대부분 알고 있으며, 때문에 『반지의 제왕』이 현대 환상 문학에 끼친 영향은 어느 정도 대중의 의식 저변에 깔려있다.
폴 아트레이드(카일 맥라클란), 〈사구〉(1984)
『듄』은 그보다 훨씬 이른 1974년, 컬트 영화계의 거장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의 연출로 영화화 프로젝트에 돌입했지만 14시간 분량의 대본으로 투자자를 찾지 못하고 제작 중단에 이른다. 10년이 지난 1984년, 또 다른 거장 데이빗 린치 감독의 주도로 새로운 영상화를 야심 차게 시작했지만, 린치 감독은 배급사와 제작사의 과도한 개입에 학을 떼고 최종 영상을 포기해 버렸다. 물론 이 영상화도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곧 유명한 컴퓨터 게임 시리즈로 컨버팅 되어 스타크래프트 같은 현대의 유명 프랜차이즈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하지만 SF 팬들에게 있어 『듄』의 완전한 영상화는 일종의 성배 탐색과도 같은 프로젝트였다.
『반지의 제왕』의 성공 이후 판타지와 SF 영화가 단순히 장르 팬들 뿐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을 극장으로 불러 들일 수 있는 거대한 세계관을 구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할리우드는 『듄』의 영상화를 다시 논의 하기 시작했다. 듄의 판권을 가지고 있었던 파라마운트는 2008년, 〈프라이데이 나잇 라이트〉(2004)의피터 버그나 〈13구역〉(2004), 〈테이큰〉(2008)을 연출한 피에르 모렐 감독과 제작 논의를 했지만, 2011년 제작 중단이 되어 팬들을 아쉽게 만들었다. 그 후 2016년, 레전더리에 의해 다시 영상화 판권이 복구되었는데, 프로젝트에 붙은 드니 빌뇌브 감독의 이름은 SF 팬들 모두를 흥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드니 빌뇌브 감독, 〈듄〉(2021) 포스터
드니 빌뇌브 감독은 2016년에는 테드 창의 SF 걸작 단편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 (Story of Your Life)」를 〈컨택트(Arrival)〉(2016)로 성공적으로 영상화하였으며, 이듬해에는 클래식 SF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후속작 〈블레이드 러너 2049〉(2017)를 완벽하게 연출해내며 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2020년 전 세계의 SF 팬들은, 개봉을 앞두고 있는 드니 빌뇌브의 〈듄〉이 반세기 넘게 SF 팬들의 견고한 지지를 얻고 있는 소설 『듄』에 다시 한번 생기를 불어넣어 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데이빗 린치, 드니 빌뇌브 같은 거장들이 끊임없이 영상화를 시도해온 『듄』은 그 작품을 둘러싼 이름들이나 SF 장르에서 가진 명성 때문에 형이상학적이고 난해한 작품으로 인식되기 쉽지만, 『듄』을 실제로 읽어보면 다른 무엇보다 그 세계관의 매력과 흡입력 있는 이야기에 먼저 놀라게 된다.
15살의 소년 폴 아트레이드는 어머니 제시카와 함께 아버지 레토 아트레이드 공작을 따라 정든 고향을 떠나 사막 행성 아라키스로 이주한다. 아라키스는 전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으로 불리는 향신료이자 마약인 스파이스의 최대 생산지로, 레토 아트레이드는 스파이스 생산을 통해 가문의 부흥을 꿈꾸지만, 사실 그의 아라키스 부임은 아트레이드 가문을 경계한 황제와 라이벌인 하코넨 가문의 합작 음모로 그는 도착한 지 얼마 안돼 암살당하고 만다. 폴과 제시카는 자신들을 쫓는 추격대에게 벗어나기 위해 아라키스의 원주민인 프레멘이라는 부족이 살고 있는 사막으로 도망가고, 그곳에서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힘을 기르기 시작한다.
폴 아트레이드(티모시 샬라메), 레이디 제시카(레베카 퍼거슨), 〈듄〉(2021)
폴의 어머니 제시카는 베네 게세리트라는 전우주적인 여성 종교집단의 일원으로, 어린 시절부터 아들 폴에게 베네 게세리트의 교육을 시켜왔는데, 폴은 사막에서 대량의 스파이스를 강제로 흡입하고 미래에 대한 예지력을 얻게 되면서 일종의 초인으로 각성한다. 폴은 지극히 인간적인 아버지와 가문의 복수라는 이유로 움직이지만, 본인의 복수가 성공하는 순간, 자신이 종교적 지도자가 되고 본인을 따르는 수많은 추종자들이 전 우주를 무대로 한 지하드, 즉 성전을 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하코넨 가문, 그리고 그 뒤에 있는 황제를 향한 칼을 갈면서도, 본인이 본 미래를 막을 방법을 찾기 위해 지독하게 고민한다.
『듄』은 표면적으로는 스테레오타입에 가까운 영웅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만약 『듄』을 읽지 않은 독자에게 줄거리를 “엘리트 교육을 받은 왕자가 사악한 적의 음모로 아버지를 여의고 황야로 도망가지만, 기연을 얻어 성장하고 자신을 따르는 새로운 세력을 이끌고 복수를 위한 전쟁을 시작한다”라고 무협소설마냥 설명한다면 작품이 받고 있는 찬사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듄』을 여타 영웅담과 다르게 만드는 것은 첫 번째로 프랭크 허버트가 만들어낸 매력적인 세계관, 특히 사막 행성 아라키스의 설정이다. 전 행성이 사막화되어 있기 때문에 아라키스에서는 오히려 다른 세계에서는 가장 비싼 사치품인 스파이스가 평범한 향신료로 사용되고, 대신 물이 가장 고급 자원으로 취급된다. 이러한 설정은 단순히 자원을 얻기 위한 등장 세력들의 행동 동기뿐만이 아니라 소설의 세부적인 부분에도 반영이 되어 있는데, 예를 들자면 사막 부족 프레멘들이 입는 스틸슈트(stillsuit)는 땀이나 오줌 등을 포함한 신체 수분을 자체적으로 정화하여 깨끗한 물로 바꿔주는 역할을 한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소중한 수분을 낭비하는 일이기 때문에 프레멘들은 타인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는 행위를 신성하게 여긴다.
이 작품을 읽은 많은 팬들은 우스갯소리로 꼭 물을 옆에 두고 읽어야 한다는 팁을 주는데, 책을 읽다 보면 그 갈증이 독자에게 피부로 다가올 정도로 사막의 분위기가 잘 구현되어 있다. 그 외에도 아라키스에만 존재하는 빌딩 크기의 지렁이 샌드웜의 존재로 대표되는 사막 행성의 생태계, 베네 게세리트 교단의 예언과 음모 등, 『듄』은 방대하면서도 치밀한 세계관 설정이 작가의 유려한 필체와 어우러져 독자를 끌어당긴다.
폴 아트레이드(티모시 샬라메), 〈듄〉(2021)
『듄』의 또 다른 매력은 그 줄거리가 가진 철학적 고찰이다. 프랭크 허버트 본인이 『듄』의 철학적 바탕에 대해 따로 설명한 정황은 없지만 폴 아트레이드의 일대기는 마치 프리드리히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떠올리게 만드는 부분이 여럿 존재한다.
소설은 고향인 칼라단을 떠나기 직전, 제시카를 찾아온 베네 게세리트 교단의 대모와 폴의 만남으로 시작되는데, 이 곳에서 폴은 본인의 어린 시절이 베네 게세리트 교단의 묵시록적인 계획 아래 설계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후 예지력을 가진 초인으로 각성한 폴은, 본인이 본 미래를 자신의 복수 계획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미래를 피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폴의 행적은 니체 철학의 근간이 되는 (정신적) 노예 도덕의 사슬을 끊기 위한 노력으로 해석될 수 있다. 니체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인간은 사회적 구조, 종교적 가르침 등 본인에게 주어진 외부적 개념, 그리고 그러한 개념이 주는 삶의 동기를 부정하고, 본인의 삶 그 자체를 긍정하고 삶의 쾌락 내에서 원동력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니체는 이러한 작업에 성공한 인간을 위버멘쉬, 즉 초인이라고 부른다.
프랭크 허버트는 『듄』에서 폴의 일대기를 통해 육체적으로는 실제 초인이자, 정신적 위버멘쉬가 구현되는 과정을 그린다. 하지만 그는 한 발짝 더 나아가 이러한 초인이 실제로 구현되었을 때의 영향력까지 다루고 있다.
소설에서 폴은 양립할 수 없는 패러독스와도 같은 개념을 양립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한다. 예를 들자면, 레토 아트레이드 공작의 적자, 폴 아트레이드는 프레멘의 예언에 존재하는 전설적 지도자인 무앗딥과 양립하기 힘들다. 아트레이드의 후계자는 가문을 부흥시켜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으나, 프레멘의 무앗딥은 프레멘들을 이끌어 아라키스를 비옥한 행성으로 바꾸어야 하는 의무를 달성하기 위해 고민한다. 두 의무를 양립하기 위하여 주변인들에게 본인을 “폴-무앗딥”이라고 불러달라 요구하지만, 그의 행동은 의도와 관계없이 그를 바라보는 주위 인물들에 의해 다르게 해석된다.
폴-무앗딥은 우주에서 손꼽히는 힘과 통찰력을 얻었음에도, 이 패러독스를 해결하지 못한다. 아트레이드의 아들 폴의 자아는 하코넨 가문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 하지만, 무앗딥의 자아는 그 복수를 위한 폭력의 자행이 결국 아트레이드-프레멘 군인들의 지하드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숙명을 깨닫고 절망한다. 일종의 해결 방안이라 생각했던 폴-무앗딥이라는 이름은 예정된 비극을 의미하게 된다.
작가는 니체 철학, 위버멘쉬의 존재에 대해 긍정하면서도, 그러한 초인이 실제로 존재하는 순간 그 또한 정신적 지도자의 위치에 이르기 때문에 위버멘쉬가 기껏 파괴했던 종교적 굴레가 다시 생긴다는 아이러니에 대해 이야기한다.
『듄』은 강렬한 시각적 상상력을 제공하는 매력적인 세계관을 통해 진부할 수도 있는 영웅의 이야기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그 기저에 초인 사상과 인류의 진화 방향에 대한 거시적인 고민을 철학적으로 풀어나간다. 또 다른 SF 거장인 아이작 아시모프 또한 비슷한 형태의 고민과 나름의 해답을 『유년기의 끝』을 통해 제시하는데, 이 두 작품을 비교하다 보면 재미있는 결론에 도달한다.
인류 역사에서, 급격한 사회적, 사상적 변화는 대부분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의 인도 아래 전개되었다. 영웅에 의지하는 것은 쉽다. 범인은 깊은 생각 없이 영웅의 뒤를 따르면 된다. 하지만, 어떠한 한 명의 영웅의 매력, 또는 무력에 의지하는 변화는 표면적이고, 이러한 변화가 사회 전체에 포괄적으로 적용이 되기 위해서는 결국 기존의 체계와 새로운 사상 간의 충돌 및 폭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진정한 시대의 변화는 고통 없이는 얻을 수 없지만, 그 고통을 수용하는 순간 인류는 하나의 낡은 굴레를 끊고 정신적 노예에서 귀족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덧. 이 포스팅에서 사용한 아름다운 듄 일러스트레이션은 2019년 출간된 Deluxe Edition에 포함된 오피셜 아트워크로, 아티스트 맷 그리핀(Matt Griffin)의 작품입니다. 전체 갤러리는 작가의 아트스테이션 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