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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bert 이홍규 Jun 28. 2020

[서평] 『말센스』, 셀레스트 헤들리

당연함을 낯설게 보기

너무 당연하기에 실생활에서는 그것이 존재하는지 잊고 지나가는 개념들이 있다. 소통, 그리고 더 세분화해보자면 사람이 언어를 사용해 상대방의 뇌에 나의 의사를 전달하고, 다시 그 의사를 이해하고 그에 따른 반응을 다시 언어를 사용해 내 뇌에 전달하는 과정, 즉 대화는 사람이 본인이 그 행동을 하고 있는지도 의식하지 못할 만큼 인간 사회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행동이다.


물론, 이 당연한 행동에 대하여 의식을 하고 개선을 하려는 시도도 존재하며,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사용한 소통과 대화라는 행위를 구조적인 언어철학적 접근으로 심도 깊은 사유에 도달하기도 했다.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온 철학서적이 모두 그렇듯이 현대에 화술을 다루는 모든 자기 계발 서적은 비트겐슈타인의 사유를 실생활에 적용하는 기획 서적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대화법을 주제로 TED 강연을 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인터뷰 전문 기자 셀레스트 헤들리의 『말센스』 또한 비트겐슈타인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지만 책에서 내리는 결론은 거의 동일하다 볼 수 있다.


셀레스트 헤들리 (Source: TEDxSeattle)


일반인이 대화라는 개념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기는 쉽지 않다. 물론, 현대에도 사업적, 경영적인 측면에서의 화술을 배우는 경우는 많지만 보통 성공적으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기술, 즉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는 쪽에 집중되는 경향이 크다. 하지만 셀레스트 헤들리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주제는 설득이라는 대화의 단편적인 목적보다는, 목적이 없는 일상의 대화와 잡담에 관한 내용 또한 포함하고 있다.


자기 계발 서적은 보통 독자 본인이 어떠한 주제에 관하여 부족함을 느끼고 개선을 위하여 읽게 되는데, 일반인이 본인의 잡담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싶다. 어떻게 보면 누군가가 나에게 “당신은 대화를 참 못해”라고 한다면 이는 “당신은 숨을 이상하게 쉬어”, 심지어는 “표정이 항상 이상해”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다. 반대로 누군가와 대화를 하였는데 묘하거나 답답한 결론으로 끝나고, 그 이유가 상대방의 대화방법이라고 생각된다면 이에 대한 지적은 거의 외모에 대한 핀잔과도 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즉, 일상 대화의 방법론과 그 개선에 대해 심도 깊은 고찰을 하기는 몹시 민망한 일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옳다, 틀렸다, 상대방이 옳다, 틀렸다고 결론 내리기도 힘들다.


하지만 이러한 일상 대화는 사회적 동물이라고 불리는 인간의 일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즉, 만약 본인의 대화 습관이 이상하다면, 이는 마치 평생 소파에서 자는 것과도 같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본인에게 이러한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본인의 대화를 녹음하여 객관적인 시선으로 들어보는 것인데, 최근에 애니메이션의 대본을 직접 쓰기 시작하면서 머릿속에 있는 대화를 글로 남기고 그 대화를 타인의 목소리로 들어볼 수 있는 기회가 (부담될 정도로 자주) 생겼다. 그리고 이러한 본인의 대화 내용들을 보면서 부족함을 느끼고 찾게 된 책이 『말센스』 였다.


평생을 유명인과 일반인 등, 상대방에게 말을 걸고 그 내용을 기록하는 인터뷰를 하며 살아온 저자는 『말센스』를 통해 이러한 당연한 당연한 대화를 낯설게 보기를 주문하고, 총 16가지의 방법을 제시한다. 16개라고는 하지만 이를 다시 3개 정도의 대주제로 정리해 보았다.  


“대(對)”: 대화에서 상대에 집중하기 (능동적 청취, 상대방의 경험을 내 경험으로 답하지 않기)

“화(話)”: 대화의 전반적인 흐름과 목적을 이해하기 (불필요한 디테일 감소, 목적지로 향하는 길을 확인)

“자(者)”: 대화를 방법론이 아니라 인본주의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기 (기교보다는 진정성, 정확도보다는 친절)


첫 번째 대주제는 대화가 기본적으로 2인, 또는 그 이상의 인원으로 구성되는 행위라는 점에서 시작된다. 많은 경우 대화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그에 관한 내 생각을 대답해 주거나, 그 반대의 경우로 이루어진다. 많은 이들은 이를 다음과 같이 진행시킨다.


상대: 저번 달에 프랑스 파리에 여행을 다녀왔어.
나: 나도 프랑스 재작년에 가봤는데! 진짜 지저분했어.


이 대화의 문제점은 써놓고 보면 쉽게 보인다. 상대가 원했던 것은 (아마도) 프랑스가 어땠는지, 또는 여행의 경위에 대한 추가 질문이었을 것이다. 이는 단순히 사실 정보 교환을 기반한 대화가 아니라 감정적 대화에도 적용될 수 있다.


상대: 할머니가 저번 주에 돌아가셨어.
나: 정말 안됐다. 나도 얼마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네 기분 알 것 같아.


내가 원하는 효과가 위로와 공감대 형성이었다고 하더라도, 상대가 원하는 응답은 (아마도) 상대와 할머니와의 관계가 어땠는지, 어떤 분이셨는지에 대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네 이야기가 끝났으니 그에 관계된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결국 상대의 상황에 대한 심도 깊은 고찰, 그리고 그에 관한 내 감상의 심도 깊은 고찰 두 가지 모두 이룩할 수 없다. 주의해야 할 부분은 셀레스트 헤들리가 질문만 하다가 대화를 끝내기를 주문하는 것이 아니다. 쌍방의 대화자가 이러한 자세로 대화에 임하면 누구 한 명이 대화의 공을 빼앗아 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넘어간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두 번째 대주제, 목적에 집중하라는 메시지는 굳이 이 책뿐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화술법에서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추가적인 설명은 필요가 없을 것 같지만 머릿속으로 들어온 생각을 그대로 흘려보내라는 교훈은 다시 한번 새겨듣게 되었다. 워낙 좋아하는 책과 영화가 많아 대화를 하다 보면 굳이 과시의 목적이 아니더라도, 의견에 무게를 더하거나, 그 재미에 대해 공유를 하고 싶다는 목적에 인용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만약 대화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굳이 필요 없는 행위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작가는 이 부분에서 “대화란 좀 과장하자면 상대방의 뇌를 나의 뇌와 접속시키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는데, 항상 대화에 대해 가지고 있던 추상적 이미지와 동일해서 깜짝 놀랐다.


마지막 대주제는 대화를 하는 나 자신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굳이 무언가로 묶기는 애매한 주제들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결국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어떠한 하나의 방법론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앞쪽의 두 대주제를 생활화할 수 있는 자세와 정신 상태를 유지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눈을 마주쳐라’, ‘추임새를 넣어라’ 같은 잔재주가 아니라, 진정으로 상대방의 눈빛이 궁금해 눈을 보고, 무의식 중에 “와”라고 진심으로 감탄하라는 내용들은 당연하게 들릴 수 있지만, 대화의 목적, 그리고 이 책의 목적이 “대화 실력의 향상”이 아니라 “대화를 통한 진정한 교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의 머리말에서 “아마 이 책은 이 책 속에 표현된 사고들을—또는 어쨌든 비슷한 사고들을—스스로 이미 언젠가 해 본 사람만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라고 시작하며 “무릇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들은 침묵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물론 책을 읽어가며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명료함”의 인과관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의 거대함에 대해 치를 떨게 되지만, 그가 머리말에서 내린 결론은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금언으로 받아들여도 손색이 없다. 또한 앞 쪽에서 말하는 추천 독자들의 자격 사유까지 더한다면 셀레스트 헤들리의 『말센스』의 결론과 동일하다.


(끝)


『말센스』(2019), 셀레스트 헤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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