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전 한마디. 『The Fall of Gondolin』은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판이 되지 않았지만, 아마 『곤돌린의 몰락』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이 서평에서 『곤돌린 낙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환 중 지금은 소실되어 읽어볼 수 없는 『Iliupersis (The Sack of Ilium)』를 『일리오스(트로이) 낙성(落城)』이라고 번역한 경우를 읽은 적이 있는데, 성의 몰락을 표현하는 "낙성"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고풍스럽고 낭만적이라 생각했습니다. 곤돌린의 숙명이 트로이의 마지막 날과 겹쳐보이는 구석이 있어 이 서평에서만은 『곤돌린 낙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미려한 문장이 많기에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인상적인 구절들을 부족한 실력으로나마 몇 개 번역해 보았습니다. 미래에 한국에서도 출판이 된다면 훨씬 뛰어난 전문가가 아름답게 번역해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크리스토퍼 톨킨
크리스토퍼 톨킨 [출처: Josh Dolgin, The New York Times]
2020년 초반에 타계한 크리스토퍼 톨킨은 어쩌면 문학사에서 가장 독특한 직업을 가졌던 사람이 아닐까 싶다. 물론 크리스토퍼 톨킨 전에도 위대한 창작자의 자녀로 태어나 선대의 작품 및 저작권을 관리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던 이들은 많았지만, 크리스토퍼 톨킨은 그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부친인 J. R. R. 톨킨의 미출간 작품들을 편집하고 세계관을 정리하여 부친의 타계 후에도 반 세기에 가까운 시간 동안 가운데땅의 역사를 다룬 『실마릴리온』 및 그를 기반으로 한 『후린의 아이들』, 『베렌과 루시엔』 등의 소설을 출판해냈다.
다만 『반지의 제왕』이나 『호빗』만을 읽어본 독자들은 크리스토퍼 톨킨이 편집자로 출간한 작품들을 읽게 되면 당황하는 경우들이 있다. 『실마릴리온』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연대기, 역사서의 형태로 출간되었고, 『후린의 아이들』, 『베렌과 루시엔』은 실제 책에서 소설이 차지하고 있는 분량이 크리스토퍼 톨킨의 해설이 차지하고 있는 분량과 비등할 정도라서 이것을 순수 문학으로 보아야 하는지 고민이 될 수가 있다.
『실마릴리온』을 기반으로 한 소설군의 특이한 형태는 크리스토퍼 톨킨이 부친의 작품들을 역사학자와 같은 방법론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그는 가운데땅의 이야기를 (부친의 머릿속에 존재했던) 실제 역사로 대하고, 부친이 남긴 다양한 미완성 원고를 같은 역사를 다루었지만 세부적인 부분에서 상충하는 기록으로 다룬다. 다시 말하면, 크리스토퍼 톨킨은 부친이 남긴 미완성 원고를 직접 완성하여 출간한 것이 아니라, 같은 내용을 다룬 여러 개의 원고 중, 출판이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수준의 원고들을 모아, 교정 및 편집만을 진행한다. 이는 J. R. R. 톨킨의 사후에도 그의 글이 원본에 가까운 형태로 대중에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애정표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 사람의 상상력을 역사화시킨다는 굉장히 특수한 작업에 보편성을 더하는 장치가 되었다.
때문에, 크리스토퍼 톨킨은 부친 사후 출간된 모든 작품에서 공동 저자가 아니라, 편집자로 등재되어 있으며, 본인 또한 편집자의 위치를 고집했다. 본인 또한 옥스퍼드 영문학 박사학위가 부끄럽지 않은 아름다운 문장력을 가지고 있지만, "창작"에 대해서는 부친의 글과 자신의 글을 섞는 것을 병적으로 거부하였다. 그는 부친의 작품에 대해서는 순수주의자(purist)였으며, 오직 부친의 글이 부친이 원하던 온전한 형태로 세상에 공개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다.
J. R. R. 톨킨은 생전 자식들에게 남겼던 편지, 아내 이디스 브랫 톨킨에 대한 사랑으로 집필한 『베렌과 루시엔』, 그리고 크리스토퍼 톨킨 본인의 회고에서 나타나듯이, 그의 작품의 원동력 중 큰 부분을 "가족애"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모범적인 가정생활로 유명한데, 어쩌면 아들 크리스토퍼 톨킨이 부친의 작품에 대해 보여주는 경외심 또한 아버지에 대한 인간적인 존경심과 애정에 기반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크리스토퍼 톨킨 본인이 그 누구보다 열성적이고, 심지어 순수주의적인 톨키니스트라는 사실은 『반지의 제왕』을 사랑하는 모든 팬들에게는 축복이다.
『실마릴리온』
『실마릴리온』 커버아트, (左) Mariner Books, (右) HarperCollins, Illustrated Edition [출처: Amazon]
1973년, J. R. R. 톨킨의 타계 후, 아들 크리스토퍼 톨킨은 부친 생전 나누었던 대화를 기반으로 아버지의 수많은 미완성 원고들을 모아 하나의 통일된 작품으로 출간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단순히 취합 및 편집으로 치부하기에는, 컴퓨터나 워드 프로세서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에 쓰인 이 원고들은 말 그대로 종이의 형태로만 존재하였기에 크리스토퍼 톨킨의 작업은 상상외로 험준한 언덕을 넘어야만 했다.
크리스토퍼 톨킨은 이러한 원고를 정리하기 위하여 스무 살의 대학생을 편집 보조로 고용하였는데, 재미있게도 이 대학생, 가이 가브리엘 케이(Guy Gavriel Kay)는 10년 후 환상문학 장르에서 손꼽힐 정도로 충격적인 데뷔를 한다. 가이 가브리엘 케이는 2020년 현재까지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데, 많은 환상문학 팬들이 현재 살아있는 작가 중 군계일학의 문장력을 지녔다고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어쩌면 가이 가브리엘 케이가 20세라는 젊은 나이에 영문학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썼다고 평가되는 J. R. R. 톨킨의 작품을 통해 창작에 입문했기에 이런 필력을 개발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봄직 하다.
앞서 말했듯이 『실마릴리온』은 『반지의 제왕』과 『호빗』의 무대가 되는 가운데땅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총 3개의 큰 시대로 나누어진 이 역사에서 『호빗』과 『반지의 제왕』은 가장 후대인 제3시대의 종말 부분에 위치해 있다. 『반지의 제왕』을 읽으며 그 거대한 세계관에 전율했던 팬들은, 『실마릴리온』에서 신화적인 장엄함을 지닌 제1시대의 역사와, 그리스 비극과도 같은 제2시대의 역사를 읽으며 톨킨의 머릿속에 존재했던 세계관에 열광하고, 흡수하며, 재생산해냈다. 이들은 자신들을 톨키니스트라고 부르며, 세계관에 존재하는 인공언어인 퀘냐와 신다린을 배우거나, 학문적인 면에서 톨킨의 작품을 분석하였는데, 2020년에 와서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같이 당연하게 생각되는 상상의 세계관에 대한 첫 마니아 팬덤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러한 톨키니스트들의 지속적인 지지 덕분에, 가운데땅 세계관은 톨킨의 사후에도 지속적으로 소비되었으며, 2000년대 초반, 환상문학 장르가 대중문화의 시대정신(zeitgeist)에 편입되는데 큰 역할을 했던 〈반지의 제왕〉 영화 3부작은 아들 크리스토퍼 톨킨이 『실마릴리온』을 출판하여 그 세계관을 확장시키지 않았다면 제작이 시작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실마릴리온』은 역사서와 같은 형태로 집필되었지만, 그 내용이 담고 있는 흥미진진함은 여느 소설에 못지않다. 『반지의 제왕』이나 『호빗』은, 소시민에 가까운 호빗 종족의 눈으로 영웅들을 조망하며 시작해, 프로도와 빌보 본인들 또한 역사의 페이지에 이름을 남기게 되는 뜻밖의 영웅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담는데 비해서, 『실마릴리온』에 담긴 제1시대의 영웅들은 본인들이 전설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
가운데땅의 위대한 이야기들: 『후린의 아이들』, 『베렌과 루시엔』, 『곤돌린 낙성』 [출처: Amazon, Tor]
『실마릴리온』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제1시대의 이야기는 『후린의 아이들』, 『베렌과 루시엔 (레이시안의 노래)』, 『곤돌린 낙성』, 「분노의 전쟁」을 꼽을 수 있는데, 크리스토퍼 톨킨은 『실마릴리온』의 출간 이후, 해당 이야기들에 관해 부친이 남긴 미완성 소설 원고들을 모아 출판하기 시작했다. 네 개의 이야기 중 가장 완성된 소설의 형태에 근접한 것은 『후린의 아이들』로 2007년 출간되었으며, 보통 기분 좋은 결말로 끝나는 톨킨의 여타 작품과는 상이하게 숙명적 비극을 다루어 평단과 톨키니스트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크리스토퍼 톨킨 본인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반지의 제왕』의 성공적인 영상화는 2000년대 이후 새롭게 가운데땅 팬덤의 부흥을 일으켰으며, 영상화 이후 4년이 채 되지 않아 공개된 『후린의 아이들』은 오래된 팬들과 새로운 팬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작품이었다.
2017년, 『후린의 아이들』 공개 이후 10년이 지난 후, 크리스토퍼 톨킨은 『베렌과 루시엔』의 편집을 완성해 공개했는데, 그 서론에서 이미 92세라는 노령의 나이를 이유로 자신의 아버지 작품 중 마지막으로 출판하는 작품이 될 것이라 밝혔다. 하지만 그가 『베렌과 루시엔』의 편집을 마지막 작품으로 꼽은 이유는 단순히 기력이 쇠해서만은 아니었고, 『베렌과 루시엔』의 주제가 그의 부모의 연애와 결혼 과정에서 영감을 얻은 자전적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평생을 부친의 작품군을 확장하는데 바쳤던 아들은 그 대미를 부모에게 바치고 싶었던 것이다.
『베렌과 루시엔』을 읽은 톨키니스트들은 한 세기를 풍미한 대작가의 위대한 상상력이 그의 신실한 아들을 통해 이어져가는 과정과, 결국 마지막에는 다시 가족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의 종점에서 깊은 감동과 인간미를 느꼈다. 그런데 불과 1년 후, 크리스토퍼 톨킨은 본인의 이야기를 번복하고 『곤돌린 낙성 (The Fall of Gondolin)』을 출판하게 된다.
『곤돌린 낙성』
『곤돌리 낙성』 삽화, (左) 곤돌린에 입성하는 투오르, (右) 울모와 투오르의 만남 [출처: Alan Lee]
『반지의 제왕』 또는 『호빗』만으로 가운데땅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후린, 투린, 베렌, 루시엔, 투오르, 에아렌딜과 같은 이름들이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물론 이들의 이름들이 지난 시대의 위대한 영웅의 예시로 위 작품들에 인용되는 경우는 있지만, 왜 톨키니스트들이 톨킨 사후 50년이 지난 지금 저 이야기들이 출판된다는 사실에 대해 열광하는지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물론, 『실마릴리온』을 읽은 독자들은 저 인물들의 이야기가 가진 매력을 알고 있으며, 특히 제1시대 희대의 영웅인 에아렌딜과 「분노의 전쟁」의 이야기는 『실마릴리온』 전체의 주제를 관통하기에 더욱 의미가 깊다.
『곤돌린 낙성』은 그 영웅 에아렌딜의 아버지이자, 『후린의 아이들』의 주인공인 투린 투람바르의 사촌 투오르를 주인공으로 다루고 있다. 제1시대 당시의 가운데땅을 대표하는 대륙인 벨레리안드는, 대부분의 지역이 타락한 발라(신) 모르고스의 손아귀에 고통받고 있었다. 그는 발록과 오크들로 이루어진 군대로 인간들을 노예화했고, 요정들을 사냥해 가운데땅을 모두 자신의 지배 아래 두고자 목표했다. 그중 유일하게 그의 침략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놀도르 요정의 수장 투르곤이 다스리고 있는 숨어있는 도시 곤돌린이었다.
투오르는 인간으로 태어나 모르고스의 군대에서 노예 생활을 했지만, 장성한 이후 탈출하여 오크를 사냥하는 방랑생활을 하던 중, 물과 바다의 발라(신)인 울모의 계시를 받고 곤돌린으로 향하게 된다. 보론웨라는 방랑 요정과 만나 의기투합한 투오르는 그의 도움으로 곤돌린에 입성하게 된다. 울모는 투오르의 입을 통해, 모르고스의 곤돌린 공격이 멀지 않았으니, 곤돌린을 포기하고 도망가라는 이야기를 투르곤에게 전달했지만, 본인이 건축한 성에 대한 자신감이 넘쳤던 투르곤은 그의 경고를 무시한다. 투오르는 낙심 하지만, 투르곤의 딸 이드릴과 사랑에 빠지게 되고, 곤돌린에 남아 유일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일가를 이루는 것을 인정받아, 날개 가문의 수장이 된다. 한편 곤돌린의 12 가문 중, 두더지 가문의 수장 마이글린은 본인 또한 이드릴을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출신이 불분명한 인간이 그녀를 빼앗아가는 것을 보고 질투에 휩싸여 곤돌린을 배반하고 모르고스에게 곤돌린의 위치를 알려준다.
곤돌린의 가장 큰 축제의 날, 모르고스는 발로그와 오크, 고블린, 그리고 화룡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보내 곤돌린을 침략한다. 투오르는 울모의 계시를 통해 모르고스의 침략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상 탈출로를 미리 준비하였는데, 이드릴과 아들 에아렌딜을 탈출로로 보내고, 자신은 다른 가문들의 수장과 함께 응전을 택한다. 요정 군대는 지독한 열세에서 치열하게 응전하지만 결국 투르곤의 죽음으로 곤돌린은 함락되고, 남은 가문의 수장들은 생존자들을 이끌고 탈출을 한다.
탈출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추격을 받지만 독수리들의 왕 쏘론도르의 도움을 받아 시리온 하구까지 탈출하여 그곳에 새로운 터전을 잡은 투오르와 요정 난민들은 더 이상의 추격이 없음에 감사한다. 하지만 그들은 곤돌린의 낙성이 더욱 거대한 격전, 분노의 전쟁의 도화선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야기의 변화
1912년, 옥스퍼드의 엑시터 대학 시절, 동창이자 전우였던 (左) 콜린 컬리스, (右) J. R. R. 톨킨 [출처: L.L.H. Thompson, R.F]
『곤돌린 낙성』은 1916년-1917년 집필되었는데, 당시 J. R. R. 톨킨은 20대 중반이었으며, 1차 세계대전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인 솜 전투(The Battle of the Somme)에서 가까스로 생존하고 귀환하여, 군 병원에서 회복을 하던 중이었다. 크리스토퍼 톨킨은 아버지가 시인인 W. H. 오든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며, 『곤돌린 낙성』이 가운데땅 이야기 중 가장 첫 번째로 만들어진 이야기임을 밝힌다.
크리스토퍼 톨킨이 「The Original Tale」이라고 부르는 『곤돌린 낙성』의 초본은 그 이후 J. R. R. 톨킨이 오랜 기간 동안 창작활동을 이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살이 붙여지거나 재작업되지 않았다. 어떤 판본에서는 한 문단까지도 요약되었던 이 소설은 1951년 다시 한번 작업되는데, 크리스토퍼 톨킨은 이를 「The Last Version」, 즉 최종본이라고 부른다.
초본의 경우 그 이후 가운데땅의 설정이 심화되면서 충돌하게 된 내용, 특히 인명과 지명 등 고유명사가 바뀌게 된 부분들이 존재하는데, 크리스토퍼 톨킨은 이번에 『곤돌린 낙성』을 편집하면서 내용은 그대로 두되, 독자의 이해를 위해 일부 인명과 지명만을 수정하였다고 밝힌다. 때문에 초본을 읽게 되더라도 『곤돌린 낙성』의 전체 줄거리를 아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위 사실을 짚고 넘어가는 이유는 아쉽게도 J. R. R. 톨킨이 최종본을 미완성으로 두었다는 사실이다. 톨킨은 최종본을 집필하며 30년 전에 집필했던 초본 당시에는 가볍게 넘어갔던 투오르의 부모와 유년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더욱 자세하게 묘사하며, 그가 곤돌린으로 향하는 여정을 생동감 넘치게 그려내는데, 이야기는 그가 곤돌린에 입성하는 순간 끝나게 된다. 다시 말하면, 투오르의 이야기 중 곤돌린 입성 전의 삶은 최종본에서, 곤돌린 입성 후의 삶은 초본에서 읽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그 두 이야기를 통합하기에는, 30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집필된 두 판본의 문체가 상당히 차이가 난다는 문제도 있지만, 공통으로 다루고 있는 곤돌린 입성 전의 삶에서 서로 세세하게 충돌하는 설정이 있기 때문에 크리스토퍼 톨킨은 고민 끝에 인명과 지명만을 통일한 후, 두 판본을 모두 출판하기로 선택했다.
이렇게 『곤돌린 낙성』은 해당 주제에 대해 톨킨이 집필한 모든 글을 나열하고, 크리스토퍼 톨킨은 그 이후 「이야기의 진화」라는 장을 할애하여 각 판본의 차이를 보여주고, 그에 대한 본인의 해석을 제공한다. 그는 이 부분에서 한 시대와 사건에 대한 다양한 기록의 교차 검증을 하는 사학자의 접근법을 사용한다.
책을 읽다 보면 느껴지는 감상은, 물론 문체에 대한 호불호는 개인차가 있겠지만, 톨킨이 20대 중반, 병원에서 손으로 쓴 글이 절대로 최종본에 비교하여 문장력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초본은 산문임에도 불구하고 소리 내어 낭송을 해보면 아름다운 운율이 존재하며 청년의 탐미주의적인 면모와 생동감 넘치는 기력이 보인다면, 『호빗』과 『반지의 제왕』의 집필을 마친 후인 최종본은 기교가 적지만 정제되어 있는 고아한 문장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잠시 떠돌아다니던 그는 바다를 마주 보는 검은 절벽에 도착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다와 그 파도를 보았는데, 그 순간 태양이 바다 끝에 있는 지구의 가장자리 아래로 가라앉는 것을 보고, 절벽 꼭대기에 서서 팔을 쭉 벌리니, 그의 심장은 벅찬 열망으로 가득 찼다. 어떤 이들은 그가 인간 중 처음으로 바다에 도달해, 그것을 확인하고, 그것이 가져오는 갈망을 깨달은 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사실을 말하는지는 모르겠다.
- J. R. R. 톨킨, 『곤돌린 낙성』, 「원본 (The Original Tale)」
용들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다시 용기를 얻은 오크들은 발록과 함께 뚫린 성벽 사이로 밀치고 들어가 곤도슬림(Gondothlim)에 사악한 공격을 시작했다. 투오르는 오크 군주 오스로드(Othrod)의 투구를 쪼개 격퇴하였으며, 발메그(Balcmeg)를 산산조각내고, 도끼로 루그(Lug)의 무릎 아래를 찍어 그의 발을 동강 냈는데, 그의 곁에서 엑셀리온(Ecthelion)은 고블린 대장 두 명을 한 칼에 베고는 고블린 최고의 전사인 오르코발(Orcobal)의 머리를 이빨부터 찢어발겼다. 두 수장은 용맹한 활약은 결국 그들을 막기 위해 나선 발록들과의 전투로 이어졌다. 엑셀리온은 이 강대한 악마를 셋이나 베었는데, 그의 검이 악마의 철을 찢고 악마의 불을 진압하니, 발록들은 그 앞에서 고통 속에 몸부림칠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더욱 두려워한 것은 투오르가 휘두르는 도끼 드람볼레그(Dramborleg)로, 도끼는 마치 독수리의 날개가 바람을 가르듯이 노래하였으며, 떨어질 때마다 죽음을 수집했는데, 다섯 명의 발록이 이 도끼에 쓰러졌다.
- J. R. R. 톨킨, 『곤돌린 낙성』, 「원본 (The Original Tale)」
『곤돌린 낙성』 삽화, 글로르핀델 최후의 전투 [출처: Alan Lee]
원본의 곤돌린 공성전 부분을 읽다 보면, 이미 영상화되었던 『반지의 제왕』의 유명한 전투 장면들이 자동으로 떠올려질 정도로 긴장감과 폭력의 수위가 높은 편이다. 어쩌면 이는 톨킨이 원본을 집필한 시기가 치열하기로 유명했던 1차 대전의 솜 전투 직후였기 때문이라고 상상해본다. 솜 전투 첫날에만 58,000명의 영국군 병사가 사망했는데, 이러한 생지옥에서 운이 좋게 생존 귀환한 톨킨이 본인이 느낀 공포를 마주하고 주위에서 용맹하게 싸우다 사라져 간 전우들을 추모했던 방법이 바로 『곤돌린 낙성』의 집필이 아니었을까. 이런 제반 상황을 이해하고 『곤돌린 낙성』을 읽다 보면, 투오르의 옆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용맹하게 싸우다 죽음을 맞이한 요정 가문의 수장들인 엑셀리온과 글로르핀델의 이야기를 단순한 영웅담만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곳에서 투오르는 긴 시간 동안 앉아, 강물의 소용돌이를 바라보고, 그 끝없는 속삭임에 귀를 기울였는데, 어느새 밤이 다시 찾아와 그의 머리 위 어두운 하늘 길 사이에 별들이 차갑고 하얗게 빛났다. 그리고 그는 목소리를 높여 노래를 하며, 하프의 줄을 뜯었는데, 강물이 흐르는 소리를 넘어, 그의 노랫소리와 하프 소리가 바위에 메아리 되어 커지니, 밤의 옷을 입은 언덕을 울리고 지나가, 곧 공허로 가득 차 있던 땅이 별 아래의 음악 소리로 가득 찼다.
- J. R. R. 톨킨, 『곤돌린 낙성』, 「최종본 (The Last Version)」
세상이 멈추어 있었다. 추운 바람이 태고의 길을 스치고 지나가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바람 또한 침묵에 빠졌다. 이 정지 상태에서, 투오르는 바람의 변화를 감지했는데, 마치 모르고스의 땅에서 불어오는 숨결이 잠시 잦아들고, 대신 바다의 기억을 담고 있는 서쪽의 산들바람이 그 자리를 채우는 느낌이었다. 바다의 기억은 바람에 섞인 회색의 안개로 불어와 석조 대로를 지나 동쪽 벼랑의 덤불 속으로 성큼 들어갔다.
- J. R. R. 톨킨, 『곤돌린 낙성』, 「최종본 (The Last Version)」
문장 하나하나가 길어 운율적 아름다움을 간직한 원본에 비해, 최종본은 짧은 문장과 긴 문장이 교차되어 사용되면서 완급 조절이 훨씬 성숙한 편이다. 훨씬 더 산문적 가치에 충실한 최종본은 『호빗』과 『반지의 제왕』 이후에 집필되었기 때문일까, 톨킨이 본인의 소설과 문장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소설로 출판하기에는 (만약 완성이 되었다면) 최종본이 훨씬 어울렸을 수도 있다.
유명한 작가들의 처녀작을 읽어 보면 그 작품에서만 존재하는 과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아직 작가의 스타일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청년의 패기와 꿈이 합쳐져, 마치 욕심부려 맥주를 따랐더니 거품이 잔에 넘치는 것과 같은 그림이 상상되고는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과한 기운이 문학적 완성도와 연관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청년의 패기가 있어야만 집필이 가능한 작품들이 있으며, 특히 영문학 희대의 문장가인 톨킨의 경우는 원본을 쓴 20대 중반에도 이미 일대종사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기에 『곤돌린 낙성』의 특이한 편집 형태가 거슬리지 않으며, 이렇게라도 부친의 모든 글을 모아 출판한 크리스토퍼 톨킨에게 고마울 뿐이다.
『곤돌린 낙성』의 다양한 판본은 문득 기술의 발전과 창작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크리스토퍼 톨킨이 아버지 사후에도 지속적으로 아버지의 글을 출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연하지만, 톨킨이 수많은 습작을 남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워드 프로세서로 글을 쓰는 현대에는 "이전 형태"가 남아있는 경우가 많지 않다. 마음에 들지 않는 문장은 삭제되고, 새로운 문장으로 대체가 된다. 톨킨은 군인병원에서 침대에 앉아 손으로 『곤돌린 낙성』을 써 내려갔을 것이다. 어느 순간에는 타자기를 구입했겠지만, 타자기 또한 삭제가 쉽지 않다. 결국 그는 한번 쓰기 시작한 글은 어느 정도 발전을 시켜보고, 만약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언젠가 참고하기 위해 모든 판본을 남겼다.
써낸 글을 지우는 것이 어렵고 불편하다면, 글을 써내려 가는데 더욱 심혈을 기울이게 될까. 현대의 우리는, 글을 쓰는 것이 너무나도 쉬워졌기에, 무언가를 쓰고 지우는데 무심해지지 않았을까. 톨킨의 문장은 글을 쓰는 것이 어려웠기에, 한 번을 쓰더라도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아름다움을 간직하는 데 성공한 것은 아닐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