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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bert 이홍규 Jul 09. 2020

[원서 서평] 『키르케』, 매들린 밀러

목소리가 없는 이들을 위한 위로

[시작 전 한마디. 『키르케』는 한국에도 번역되어 2020년 출간되었습니다. 때문에 한국어로 번역이 되지 않아 직접 구절을 번역했던 다른 작품과는 다르게, 인상 깊은 구절을 원문 그대로 인용해 보았습니다.]


키르케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내용 중,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에도 10년이나 걸렸던 우여곡절로 가득 찬 귀향길 끝자락에, 스쳐가듯 등장한다. 오디세우스가 파이아케스에 도착하여 환영 연회에서 본인의 무용담을 이야기하던 중, 여정 초반에 잠시 만났었다고 고백한 바다 요정 님프의 이름이다.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던 오디세우스와 그의 부하들은 아이아이에라는 외딴섬에 도착하는데, 그 섬에 홀로 살고 있던 마녀 키르케는 부하들을 돼지로 만든다.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의 간곡한 부탁에 부하들을 다시 사람으로 되돌려주고 트로이의 영웅과 마녀는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섬을 떠나지 않고 1년간 함께 지내지만, 고향 이타카를 잊지 못하는 오디세우스는 키르케를 떠난다.


후속작 텔레고네이아에서 그들 사이에 태어난 아들 텔레고노스는 아버지를 찾아 아이아이에 섬을 떠난다. 기구한 운명의 장난으로 서자는 아버지를 죽이게 되고, 오디세우스의 본처와 큰 아들 텔레마코스와 함께 돌아온다. 키르케는 텔레마코스와 사랑에 빠진다. 그렇게 3000년 동안, 키르케는 위대한 오디세우스가 '예전에 잠시 알았던 여자', 또는 '아버지와 아들을 모두 사랑했던 여자'로 문학사에 남았다.


잘 생각해보면, 키르케는 원작에는 직접 등장하지도 않았고, 오직 오디세우스의 시선과 서사를 통해서만 자신의 삶을 남겼다. 그녀는 다른 인간들에게 직접 본인의 입장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왜 유부남인 오디세우스와 사랑에 빠졌는지, 왜 다시 오디세우스의 아들과 사랑에 빠졌는지. 그래서 독자들은 그리스 신들의 윤리관을 비웃거나, 인간 남성에 집착하는 '마녀'라는 이름 안에 그녀를 가둔다. 이해할 수 없거나, 내 이해 안에 존재해야만 하거나.


저자 매들린 밀러는 마치 작품 안에서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도록 만드는 약초 "몰리"를 사용한 키르케처럼, 자신도 마술과도 같은 글을 통해 키르케에게 목소리와 삶을 부여하고, 그녀의 본질을 어루만진다.


I had been old and stern for so long, carved with regrets and years like a monolith. But that was only a shape I had been poured into. I did not have to keep it.


제우스로 대표되는 올림포스의 신들 이전 세계를 통치했던 타이탄족은 신들의 전쟁에서 패했으나, 그 중 태양신 헬리오스와 대양신 오세아노스는 전쟁 중에 올림포스의 편에 섰기에 권능을 인정받고 살아간다. 오세아노스의 딸 페르세는 헬리오스와 결혼을 하고 키르케를 포함한 아들 둘, 딸 둘을 낳는다.


여기까지는 신화와 동일하지만, 소설 『키르케』에서는  능력이 출중한 타이탄족 남매들과는 달리 (신들의 기준에서) 소심한 성격과 볼품없는 외모를 가지고 태어난 키르케의 성장을 다룬다.


곧 4남매는 신들도 제어하지 못하는 "마술(Pharmakeia)"이라는 힘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한순간의 치기로 마술을 오용한 키르케는 응벌로 아이아이에 섬에 무기한 유배를 가게 된다. 신들과 인간들은 작고 조용한 섬에 오롯이 살아가는 키르케를 가만 두지 않고 그녀와 비밀스러운 관계를 이어가며, 그녀는 이 곳에서 님프, 즉 하급 여신이자 마녀라는 본인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어쩌면 갇혀 있었기에, 본인의 내면으로 여정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매들린 밀러 [출처: LA Times]


매들린 밀러는 2011년, 『일리아스』의 주인공인 아킬레우스와 그의 친우 파트로클로스의 관계에 집중한 『아킬레우스의 노래』로 평단과 대중의 극찬을 받으며 혜성처럼 등단했다. 원전이 된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는 물론 현대에 읽어도 마치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 위에 그려진 영웅들이 움직이는 것 같은 인물적 생동감을 자랑한다. 하지만 3천 년 전의 인물들과 공감을 할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라운 만큼, 상식과 생활양식 등 간극에서 느껴지는 거리감은 그 생동감을 이차원에 한정 짓게 만든다.


I looked at her, as vivid in my doorway as the moon in the autumn sky. Her eyes held mine, gray and steady. It is a common saying that women are delicate creatures, flowers, eggs, anything that may be crushed in a moment's carelessness. If I had ever believed it, I no longer did.


매들린 밀러는 『아킬레우스의 노래』와 『키르케』를 통해 이차원의 신과 영웅들에게 뼈대와 살을 붙이고, 현대의 독자들이 3천 년 전의 인물 사이를 걸으며, 그들의 입김과 살 냄새를 느낄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한다. 신화를 기반으로 하였지만, 이 작품은 주인공 키르케, 오디세우스의 아내인 페넬로페의 성격처럼 인간적이고, 진솔하며, 우아한 서사를 통해 이 세기의 새로운 고전으로 재탄생했다. 어쩌면 이러한 서사 외적 형식의 특징마저도 서사 내 키르케 최후의 선택과 동일시되기에, 마지막 장을 덮고도 온몸을 덮는 소름을 쉽게 떨칠 수가 없었다.


『키르케』는 3000년의 시간을 넘어서, 대륙과 언어라는 제약을 넘어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모든 것에 대한 찬가이다. 이 찬가는 소설 속에서 신의 외모와 인간의 목소리를 가진 키르케가 화초 밭에 물을 주고 바닷가를 걸으며 흥얼거리는 노래 그 자체이기도 하다.


(끝)


『Circe』(2018), Madeline Miller

https://www.goodreads.com/book/show/35959740-ci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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