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문화 수첩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lbert 이홍규 Aug 18. 2020

[원서 서평] 『흑태자』, 마이클 존스

세 개의 전투, 한 명의 인간

"흑태자" 에드워드 왕세자는 백년전쟁 초반, 영국군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맞은 두 차례의 중요 회전(pitched battle)을 모두 대승리로 이끈 주역이다. 아키텐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프랑스 남부 대부분을 영국 지배하로 가져온 흑태자는 중세 영국 최고의 명장이라 평하기 아깝지 않다.


하지만 그의 때 이른 죽음은 준비되지 않은 그의 어린 아들 리처드 2세를 왕위에 오르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곧 영국 내의 권력 다툼 및 플랜태저넷 왕조의 몰락, 그리고 장미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흑태자는 인생의 모든 중요한 전투를 승리하고 백년전쟁의 시작을 영국군의 우세로 가져왔지만,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음으로 백년전쟁의 끝을 프랑스의 승리로 마무리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중세 전쟁사를 중심으로 영국의 역사를 다루는 역사학자 마이클 존스가 2018년 출판한 『흑태자 (The Black Prince)』는 2020년 현재까지 흑태자를 대상으로 한 전기 중 가장 깊이 있는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집필된 평전이다. 저자는 중세 전투와 전쟁사를 전문적으로 다뤄왔는데, 그의 전공 지식을 바탕으로 흑태자의 유명 업적인 크레시 전투와 푸아티에 전투의 대승리를 현장감 넘치게 묘사하며, 두 전투의 전개 및 승패 원인 또한 전술적인 시각에서 다루고 있다.


크레시 전투에서, 에드워드 3세는 만약 흑태자가 프랑스군의 타깃이 되어준다면, 많은 적군들이 그를 향해 모여들게 될 것이며, 흑태자 분대의 정면에 있는 좁은 공간에 압박이 생기기 시작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 전황은 어느 순간 치명적인 임계치에 도달하게 된다: 너무 많은 사람들, 부족한 전장, 빠르게 줄어드는 공간, 확 늘어나는 밀도, 순식간에 막히는 진로. … 조프리 르 베이커는 대부분의 프랑스 병사가 잔혹하게 죽었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프랑스군이] 영국군을 공격했을 때, 군대의 전열은 칼과 창에 맞아 죽었지만, 대부분은 프랑스 군대의 한가운데서 몸에 상처 하나 없이 압사당했을 정도로 심한 압박에 시달렸다."


흑태자의 가장 큰 흑역사로 알려진 리모주 전투와 시민 학살의 경우, 물론 영국인의 시각에서 집필되었기에 완벽하게 중립적인 자세라고 평하기는 어렵지만,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는 자료 및 해석 또한 제공한다.


크록이 언급하는 포로를 잡지 않을 것이라는 지시는, 시가지(cité) 진격 때 내려졌지만, 그 이후 철회되었다. 하지만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가 이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훨씬 더 선정적인 이야기가 이 전투 안에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다. … 프루아사르는 리모주를 방문한 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그는, 리모주는 시가지(cité)와 성(château)을 나뉘어 있으며, 성(château)의 거주자들은 1370년 전투 당시에 내내 흑태자에게 충성을 바쳤으며, 전투에서 안전하게 살아남았다는 중요한 역사적 배경을 놓치게 되었다.


마이클 존스는 또한 평전 『흑태자』를 통해 에드워드 왕세자와 함께 자주 언급되는 기사도(chivalric ideals)의 역할을 중세 봉건주의적 사회구조를 지탱하기 위한 장치로 해석한다. 이러한 접근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기사도에 대한 다분히 낭만적인 기존의 감상과는 달리 현대적인 감성에서 보아도 공감할 수 있는 좌표를 제공한다는 면에서, 『흑태자』는 단순히 에드워드 왕세자의 삶에 대한 서술을 넘어 중세 역사 전체를 보아도 유의미하게 적용할 수 있는 통찰을 제시한다.


왕실의 의식과 에티켓이 중요성이 커지고 있던 이 시대에, 대중은 희망을 줄 수 있는 이를 찾고 있었다. 전쟁과 전염병의 공포가 휩쓸고 간 이후, 아름다움과 화려함에 대한 간절함이 찾아왔다. 흑태자는 그의 궁중에 방문한 이들이 특별 대접을 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생전의 노력 때문이었을까, 흑태자의 명성은 그의 사후 역사가들과 문학가들에 의해 일종의 중세 기사도 신화 영역에 들어가게 되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집필했다고 추정되는 『에드워드 3세』에서는 그의 아버지와 함께 주인공의 역할을 맡고 있으며, 셰익스피어의 역사극 중 가장 유명한 헨리 5세에 와서는 위대한 영국 전사의 대명사처럼 그 별명이 사용되고 있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코난 도일이 백년전쟁을 무대로 쓴 역사소설 화이트 컴퍼니나이젤 경에도 조연으로 등장하였고, 현대에 와서는 켄 폴릿의 끝없는 세상과 같은 베스트셀러 역사소설이나, 2001년 히스 레저가 주연한 〈A Knight's Tale (기사 윌리엄)〉에도 비중 있는 조연으로 등장한다. 다만, 이러한 매체에서 유능하고 용감한 명장으로 그려지는 흑태자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Edward, The Black Prince, After The Battle of Poitiers〉(1788), Benjamin West [출처: RCT] 


앞서 언급한 창작물과는 달리, 마이클 존스의 『흑태자』는 역사 속의 '인간' 에드워드 왕세자를 조명한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일신의 용력과 뛰어난 야전사령관의 감각은 그에게 전쟁 중 유럽 전역을 뒤흔드는 명성을 가져다주었지만, 낭비가 심한 경영 방침은 평화 중 지속적인 금전 문제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또한, 본인의 결정보다는, 부왕인 에드워드 3세의 지시에 따른 전쟁이기는 했지만, 카스티야의 폐왕 페드로를 복권시키기 위했던 스페인 원정 전쟁은 안 그래도 좋지 않았던 그의 건강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그가 통치하던 아키텐의 금고마저 완전히 비워버렸다.


흑태자는 흔히 말하는 "과장된(larger-than-life)" 삶을 살았다고 평가되기 쉬우나 그의 평전은 현대적인 경영 관점에서 참고할만한 가치가 있다. 그는 실제로 전쟁터에서 삶의 대부분을 보냈고, 그의 동료들과 적이 남긴 교차 기록을 모두 비교해 보아도 실제로 패배를 모르고 살아온 뛰어난 지휘관으로, 삶과 죽음이 오가는 전장에서 성공적인 판단만을 반복해왔다.


크레시 전투와 푸아티에 전투 모두, 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치의 선점과 방어, 전투가 시작된 후 상대방의 공격 포인트를 본인이 원하는 전열로 집중시키는 전술, 그리고 조커(장궁병)의 시의적절한 전장 배치를 통해 승리로 이어졌다. 이는 경영에서도 국지적이거나 단기 경쟁에서 쓸만한 전술이다. 하지만 경영자는 항상 중장기적인 시야를 가지고 움직여야 한다. 흑태자는 거의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잉글랜드는 전쟁에서는 패배하였으며, 명장인 에드워드 왕세자는 영지 운영과 자금 관리에 실패한 암군으로 역사에 남았다.


(끝)


『The Black Prince』(2018), Michael Jones

https://www.goodreads.com/book/show/36327072-the-black-prince


매거진의 이전글 [원서 서평] 『키르케』, 매들린 밀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