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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bert 이홍규 Sep 13. 2020

[서평] 『디즈니만이 하는 것』, 로버트 아이거

창의력 관리라는 예술

2000년 이후 전 세계 기업 경영인 중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을 꼽자면, 적어도 2020년 기준으로는 디즈니의 6대 CEO인 밥 아이거(Bob Iger)가 순위권에 들지 않을까 생각된다. 2005년 취임 후, 픽사(2006), 마블 엔터테인먼트(2009), 루카스필름(2012), 21세기 폭스(2019)를 차례로 인수한 대외적인 업적과, 상하이 디즈니 리조트 개장 및 디즈니+ 론칭 등 내부적인 프로젝트 모두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그의 행보는 이러한 결정들이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미친 영향을 생각해보면 적어도 대중문화계 기업인 1위로 놓기에 손색이 없다.


2020년 2월에 은퇴를 발표한 그는, 퇴직을 1년 앞둔 2019년 본인의 인생과 경영철학을 담은 회고록 『디즈니만이 하는 것 (The Ride of a Lifetime)』을 발표하였는데, 디즈니 정도로 거대한 회사의 수장이 재 중 자서전을 내는 경우는 흔하지 않아 큰 주목을 받았다. 빌 게이츠는 2020년 「내가 실제로 추천할만한 경영 도서」라는 제목의 블로그 포스트로 꼼꼼한 서평과 함께 추천하였고, 미국 최대의 서평 공유 플랫폼인 Goodreads에는 코비 브라이언트가 생전에 남긴 서평이 아직도 남아있다.


영어 제목인 『The Ride of a Lifetime』은 몇 가지 중의적 의미가 있다. 표면적으로는 ‘인생 최고의 경험’ 정도로 번역될 수 있지만 '인생이라는 질주'라고도 읽히고, 디즈니랜드와 같은 테마파크의 놀이기구를 'ride'라고도 부른다는 점에서 '인생 최고의 놀이기구'라는 의미도 있다. 책의 내용을 읽다 보면 디즈니 이전 밥 아이거의 인생과 경영 레슨 또한 다룬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디즈니만이 하는 것』이라는 한국어 제목이 약간 아쉬워진다.


밥 아이거가 ABC 방송국 스태프로 시작하여 2019년 폭스 인수 완료까지의 겪었던 경험과, 거기서 배웠던 사업적 통찰을 공유하는 형태로 구성된 이 책은 자서전이나 경영 도서라는 면에서 탁월하게 압도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밥 아이거의 경영 스타일처럼 그의 문체는 진솔하고 간결하며 문제의 핵심만을 다루고 있다. 심지어 경영적 통찰만을 원하는 독자들을 위해서 해당 내용만을 부록에 따로 떼어놓고 있다. 때문에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을만한 부분이나 사건에서도 건조한 감상이 느껴진다.


하지만 저자의 인생이 워낙 드라마틱하고, 2000년대 초반의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을 통해서 새로 알게 된 사실 몇 가지를 짚어보고 싶다.


방송에 내보낼 빅 이벤트가 없을 때는 일단의 프로듀서들을 밖으로 내보내 시청자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스토리를 발굴해오게 했다. 그렇게 구해온 소재로 특집 프로그램을 만들어 비는 시간을 채웠다. 그중 자메이카 봅슬레이 팀은 거의 '신의 선물'과도 같았다. 70m와 90m 스키점프에서 꼴찌로 경기를 마친 영국의 돈키호테 스키점퍼 '독수리' 에디도 마찬가지였다.

- p. 80, 『디즈니만이 하는 것』, 로버트 아이거.


19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 당시 ABC 스포츠 프로그래밍 부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밥 아이거는 캘거리 올림픽 중계를 총지휘했는데, 현장 기상 상황이 몹시 좋지 않아 모든 방송 스케줄이 펑크가 나고 있었다. 결국 '화제의 인물' 같은 꼭지로 생방송을 채워나갔는데, 이 중 자메이카 봅슬레이 팀의 이야기는 디즈니에서 1993년 〈쿨 러닝〉(1993)이라는 제목으로 제작, 개봉하였고, 2016년에는 (당시) 20세기 폭스에서 〈독수리 에디〉(2016)또한 배급하였다. 두 이야기 모두 밥 아이거가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지만, 그와 관련이 있는 디즈니와 폭스를 통해 공개되었다는 점이 재미있다.


6개월 만에 〈트윈 픽스〉는 하나의 문화현상에서 좌절감을 안겨주는 실망으로 변모했다. 우리는 데이비드 린치 감독에게 창작의 자유를 주었지만, 첫 시즌이 끝날 무렵 그와 나는 시청자의 기대치를 놓고 지속적으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극 전체는 로라 팔머를 누가 죽였는지에 대한 의문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데이비드가 그 사실을 망각하고 마치 무작위로 빵 조각을 뿌려놓는 것 같았다. 결코 시청자에게 만족감을 주는 방식은 아니었다.

- p. 99, <디즈니만이 하는 것>, 로버트 아이거.


TV가 영화의 열화판이 아닌, 자체로 훌륭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1990년의 〈트윈 픽스 (Twin Peaks)〉(1990), 30년이 지난 지금도 열성 팬들이 존재하는데, 밥 아이거는 당시 ABC 엔터테인먼트의 총책임자였다. 트윈 픽스〉는 밥 아이거의 전폭적 지지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개입으로 인해 스토리가 산으로 가버리고 아쉬운 종영으로 끝나게 된다. 밥 아이거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이 자서전에서 본인이 더 전통적인 TV 스토리텔링을 고집하고 있었고, 데이비드 린치가 시대를 훨씬 앞서 나간 것이 아니었을지 회고한다.


마이클은 디테일까지 세세하게 통제하는 자신의 경영 스타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지만, 그 과정에서 옹졸하고 좀스러운 사람으로 비치기도 했다. 한 번은 그가 호텔 로비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기 램프들이 보입니까? 저게 다 내가 직접 고른 겁니다."
디즈니 CEO가 그런 것까지 챙긴다는 인상을 주어서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솔직히 나도 그와 같은 좀생이 짓을 하다 지적당했던 적이 두어 번 있었다. …).

- p. 167, 『디즈니만이 하는 것』, 로버트 아이거.


밥 아이거의 전임자인 마이클 아이스너는 그 꼼꼼함과 체계적인 경영으로 유명했지만, 그 특유의 세심함이 관료주의적으로 비치기도 했는데, 디테일과 마이크로 매니징의 선이 어디에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 선을 넘는 순간 어떠한 이미지를 얻게 되는지 직관적으로 알려주는 좋은 일화라고 생각된다.


밥 아이거, 스티브 잡스 (사진 출처: Vanity Fair)


그렇게 2시간을 보낸 결과, 장점은 빈약하기 그지없었고 단점은 차고 넘쳤다. 물론 열거된 단점 중 몇몇은 내가 보기엔 아주 사소한 문제였다. 나는 의기소침해졌지만 그 정도는 예상했어야 마땅했다. "음…, 아이디어는 좋았던 것 같은데 어떻게 이 일을 성사시켜야 할지 그 방법은 잘 안 보이네요," 내가 말했다.
"견실한 장점 한두 가지가 수십 가지 단점보다 강력한 법이지요," 스티브가 말했다.

- p. 254, 『디즈니만이 하는 것』, 로버트 아이거.


2005년, 디즈니의 6대 CEO로 등극한 밥 아이거가 처음으로 세운 프로젝트는 픽사의 인수 합병이었다. 쿠퍼티노에 있는 애플 본사를 방문하여 스티브 잡스와 밥 아이거는 화이트보드에 인수 합병의 장단점을 나열했는데, 아무래도 단점이 훨씬 많이 존재한다. 현상(status quo)을 파괴하는 모든 제안은 표면적으로는 장점보다 단점이 훨씬 많이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정말로 꼭 얻어야 하는 장점이 존재한다면, 나열된 모든 단점은 제안을 막는 방해물이 아니라, 제안을 현실화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변한다.


그렇게 우리는 플랫폼 기업을 인수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고 대상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구글, 애플, 아마존, 페이스북은 고려대상에서 제외했다. 우리가 삼킬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아는 한 그들 중 어느 한 곳도 회사를 인수할 의사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만약 스티브가 여전히 살아 있었더라면 우리는 회사를 합쳤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그 가능성을 진지하게 논의해봤을 것이다).

- p. 343, 『디즈니만이 하는 것』, 로버트 아이거.


디즈니의 픽사 인수 후, 스티브 잡스는 디즈니의 최대 개인 주주이자, 이사회 일원이 되었는데, 밥 아이거와는 그러한 비즈니스 관계를 넘어서 인간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픽사 인수 직전 본인의 췌장암 투병 사실을 밥 아이거에게 알렸는데, 만약 스티브 잡스가 살아있었다면 픽사뿐만이 아니라 애플이 디즈니와 합병했을 수도 있었다는 밥 아이거의 회고는 상상만 해도 아찔한 '어쩌면'이다.


밥 아이거는 "창의력 관리는 과학이 아니라 예술"이며, 때문에 "노력 부족으로 벌어진 실패가 아닌 한, 실패에 비교적 관대해"졌고, "혁신을 원한다면 실패를 허용"하라고 주문한다. 창의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업계에서 일하면서도 실패를 몹시 두려워하는 독자에게 가장 필요한 형태의 조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대중문화 업계에서 일하다 보면, 항상 고민하는 지점이 창의력과 사업성이 충돌하는 부분이다. 영화나 TV 드라마 모두 결국 투자한 자본을 회수하기 위한 하나의 기업인데, 이러한 기업의 기반에 존재하는 자원인 '창의력'은 투자하는 노력 대비 결과물이 일정치 않다는 면에서 몹시 관리하기 어려운 성질을 가지고 있다.


밥 아이거의 책은 이러한 부분에서 통찰을 주었는데, 어쩌면 그의 책이 기존의 경영학 도서와는 달리, 자서전의 형태로 이루어진 이유도 여기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싶다. 창의력은 경영학 도서에서 보여주는 일련의 도식화된 프레임으로 접근해서는 찾을 수 없다. 창의력은 스토리텔링과 그 문맥 사이에 존재하며, 밥 아이거 또한 본인 인생의 스토리텔링을 통해서만 창의력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끝)


『디즈니만이 하는 것』(2019), 로버트 아이거

커버 사진 출처: 『Financial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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