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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bert 이홍규 Sep 21. 2020

[원서 서평] 『비잔티움』, 마이클 에니스

노르웨이의 바이킹 왕자가 비잔티움 제국의 용병이 된 까닭

대학교를 졸업하고 뉴욕에서 살던 시절 마이클 셰이본의 소설에 빠져 『유대인 경찰연합』, 캐벌리어와 클레이의 놀라운 모험, 길 위의 신사들까지 섭렵을 하고 오매불망 그의 신작을 기다렸던 적이 있다. 얼마나 팬심이 강했는지, 그가 서두의 소개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읽게 된 소설이 있는데, 바로 스웨덴의 국민 작가 프란스 벵트손(Frans G. Bengtsson)의 붉은 옴 (영제: The Long Ships)였다.


10세기 스웨덴의 바이킹 "붉은 옴(Röde Orm)"을 주인공으로 한 이 역사 활극 소설은 한국어로는 번역이 되어 있지 않지만, 몇몇 기사에서 블루투스 기술의 어원으로 소개가 되고 있다 (개발자가 기술을 만들던 당시 읽고 있던 소설). 주인공 옴은 젊은 시절 안달루시아 스페인으로 흘러들어가 코르도바의 알 하지브 알 만수르의 친위대로 복무하게 된다. 10세기의 바이킹 전사들은 그 뛰어난 무력 때문에 유럽의 다양한 군주들에게 러브콜을 받고 있었다.


10세기 후반,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바실리오스 2세는 키예프 루스 공국에 정착한 바이킹 전사들을 용병으로 고용해 제국 내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는데, 황제는 이들의 뛰어난 무력에 감탄하고, 그들이 제국 내에 연고가 없기 때문에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비교적 자유롭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붉은 옴 소설 전체에서 안달루시아 시절을 다룬 부분은 짧은 편이지만, 어린 시절 야만인으로만 알고 있던 바이킹 전사가 당시 서양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인 코르도바나 콘스탄티노플에서 용병으로 살아간다는 역사적 사실이 몹시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본인을 폭행하려던 바랑기아 전사를 정당방위로 죽인 여인에게 복수 대신 위로와 사과를 전달한 동료 전사들 (출처: Madrid Skylitzes, Wikimedia Commons)


마이클 에니스의 『비잔티움』은 바로 바랑기아 친위대 출신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인 하랄 하르드라다를 주인공으로 다루는 대하소설이다.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이 짧게 필요한데, 소설은 북유럽의 바이킹 문명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본토 유럽과 융화되어가는 서기 1000년대에 시작된다. 노르웨이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국왕 올라프 2세는 1030년 스티클레스타드 전투에서 그의 반대파 동맹군과 격돌한 후, 장렬하게 전사한다. 그의 이복동생인 하랄 시구르드손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 몇몇 가신과 함께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노르웨이 왕가의 마지막 남은 혈통인 하랄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왕위를 수복하기 위한 정치적 기반을 키우기 위해 키예프 루스 공국을 걸쳐 비잔티움 제국으로 넘어가 바랑기아 친위대로 근무한다. 중세 서양세계의 중심에서 용병대장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하랄은 비잔티움 제국을 탈출해 노르웨이로 돌아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소설 『비잔티움』은 바로 이 추방된 왕자 하랄 시구르드손이 비잔티움 제국에서 바랑기안 친위대장 하랄 하르드라다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본인의 인생도 드라마틱하지만, 하랄 하르드라다가 비잔티움 제국에 머물렀던 1033년-1042년의 10년은 동로마 제국사에서도 각별히 혼돈스러운 시대였는데, 이 중심에 있는 인물이 바로 조이(Zoë) 여제였다. 『비잔티움』의 주요 이야기는 조이 여제의 인생을 거쳐가는 5명의 황제가 뜨고 지는 과정 중의 정치적 암투와 음모를 다룬다.


역사적으로 보면 콘스탄티노스 8세의 딸이자, 포르피로옌니티(purple-born), 즉 재위 중인 황제와 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적통인 조이 공주는 로마노스 3세와 결혼해 황후가 되지만, 늙은 그와의 결혼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젊은 애인을 들여 함께 황제를 암살한다. 왕위에 오르게 된 그녀의 애인인 미하일 4세는 간질로 고생하다 병사하고, 조이 황후는 다시 그의 조카인 미하일 5세와 결혼한다.


하지만 미하일 5세가 곧 반란으로 폐위되자 조이 황후는 본인이 직접 여동생 테오도라 공주와 함께 여황제에 올라 동로마 제국의 수장이 된다. 조에 여제의 통치기간은 불과 수개월밖에 되지 않았고, 그녀는 바로 재혼하여 콘스탄티노스 9세의 황후로 살아간다. 본인을 포함하여 불과 10년 안에 황제가 4번이 바뀐 이 사건들은, 배후에 있는 인과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무언가 엄청난 일이 벌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게 만든다.


저자의 첫 출판작이기도 한 『비잔티움』은 문체와 구성에서 그보다 15년 전에 출판된 제임스 클라벨(James Clavell)의 『쇼군』을 떠올리게 만든다. 전국시대 일본에 표류한 외국인 윌리엄 애덤스를 모티브로 쓰인 『쇼군』은 '고결한 야만인 (Noble Savage)'이 새로운 문명과 조우하고, 그 문명의 정치 암투에 휘말려 종국에는 역사를 바꾸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지금도 인생 작품으로 꼽는 독자들이 있을 정도로 영미권 대하소설의 걸작으로 거론된다.


『비잔티움』 또한 유사한 구성이지만 아무래도 『쇼군』 집필 시 이미 베테랑 작가였던 제임스 클라벨이 보여주는 절제된 표현과 수려한 문장과는 달리, 마이클 에니스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비잔티움 제국의 폭력적인 형벌 문화와 외설적인 성관념의 묘사에 집중한다. 하지만 자극적이고 거친 묘사 가운데, 데뷔 작품에서만 느낄 수 있는 날 것의 에너지가 느껴지며, 이는 비잔티움의 문화에 대한 철저한 고증과 함께 독자가 실제로 11세기 콘스탄티노플에서 살아가는 듯한 경험을 하게 해 준다.


『비잔티움』의 주인공은 표면적으로는 하랄 하르드라다이지만 그 외에도 많은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하랄의 애정의 대상이자 두 황녀인 조이와 테오도라의 심복인 마리아는 단순히 주인공의 연애 상대를 벗어나 동로마 시대의 주도적인 여성상을 잘 보여주며, 미하엘 4세의 형인 환관 요아네스(Joannes Orphanotrophos)는 잔악하고 기괴하면서도 황제인 동생에 대한 끝없는 애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입체적인 캐릭터들이 권력을 위해 바닥을 알 수 없는 음모와 진절머리 나는 폭력으로 서로의 목을 졸라 가는 모습을 보자면 몇 년 후에 출판된 조지 R. R. 마틴의 <얼음과 불의 노래>가 떠오르기도 한다.


마이클 에니스의 <비잔티움>은 장점과 단점이 명확한 소설이지만, 자극적인 묘사와 거친 문체를 넘어, 끝없이 꼬리를 무는 음모를 따라가다 보면 8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어느 순간 바람처럼 지나가 버린다. 비잔티움 제국을 무대로 한 최고의 대하소설이라고 하기는 다소 무리가 있지만 (그 영예는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벨리사리우스 백작 (Count Belisarius)』에게 돌리고 싶다), 바랑기아 친위대를 다룬 소설 중에는 역사적 고증과 말초적 재미의 균형을 잘 잡은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끝)


『Byzantium』(1989), Michael Ennis

https://www.goodreads.com/book/show/1013228.Byzant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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