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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bert 이홍규 Dec 20. 2021

대서사극,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영)화

〈잔 다르크의 수난〉 × 〈잔 다르크〉 × 〈잔 다르크의 재판〉

[영화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잔 다르크, 실제 역사에 일어난 기적

중세에 들어선 유럽의 역사는 어느 정도 교차 검증이 가능한 수준에 이르러, 현대인들이 이해하고, 논리에 기반한 연구가 가능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몇몇 개인에 대한 사료는 중세의 사관들이나 기록을 남긴 인간들이 모조리 집단 최면에 걸렸나 싶을 정도로 인지를 벗어난 역사를 남기고 있다. 역사와 기록에 대한 신용과 수용의 정도는 개인차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역사가들과 대중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한 명의 삶이 거시 역사를 바꾼 개인의 예로 로버트 더 브루스, 잔 다르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나폴레옹과 같은 이름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이러한 기라성 같은 인물들 사이에서도, 잔 다르크는 현대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이성적 논리를 압도하는 인생으로 역사의 흐름 자체를 바꿔버린,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녀의 놀라운 인생은 후대의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사회, 정치, 교육적으로 다양한 방면에서 현대에도 즉시적인 영향을 미친다.


(左) 페테르 파울 루벤스 作, 〈기도하는 잔 다르크〉(1620),  (右) 쥘 바스티앙-르파주 作, 〈잔 다르크〉(1789) [출처: Wikimedia Commons]


14세기에 시작된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의 반목, 후대에는 백년전쟁이라 알려질 정도로 지루하게 이어지던 두 국가의 정통성 싸움 와중, 15세기 초에 잉글랜드의 왕 헨리 5세가 아쟁쿠르 전투에서 불리한 전황을 이겨내고 대승리를 거둔다. 승세는 잉글랜드로 넘어가고, 헨리 5세는 평화의 조건으로 프랑스의 국왕 샤를 6세의 딸, 발루아의 카트린과 결혼을 올리면서 둘의 아들인 헨리 6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통합 국왕으로 추대한다는 트루아 조약이 체결된다. 별다른 협약이 있지 않은 한 부계 혈통이 적자로 인정받는 중세의 승계법에 의하면 잉글랜드가 프랑스를 흡수하는 형태였다.


하지만 헨리 6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두 국가 통합의 준비작업을 했어야 할 헨리 5세가 병으로 3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이 조약 자체가 흔들리게 된다. 그렇지만 프랑스의 입장에서 정통성 측면에서는 왕위를 계승해야 할 왕세자(도팽)인 샤를 7세는 이미 헨리 6세에게 왕위 계승권을 빼앗긴 모양새였고, 대관식조차 올리지도 못했다. 전세 측면에서도 미래는 암울했는데, 수도인 파리, 그리고 프랑스 국왕이 대대로 대관식을 올려왔던 랭스를 비롯한 북부 대부분의 도시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내부에서 잉글랜드의 편을 들고 있는 부르고뉴 연합군에게 넘어간 상태로, 정통 프랑스의 운명은 가히 풍전등화라 부를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프랑스의 시골, 동레미라는 이름도 생소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평민 소녀 16세의 소녀 잔 다르크는 3년 전부터 성 미카엘, 성녀 마르가리타, 성녀 카타리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부모도 동반하지 않고 혼자서 영주인 로베르 드 보드리쿠르를 찾아가 왕세자 샤를을 알현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한다. 10대의 시골 출신 평민 소녀가 영주를 만나 직접 청을 올리는 상황도 특이한데, 그 청의 내용도 해괴하다 보니 당연히 보드리쿠르는 거절했지만 잔 다르크는 끈질기게 그를 찾아간다. 소녀는 영주가 노파심에 보낸 사제의 질문도 문제없이 대답했고, 그녀의 간청은 심지어 영주의 기사들의 마음도 움직여 결국 보드리쿠르는 샤를에게 미리 서신을 보내 놓고, 몇 명의 기사를 붙여 그녀를 왕세자가 머물고 있는 시농으로 보낸다.


잔이 머물고 있던 보쿨뢰르부터 시농까지는 400 km이 넘는 거리로,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연합군이 주둔하고 있는 지역을 지나가야 했지만 소녀와 호위 부대는 기적과도 같이 무사히 시농에 도착한다. 미리 도착한 서신을 받았던 샤를 왕세자는 소녀의 대담무쌍한 요청에 의심이 들었는지 일부러 알현실에 대역을 세워놓고 본인은 허름한 옷을 입고 구석에 서 있었는데, 왕세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리가 없는 잔 다르크는 대역이 아니라 숨어 있는 왕세자를 찾아 무릎을 꿇고 자신이 신에게서 들었다는 계시를 전달한다.


군대와 함께 랭스를 탈환해 샤를 7세를 정당한 프랑스 국왕으로 추대할 대관식을 올리고, 프랑스에서 잉글랜드 군대를 몰아내 전쟁을 끝내리라.


여기까지의 진행을 다시 정리하자면, 정치나 전쟁과는 상관도 없는 시골 출신의 문맹 10대 평민 소녀가, 패색이 짙은 전쟁의 끝자락에 목숨을 근근이 연명하고 있는 의심되는 정통성의 왕세자를 간신히 만나, 자신이 왕위를 되찾아주고 백 년 동안 이어진 전쟁을 종결하겠다 선언한 상황이다.


백년전쟁 중 잔 다르크의 군대 진격로 [출처: Simeon Netchev @ World History Encyclopedia]


그리고 그 후의 역사는 우리가 아는 대로 흘러간다. 잔 다르크는 기적과도 같이 연전연승을 이어가며 반년 동안 지난하게 수비를 하던 오를레앙을 10일 만에 탈환하고, 그 후에 이어진 다섯 번의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끌어 랭스까지 진격해, 왕세자 샤를이 샤를 7세로 대관식을 올리게 된다. 그 후, 어떤 이유에서든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에 대한 지원을 멈추었고, 그녀는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혀 종교재판을 받고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잔 다르크가 닦아놓은 기반과 그녀가 변화시킨 전황을 바탕으로 샤를 7세는 부르고뉴파를 회유하는 데 성공했고, 결국 자신의 치세 중 항구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전역에서 잉글랜드 군대를 몰아내 지긋지긋한 백년전쟁의 종지부를 맺는다. 잔 다르크 본인은 살아서 전쟁이 끝나는 과정을 보지 못했지만, 그녀가 들었다는 천국의 계시는 현실화되었다.


현대인들에게는 잔 다르크가 살아간 15세기의 역사나, 구약 성경이나, 트로이 전쟁이 똑같이 오랜 옛날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이미 이 당시에는 수많은 사관과 성직자들이 시대에 대한 기록을 남겨 교차 검증을 통해 실제 역사에 대한 사실판단이 가능한 사료들이 제작되고 있었다. 잔 다르크라는 인물이 워낙 성경의 인물같이 기적의 연속으로 구성된 인생을 살았기에 피부로 와닿지 않을 수 있지만, 위에 나열한 사건의 진행은 주류 역사가들의 합의로 실제로 일어났다고 연구가 마쳐진, 과장이 조금 붙여졌을 수는 있지만 실제로 일어난 현실이다.


시골의 평민 소녀가 오롯이 자신의 신념만으로 거시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다.


비록 개인의 인생은 비극적으로 화형대에서 끝났지만, 샤를 7세는 잔 다르크 사후 25년이 지나서 그녀가 마녀가 아니었고 신실한 교인이었다는 명예 복권을 선언하고, 교황청에서도 이 요청을 받아들인다. 잔 다르크 사후 4세기가 지난 19세기 초에는 잔 다르크에게서 위대한 프랑스의 편린을 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체계적으로 그녀에 대한 영웅화 작업을 진행해 프랑스 제국의 상징으로 내세웠고, 1920년에는 결국 교황청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된다.


그녀의 시성은 초기 무성영화의 부흥과도 맞물려서, 프랑스와 이태리 등지의 영화계에서 여러 번 작품화되었다. 무성영화가 본격적으로 꽃을 피운 20년대에는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감독에 의해 〈잔 다르크의 수난 (La Passion de Jeanne d'Arc)〉(1928)이라는 제목으로 각색되어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라는 평을 받는다. 유성영화가 등장한 40년대에 와서는 할리우드의 최고 흥행 연출가였던 빅터 플레밍 감독과 잔 다르크의 영화화를 필생의 숙원으로 삼았던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에 의해 할리우드의 대서사극 〈잔 다르크 (Joan of Arc)〉(1948)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프랑스 영화 자체를 상징한다고 평가받는 로베르 브레송 감독은 〈잔 다르크의 재판 (Procès de Jeanne d'Arc)〉(1962)을 연출했다.


(左) 〈잔 다르크의 수난〉(1928), (中) 〈잔 다르크〉(1948), (右) 〈잔 다르크의 재판〉(1962) [출처: Wikimedia Commons, IMDb]


물론 언급한 이 작품들은 잔 다르크를 다룬 수십 개의 영화 중 일부에 불과하지만, 잔 다르크의 삶은 영화의 역사와 함께 지속적으로 호흡해왔으며, 거장, 또는 작가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감독들에 의해 여러 번 재해석되었다. 단 한 명의 이야기, 단 한 명의 삶을 다룬 다수의 작품을 통해 그녀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과, 작가의 관점, 그리고 영화라는 매체의 변화를 조망할 수 있는 독특한 기회가 생성된다.


한편, 잔 다르크 본인의 삶이 너무 기적 같았기에, 그녀를 다룬 영화들은 실제로 어떠한 사람이었기에 그러한 기적 같은 일을 행할 수 있었을지에 대한 탐구적 연출이 엿보인다. 그녀의 19년 인생 중, 예수의 공생과 비견할 수 있는 최후의 3년, 또는 최후 재판이 진행된 1년 반이 영상화되었지만, 이들은 영화라는 매체의 시간 및 공간적 제약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영화사에 크고 작은 족적을 남긴 이 감독들은 각각 자신들이 생각하는 인간 잔의 정수(essence)를 정수(distill)하여, 은막 위에서 연출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잔 다르크를 다룬 영화에는 영상 언어의 문법에서 인간성이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연출가 나름의 방법론적 해답이 전면에 배치된다는 대담한 추측이 가능해진다.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조커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출처: BFI]


1889년 덴마크에서 태어난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가 20대가 되었을 때 그는 막 성장하고 있던 영화 업계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가 덴마크의 영화 제작사인 노르디스크 필름에 입사한 시기는 1913년인데, 첫 번째 "장편 영화"로 분류되는 오스트레일리아 찰스 테이트 감독의 〈켈리 갱 이야기〉(1906)가 불과 7년 전에 공개되었음을 감안해 보면, 드레이어는 영화라는 매체가 어떠한 작법, 제작 과정에 대한 기술적 합의가 이루어지기 전에 영상이 가진 힘에 매료되었다고 보인다.


전 세계에서 네 번째로 오래된 영화 제작사, 현재도 운영이 되고 있는 노르디스크 필름에서 드레이어 감독은 무성 영화의 필수 구성 요소인 타이틀 카드(장면 중 상황 및 대사를 설명하기 위하여 삽입되는 자막 슬라이드) 및 대본 작가로 제작을 시작했고, 입사 후 6년 후에는 〈재판장〉(1919)으로 감독 데뷔를 하게 된다.


본국인 덴마크, 스웨덴, 독일 등 북유럽 지역을 오가며 연출한 몇 개의 작품 이후 그는 덴마크에서 〈집안의 주인〉(1925)을 공개했는데 이 작품의 흥행을 계기로 프랑스의 영화 제작사 소시에테 제네랄 데 필름에서 프랑스에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작품을 제작해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영화 제작이 막 산업화되기 시작하던 초창기에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인하여 유럽의 영화 제작이 주춤하던 중, 미국은 광란의 20년대를 상징하던 넘쳐나는 자본과, 그리고 폭발적으로 성장한 중산층의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수요로 인해 스튜디오 시스템을 만들어 유럽 영화와의 제작 규모 격차를 널찍히 벌려놓은 상태였다. 소시에테 제네랄 데 필름은 드레이어 감독에게 거대 자본을 투여함으로 미국의 영화에 맞먹는 프랑스의 역사 블록버스터 제작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 카테리나 데 메디치, 그리고 잔 다르크가 후보에 올라있었고, 결국 잔 다르크가 주인공으로 낙점이 된다.


세 인물 모두 흥미로운 서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지만, 잔 다르크에게는 시의성이 존재했다. 불과 10년 전에 종식된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프랑스 군의 사기를 고양시키기 위한 선전물에 그녀의 이미지가 사용이 되었고, 1920년에는 교황 베네딕토 15세가 그녀를 시성(諡聖)하여, 프랑스의 대표적 수호성인(patron saint)으로 여겨지게 된다.


드레이어는 잔 다르크의 생애를 각색하기 위해 약 1년 반 정도를 기획 및 자료 취합과 연구에 사용하였는데, 결국에는 그녀의 인생 전체를 조망하는 전기 영화보다는 상세한 녹취록이 존재하는 재판 기록에 기반한 루앙의 재판과 화형에 집중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인터뷰에서 재판의 녹취록을 읽으면서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형태에서 마치 공격과 수비가 교환되는 칼싸움과 같은 인상을 받았다고 설명한다.


드레이어 감독이 심문관들과 잔 다르크의 관계에서 포착한 검투적 활력, 그 속도감은 드레이어 감독이 이 작품을 상징하는 창작적 허용으로 이어진다. 그는 실제 역사에서는 약 18개월 동안 지난하게 펼쳐졌던 29개의 심문회에 나뉘어 있던 질의응답을 단 하루의 사건으로 압축한다. 이러한 연출적 결정은 관객이 오롯이 작품 내에서 잔 다르크와 심문관들 사이의 대화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대화를 하는 이들의 표정과 그들이 나누는 대사로만 구성된 영상에 리듬감을 조성한다.


지금도 영화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연기 중 하나로 꼽히는 주인공인 잔 다르크를 연기한 배우 르네 장 "마리아" 팔코네티는 본 영화 이전에는 단 하나의 작품에만 출연했고, 〈잔 다르크의 수난〉 이후 다시 영화로 복귀하는 일은 없었다. 영화보다는 연극 무대에서 주로 활동했다고 전해지는 팔코네티는 19살인 잔을 연기한 1928년 35세의 나이였는데, 주인공 역할 배우를 찾는데 난항을 겪고 있던 드레이어 감독이 방문한 빅토르 마르그리트의 희극 〈그레송〉 무대에서 그녀의 연기를 2회 차 관람 후 캐스팅되었다.


드레이어 감독은 영화를 기획하면서 잔 다르크의 재판이 이루어졌던 15세기의 수채화 및 유화 작품을 연구했는데, 아직 원근법이 완전히 정립되지 않았던 이 시기의 미술작품들은 배경의 건축물을 작게 그리고, 작품 전면에 배치되어 있는 인물들은 집이나 교회 같은 건물보다 훨씬 크게 그려지는 경향이 있었다. 크라이테리온 홈비디오에 함께 수록되어 있는 영화의 미술 디자인 기록물에 따르면 드레이어는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당시 기준으로) 유럽 영화계를 통틀어 가장 비싼 예산인 700만 프랑크를 들여 중세의 루앙 성을 심지어 석고도 아닌 콘크리트로 재연해냈다. 직접적인 비교가 무의미할 수는 있지만 1928년 기준 700만 프랑크는 약 41만 그램의 금과 동일한 가격으로 2021년 기준으로는 약 2천4백만 달러 (한화 285억 원) 정도로 환산이 될 수 있다. 이 성은 촬영의 효율을 위해서 세트별로 분리되지 않고, 실제 성과 동일하게 모든 세트장이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완성된 건축물로 완성되었다.


〈잔 다르크의 수난〉 촬영장 사진 [출처: Oscars]


영화의 제목은 〈잔 다르크의 수난 (La Passion de Jeanne d'Arc)〉으로 정해졌다. 일반명사 "열정"이라고 번역이 되고는 하는 영단어 "Passion"은 고유명사로 가톨릭과 기독교 신앙의 문맥에서 고유명사로 사용될 경우,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십자가에 오르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그를 다룬 성화를 칭하고 있다. 이후 가톨릭 신앙이 유럽 전역으로 뻗어나가며 고통받고 목숨을 잃는 신자들이 많아지자, "Passion"은 단순히 예수뿐만이 아니라 신앙을 위해 희생을 하는 성인들의 순교 과정을 지칭하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이는 "passion"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로마 가톨릭의 공식 언어인 라틴어 "patior", 즉 "고통에 시달리다", 또는 "고통을 참아내다"에서 왔기 때문인데, '고통에 대한 인내'와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의 어원이 같다는 점은 무척 흥미롭다.


여느 무성영화가 그렇듯이 〈잔 다르크의 수난〉은 개봉 당시 라이브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되었는데, 레오 푸제와 빅토르 알릭스라는 작곡가에 의해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은 현대까지도 남아있다. 하지만 〈잔 다르크의 수난〉은 유성영화 시대 이후 영화에서 영감을 받은 다양한 뮤지션들의 시도로 새로운 사운드트랙과 함께 상영되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버전은 1994년 작곡가 리처드 아인혼이 공개한 "빛의 음성 (Voices of Light)"이라는 작품으로, 유명 고전영화 홈비디오 제작사인 크라이테리온 컬렉션에서 본 작품을 복원하여 DVD로 출시하였을 때 수록되었던 사운드트랙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한편, 크라이테리온 컬렉션에서 2018년 해당 작품을 블루레이로 출시하면서는 2010년 밴드 포티스헤드의 에이드리언 어틀리와 밴드 골드프랩의 윌 그레고리가 작곡한 새로운 사운드트랙을 포함하기도 했다.


1928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했지만 극심한 피해를 입었던 프랑스 인들에게, 시성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잔 다르크의 숭고한 이야기가, 그 역사에 걸맞은 거대한 규모의 예산과 창작적 비전이 투입된 영상 예술 작품, 야심 찬 블록버스터 무성 영화로 완성되어 공개될 준비가 되었다.


그리고 칼 드레이어 감독은 이러한 천우신조의 기회 속에 영화 역사상 가장 순수하고 이율배반적인 작품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인간의 얼굴

〈잔 다르크의 수난〉(1928) [출처: FILMGRAB]


〈잔 다르크의 수난〉은 파리에 있는 국회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잔 다르크의 재판 녹취록을 소개하는 자막이 화면에 스크롤업 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카메라는 그 귀한 고문서를 (보는 이가 걱정될 정도로) 거칠게 다루는 손을 화면에 담는다. 손과 고문서는 영화의 의도를 소개하는 감독의 말과 함께 교차 편집된다. 드레이어 감독은 이 녹취록을 통해 투구와 갑옷을 입은 잔 다르크가 아니라, 조국을 위해 죽은 젊은 인간 여성, 잔 다르크와 조우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녹취록의 글자 속에는 중세의 신실한 여성이 독실한 신학자들과 숙련된 변호사들에게 잔혹하게 공격당한 경위가 역사적 사실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카메라는 15세기의 루앙 성으로 넘어가, 잔 다르크를 기다리는 재판장을 비춘다.


아직 영상물의 장르적 분류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초기 영화 시대에 만들어진 본 작품이지만, 영화를 시작하는 초반의 연출은 현대의 관객에게 묘한 기시감을 제공한다. 미국에서는 PBS에서 방영되고 하는 켄 번스 감독의 작품이나, 한국의 공영방송에서 제작되는 역사 다큐드라마와 거의 동일한 형태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모든 전기영화는 일종의 다큐드라마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드레이어 감독이 이 영화를 역사적 사실에서 시작한 연출적 결정은 관객에게 영화를 관람하는 태도 이상의 신용을 간구하는 듯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이 영화의 사건은 실제로 일어났으며, 잔 다르크라는 19세의 시골 소녀는 실제로 프랑스의 왕세자를 만나 그를 대관식에 세우고,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힌 후에는 문맹인 자신보다 훨씬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신학자들과 변호사들의 수사학적 공세를 1년 반이나 성공적으로 방어해냈다. 이는 일어났으며, 잔 다르크라는 소녀가 5세기 전 실제로 살아갔다.


이 글은 드레이어의 간구가 기적을 믿어달라는 호소라는 해석에서 시작한다.


영화가 15세기로 넘어가면서 (개봉 당시 영화계에 도는 제작 후문을 들은) 관객은 7백만 프랑크가 들은 루앙 성의 위대한 전경을 기대했으리라. 하지만, 영화의 시작에서도, 심지어 영화의 끝까지도 내 루앙 성의 전경이 카메라에 담기는 숏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영화에서는 제작에서 말하는 설정 숏(establishing shot)이 사용되는 경우가 없다. 대부분의 영화는 (특히 역사 영화라면 더욱), 시대적 배경, 또는 사건적 문맥을 이해를 돕는 롱 테이크의 설정 숏으로 시작하며, 이는 영화를 접하는 '관람의 시대'와 영화 상의 '영상의 시대'의 간극을 좁히는 연출적 도구로 사용된다. 한술 더 나아가, 이 영화에서는 초반의 재판 시작 밑 몇 개의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는 개별 씬에 등장할 장소와 인물을 소개하는 마스터 숏(master shot)도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분리된 세트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된 총체적 루앙 성을 재연한 세트는 이러한 마스터 숏의 효율적 사용을 도왔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지만, 드레이어 감독은 굳이 마스터 숏을 사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는 단순히 이 작품이 영화사의 초기에 위치했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영화의 작법이 정립되기 이전에 제작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본 작품의 연출적 결정은 개봉 당시에도 의아하게 여겨졌으며, 심지어 미술과 세트 디자인에 거액을 투자한 소시에테 제네랄 데 필름의 제작자들은 영화 최종 편집본을 보았을 때 대단히 분노했다고 전해진다.


오히려, 영화의 대부분은 인물의 얼굴을 극단적으로 가까이서 담는 클로즈업 숏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치, 역사의 잔 다르크와 우리의 거리가 멀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안타까워해, 카메라를 그 거리를 단축시키는 타임머신으로 활용하여, 그녀와 그녀를 질문으로 고문한 신학자들의 실재성을 증명하려고 노력하듯이, 드레이어는 화면 전체에 질문자와 대답자의 얼굴을 담는다.


잔 다르크(마리아 팔코네티), 피에르 코숑(유진 실베인), 〈잔 다르크의 수난〉 [출처: FILMGRAB]


영화가 시작되며 우리는 영화의 악당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고령의 신학자 피에르 코숑(유진 실베인)의 (몹시도 신경 쓰이는 이마의 거대한 사마귀가 포함된) 얼굴과 짧은 시간에도 그녀가 처한 상황, 그리고 그녀에게 압축된 시대의 비극이 모두 담긴, 어떤 거대한 슬픔으로 조형이 된 듯한 잔 다르크(마리아 팔코네티)의 얼굴을 만난다.


촬영에 설정 숏과 마스터 숏이 결여되어 있었다면, 배우의 분장에는 화장이 결여되어 있다. 그들의 얼굴은 그들의 인생이 담긴 주름살과 흠집이라고 여겨질 만한 사마귀, 점, 상처들이 분장 없이 그대로 제공된다. 무대 연극과의 연출적 방법론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던 초기 무성 영화에서 과장된 화장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던 당시의 영화 작법과는 완전히 상반된 연출적 결정이었다.


드레이어와 촬영 감독 루돌프 마테는 화장을 통하여 인물의 연기, 또는 감정 전달을 돕는 대신에 조명을 사용하여 잔과 코숑의 얼굴에 분위기를 조성한다. 잔을 비추는 조명은 부드러운 빛으로, 그녀가 처한 무력한 상황과 감정을 고조시키고, 코숑을 비롯한 신학자들에게는 강하고 밝은 빛을 비춰 그들의 얼굴에 드리워지는 강한 명암으로 교조적이고 강압적인 그림자를 드리운다.


영화의 내용은 실제 원전이 된 녹취록 중, 드레이어 감독이 취사선택한 잔과 심문관들 사이의 질의응답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문관들은 잔이 들었다는 계시의 목적을 묻는다. 잔은 자신이 프랑스를 구원하기 위해 보내졌다고 대답하자, 심문관들은 그렇다면 신이 잉글랜드를 미워하는지 질문한다. 당시의 잉글랜드는 아직 독실한 가톨릭 국가였으며, 잔이 만약 대답을 잘못한다면 기독교적 해석을 들어 그녀를 이단으로 몰 수 있는 질문이다. 잔은 신이 잉글랜드를 미워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은 그들이 프랑스에서 떠나기를 바란다 대답한다. 또 다른 질문은 그녀의 계시를 전달했다는 천사들의 모습에 관한 내용이다. 성 미카엘을 보았다는 그녀의 대답에 심문관들은 그들이 옷을 입고 있었는지 질문한다. 만약 잔이 그들의 옷에 대해 상세하게 대답하거나, 벗고 있었다는 대답을 한다면 성경에서 그녀의 대답과 상이하는 구절을 들어 이단으로 몰기 위한 함정이 숨어있는 질의였다. 하지만 잔은 오히려 심문관들에게 "신이 천사에게 옷을 입히지 못하리라 생각하냐"라고 반문한다.


오늘날의 역사학자들을 당황시키는 잔 다르크의 면모는 시골 소녀가 프랑스 군대를 이끌어 구국의 기회를 만들었다는 부분만큼이나, 그녀가 1년 반 동안 고문에 가까운 심문을 받았음에도 영국과 프랑스 최고의 신학자들이 그녀의 신앙 고백에서 교리에서 어긋나는 대답을 하나도 찾지 못했다는 기록이다.


드레이어 감독은 이렇게 그녀를 화형대로 몰아가기 위한 함정으로 가득 찬 교리 질문을 아무런 막힘 없이 솔직한 신앙으로 대답한 19세 잔의 모습을 칼싸움으로 비유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그녀의 공생 중 후반인 재판만을 다루고 있음에도, 전쟁터 한가운데서 살의로 가득 찬 공격을 피해 승리를 거둔 16세의 잔의 모습을 함께 담고 있다는 대담한 해석도 가능해진다.


하지만, 오를레앙에서 투구와 갑옷을 착용하고 목에 화살을 맞았음에도 응급치료만 하고 다시 전투로 복귀했다는 16세 소녀의 모습은 드레이어 감독이 생각한 인간 잔 다르크를 20세기에 재구성하기에 최적의 화면은 아니었으리라. 이 지점에서 관객은 드레이어 감독이 그녀의 재판만을 화면에 담기로 결정한 이유에 어느 정도 공감을 하고, 그가 내린 연출적 결정과 팔코네티의 연기적 결정을 이해하게 된다.


팔코네티(그리고 코숑을 위시한 다른 조연 배우들 모두)는 당시 무성 영화의 트렌드와는 다르게 과장된 제스처를 사용하지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대사가 오디오로 전달되지 않았던 무성 영화에서는 연기에 마임적 요소가 숨어있었고,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온 몸을 사용한 연기가 선호되었다. 하지만 드레이어 감독은 심문관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잔 다르크의 신체 제스처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듯이, 심지어 어깨도 화면에 드러나지 않도록 그녀의 얼굴에 오롯이 집중한다. 카메라의 대상인 팔코네티는 자신의 얼굴을 극도로 가깝게 잡고 있는 화면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갑작스럽고 과장된 움직임을 참아내고 느린 호흡으로 고개를 떨구거나, 눈물을 흘려낸다.


잔 다르크(마리아 팔코네티), 〈잔 다르크의 수난〉 [출처: FILMGRAB]


팔코네티의 잔 다르크를 담아내는 드레이어의 카메라에는 역사 영화에서 종종 느껴지는 역사와 카메라 간의 거리가 결여되어 있다. 드레이어 감독은 배우 팔코네티에게 잔 다르크의 연기가 아니라, 잔 다르크로 변화해달라는 주문을, 관객에게는 영화에서 유흥이 아니라 현실을 마주해달라는 요청을 보낸다.


드레이어 감독은 추후 영화에 대해 논한 인터뷰에서 그 거대한 세트를 건축한 이유에 대해 배우들이 연기에 몰입하는 과정을 도왔다고 대답했다. 단 한 명의 배우도 화장을 시키지 않은 이유는 현실성을 살리고 싶어서였다 설명한다.


몇 개의 마스터 숏을 포함해 어느 정도 기존 영화 문법을 사용하던 영화의 초반부와 다르게, 그녀에 대한 거센 공세가 연속되면서 잔은 점점 더 용기를 잃어간다. 1년 반에 가까운 심문 과정을 하루의 질문 공세로 압축한 본 작품이지만, 영화 상의 잔 다르크는 1년 반의 정신적 고통을 그대로 감내해야 한다. 드레이어 감독은 그런 그녀의 정신 상태를 대변하듯, 영화의 기본적 구성 요소중 하나인 연속성(continuity)을 포기해 간다. 180도 규칙, 시선과 인물의 위치 일관성이 점진적으로 사라지고, 관객은 실제 역사에서 거의 잠을 잘 수 없었던 잔 다르크가 겪었던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 그 상태가 자아내는 열병과도 같은 현실의 악몽화에 잠식되어 간다.


결국 남장을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단이라는 결정적 증거로 몰아간 심문관은 잔 다르크를 화형장으로 보낸다. 화형을 기다리는 잔의 얼굴에는 우리가 영웅에게 기대하는 대담함, 자신의 결백에 대한 확신이 결여되어 있다. 그녀는 심지어 역사에 기록된 대로 화형을 당하기 직전,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주는 그녀에게 호의적인 소수의 신학자들의 간청으로 역사에 기록된 대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문서에 서명까지 한다. 그리고, 역사에 기록된 대로,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고 자의로 화형장으로 돌아간다.


잔 다르크(마리아 팔코네티), 〈잔 다르크의 수난〉 [출처: FILMGRAB]


이 모든 과정에서 잔의 얼굴에는 가톨릭의 성인, 구국의 영웅을 연상시킬만한 그 어떠한 용기도 담겨 있지 않다. 세상에게 버려져 19살의 나이에 죽음을 마주해야 하는 소녀의 얼굴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곧이어 불길에 타오르는 그녀의 얼굴,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심문관, 화형을 구경하러 온 많은 시민들의 얼굴을 보면서 관객은 문득 이 카메라가 담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고 카메라 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죽었다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그 누구도 살아남아서 자신의 의도, 감정, 영화 제작 비화, 세트장에서의 기분을 전달할 수 없다. 영화가 제작된 지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우리에게 남은 기록은 영화 자체뿐이다.


잔 다르크에 대한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한 드레이어 감독이 파리의 국회 도서관에서 녹취록을 처음 만났던 순간을 상상해보자. 그는 문자적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잔 다르크의 음성을, 순수하지만 흠결이 없는 대답을 해가던 잔 다르크의 표정을 상상해보았으리라. 그리고, 잔 다르크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더 이상 만들어질 수 없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기록 안에서 그녀를 재구성해야 함을 깨달았다.


〈잔 다르크의 수난〉을 단순히 실험적 연출, 사실적 연기에 기반해, 시대적 특성을 감안해 상대적으로 놀라운 작품이라 부르기에는 영화가 간직한 원초적 아름다움을 설명할 수 없다. 21세기에 관람한 이 작품에는 영화의 기록성에 대해 가장 기민하고 본능적으로 반응해 카메라를 움직인 감독의 인간에 대한 순수한 애정과, 그 대상이 되는 역사적 인물이 살아간 삶만큼이나 기적적으로 화면에 담아내는 데 성공한 배우의 얼굴이 담겨있다.


빅터 플레밍, 스튜디오 에이스

비비안 리, 클라크 게이블, 빅터 플레밍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 세트 사진 [출처: Britannica]


빅터 플레밍 감독은 할리우드 황금기를 상징하는 두 작품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와 〈오즈의 마법사〉(1939)를 같은 해에 연출한 감독이지만, 묘하게 영화사를 논할 때 위대한 감독의 반열에는 들어가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로는 전자의 경우 현대에 들어서 원작이 되는 소설과 영상 작품 자체에 어려있는 남부와 노예제 미화에 대한 본격적인 반감, 그리고 후자는 주인공 도로시를 연기한 주디 갈랜드의 비극적인 삶과 촬영장에서 그녀의 뺨을 때렸던 플레밍 감독의 일화 등 영화 외적인 비화가 대중에게 유명해졌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 외적인 이유를 차치하더라도, 빅터 플레밍 감독 연출론을 비롯한 진지한 비평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흔히 말하는 할리우드 황금기의 스튜디오 시스템과 스타 시스템을 상징하는, (작가주의 감독의 반대에 서 있는) 직장인 감독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에 와서 미국의 유명 비평가인 마이클 스라고의 『빅터 플레밍: 미국의 영화 명인』 및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고평가로 인해 그에 대한 감독론 및 진지한 논의가 시작되기는 했지만, 플레밍의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 영화 그 이상의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할리우드의 스튜디오 및 스타 시스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20년대 이후의 영화계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1920년대 이후, 유성 영화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영화제작사들은 제작부터 배급, 심지어 영화관 운영까지, 영화 산업 가치사슬을 수직 통합한 공룡 제작-배급사들의 경쟁으로 이어졌다. 이들 중 가장 사이즈가 큰 회사들을 '빅 파이브'로 불렀는데, 1930년대 당시에는 RKO, MGM, 폭스, 파라마운트, 워너브라더스가 꼽혔다. 그 이외에도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유니버설, 컬럼비아가 그 뒤를 바짝 추격해 8개의 회사에서는 미국의 대표 문화산업으로 떠오른 영화를 공장처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21세기의 빅 파이브인 유니버설, 파라마운트, 워너브라더스, 월트 디즈니, 컬럼비아 중 회사의 수장인 하워드 휴즈의 방만한 운영으로 회사 자체가 날아가버린 RKO와, 규모가 줄어들어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와 합병한 MGM를 제외하고는 4개의 회사가 1930년대의 8개 회사에서 전신을 찾을 수 있음을 상기해보면 대중문화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수익성 및 영상 지적재산의 저력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이 메이저 스튜디오들은 광란의 20년대, 폭발적으로 성장해가는 유흥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영화를 공장과도 같은 형태로 제작해나갔다. 은막의 전면을 장식하는 배우, 즉 스타들은 이러한 스튜디오에 독점 계약이 되어 1년에 10개~20개 사이의 작품에 출연해가면서 대중들에게 이미지를 어필했다. 감독들은 스튜디오에 전속 계약이 되어 같은 로스터의 배우들을 돌려가며 캐스팅 해 영화의 대량생산화에 일조했다. 심지어 한 영화를 만들면서도 여러 감독이 투입되는 경우도 다양했다. 당시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 아래서의 감독은 제작자의 비전을 현실화시켜주는 어용 예술인에 가까웠다. 빅터 플레밍 감독은 MGM에 소속되어있는 감독이었다.


하지만 광란의 20년대에 취해 있던 미국의 중산층이 대공황을 겪으면서 영화 제작-배급사 역시 직간접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제조산업에 비해서는 큰 타격은 아니었지만, 제작-배급사들 중 영화관 의존도가 높았던 RKO, 파라마운트, 폭스는 모두 큰 타격을 입었으며, 워너브라더스는 자산의 1/4을 매각하면서 살아남았다. 이 중 MGM은 빅 파이브 중 포트폴리오에서 영화관 의존도가 낮았기 때문에 크게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있었다.


다행히 1930년대 후반, 미국은 대공황에서 회복하기 시작했으며, 메이저 영화 스튜디오 중 오히려 대공황을 기회로 1위로 치고 나간 MGM은 1932년부터 다양한 흥행작을 무리 없이 감독해낸 빅터 플레밍에게 블록버스터 프로젝트인 〈오즈의 마법사〉 연출을 맡긴다. 〈오즈의 마법사〉는 기획 단계에서 리처드 소프, 조지 큐커 등 몇 명의 감독들이 투입되었다가, 최종적으로 빅터 플레밍이 낙점되어 영화의 대부분을 연출했다. 하지만, 플레밍이 영화를 완성하기 전, MGM은 또 다른 텐트폴 작품이었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촬영장에 비상상황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영화의 제작자인 데이비드 O. 셀즈닉이 촬영 시작 후 3주 만에 조지 큐커 감독을 해고하면서 촬영장에 난리가 나자, MGM의 간부들은 플레밍을 급하게 그쪽으로 배정한다. 그리고 플레밍의 친구인 킹 비더가 〈오즈의 마법사〉의 촬영을 마무리한다.


이런 스튜디오 시스템의 월급 감독과 스타들의 삶을 잘 담아낸 작품으로는 코엔 형제의 〈헤일, 시저!〉(2016)가 있는데, 이 작품은 플레밍의 에피소드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인 1950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할리우드 황금기의 영화 세트장 생태계를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코엔 형제 감독, 〈헤일, 시저!〉(2016) [출처: FILMGRAB]


빅터 플레밍 감독이 영화사에서 (인플레이션을 감안해) 가장 큰 수익을 올린 작품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컬러 영화의 시대를 열었다 평가되는 오즈의 마법사를 연출했음에도 진지하게 논의되지 않는 이유는 아마 이러한 영화 외적인 연유가 크지 않을까 생각된다.


현대로 따지면 회사의 에이스 팀장으로 다양한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던 플레밍 감독의 마지막 작품은 특이하게도 MGM이 아니라 RKO에서 배급한 〈잔 다르크〉(1948)였다. 플레밍의 전기를 쓴 스라고는 이에 대해 당시 플레밍 감독이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과 연인 관계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카사블랑카〉의 성공 이후, 히치콕의 뮤즈로 할리우드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버그만은 개인적인 숙원이었던 잔 다르크 전기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했고, MGM과 오랜 협업 관계를 유지하던 플레밍 감독의 섭외는 연인 관계였던 감독과 배우 간 영화 외적인 사유로 성사되었다고 본다면 이해가 가능하다.


하지만 촬영을 마치고 영화의 첫 편집본을 본 플레밍 감독은 자신의 작품에 크게 실망했다고 전해진다. RKO에 의해 공개된 버전은 145분의 대형 사극으로, 당시 시대를 감안하면 높은 성적인 4백만 달러가 넘는 박스오피스 흥행을 기록했지만, 높은 제작비로 인하여 이러한 중세 블록버스터 영화에 기대되던 고수익 창출에는 실패한다.


플레밍 감독은 영화 개봉 후 두 달 후에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버그만은 작품 완성 후 유럽으로 넘어가 로셀리니 감독과 연인 및 협업 관계를 시작하면서 〈잔 다르크〉는 할리우드의 대서사극 영화 목록에서 잊힌 작품으로 남게 된다.


소녀의 얼굴

잔 다르크(잉그리드 버그만), 〈잔 다르크〉(1948) [출처: The Hollywood Reporter]


잔 다르크를 다룬 대부분의 영화에 적용되는 이야기지만, 플레밍의 〈잔 다르크〉는 연출적 접근만큼이나, 잔을 연기한 배우, 이 경우 잉그리드 버그만의 입장에서 조망했을 때 활력이 존재하는 비평선에 도착할 수 있다. 실제로 플레밍의 전기를 쓴 스라고는 〈잔 다르크〉의 제작기를 다룬 챕터에 "잉그리드 버그만과 〈잔 다르크〉"라는 제목을 달기도 했다.


〈잔 다르크〉가 그린라이트 되기 이전 해인 1946년부터 버그만은 브로드웨이의 알빈 극장에서 작가 맥스웰 앤더슨의 〈로렌의 잔 (Joan of Lorraine)〉에서 주인공인 잔 다르크를 연기하고 있었다. 총 12주간 공연한 이 작품은 모든 공연이 매진되었으며, 75년이 넘은 지금도 브로드웨이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공연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버그만은 이 작품을 통해 대중적 인기와 비평적 성공을 모두 거두었으며, 심지어 주변의 인물들은 버그만 본인이 잔의 환생이라는 신념을 가졌다 평가하기도 했다.


〈로렌의 잔〉은 기존의 잔 다르크의 삶을 묘사한 성인전, 즉 하기오그라피(hagiography) 형식과는 다르게, 잔 다르크의 연극을 연기하는 현대 배우들의 삶을 묘사한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버그만의 연기는 그녀에게 1947년 처음으로 제창된 브로드웨이 연극 및 공연 전문 시상식인 토니상의 첫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


[사족. 참고로, 이 토니상 덕분에 그녀는 〈가스등〉(1944)에서 수상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나사의 회전(1960)에서 받은 에미 여배우상과 함께 헬렌 헤이스 이후 연기 트리플 크라운을 수상한 두 번째 여배우로 남는다.]


명실공히 할리우드 최고의 여배우로 성장하고 있던 잉그리드 버그만의 연기를 보기 위해 할리우드의 다양한 예술가들과 제작자들이 직접 그녀의 연기를 보러 방문하거나, 그녀에게 다음 프로젝트를 위한 러브콜을 보냈는데, 이 중 존 포드 감독의 〈역마차〉(1937), 머나먼 항해(1940)의 제작자로 유명한 월터 웨인저도 포함되어 있었다. 웨인저는 자신의 숙원 작품인 로자몬드 레이먼의 발라드와 근원 (The Ballad and the Source)의 주인공으로 버그만을 캐스팅하기 위해 친분이 있던 빅터 플레밍을 브로드웨이로 보낸다.


〈로렌의 잔〉 공연을 방문했던 플레밍은 백스테이지에서 버그만을 만나 그녀의 연기를 극찬했다. 스라고는 당시 두 명의 주변 인물들과 버그만 본인의 자서전을 인용해 5년 전 〈지킬 박사와 하이드〉(1941)을 통해 만났던 영화계 동료였던 둘의 관계가 이 만남을 계기로 연인으로 발전했다고 추측한다. 버그만 본인은 플레밍이 그녀를 보자마자 흥분에 가득 차 무슨 일이 있어도 영화에서 잔 다르크를 연기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고 술회한다. 플레밍은 그녀와 만남 이후 웨인저에게 전화를 해 버그만이 주인공인 잔 다르크 영화를 제작해야 한다고 설득했고, 웨인저는 원작자인 앤더슨에게 연락해 작품을 영상화하는 제안을 공식화한다.


영화의 준비 과정 중 플레밍과 버그만은 둘 모두 각자의 가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불륜 관계를 지속했다. 버그만은 이 작품이 자신의 인생 역할이라는 신념 때문에, 플레밍은 그녀에 대한 애정과 더불어 자신이 평생 추구했던 대형 사극을 스튜디오 시스템 밖에서 만들 수 있다는 연출적 자유도 때문에, 웨인저는 자신이 제작에 참여했던 작품 중 이 정도로 전성기의 배우와 연출가, 극작가가 협업을 할 기회가 다시는 없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에, 〈잔 다르크〉의 주역들은 개인적으로 큰 자금을 출자해 아예 이 작품 제작만을 위한 '시에라 픽처스'라는 제작사를 설립한다.


잉그리드 버그만, 빅터 플레밍, 〈잔 다르크〉의 세트장 및 시사회 [출처: Classic Movie Hub, Wikimedia Commons]


이 글은 이 영화에 관계된 모든 인물이 작품의 창작에 있어 건강한 거리감을 두지 못했던, 열병과도 같은 정신 상태에서 접근했다는 주장에서 시작한다.


플레밍과 버그만, 그리고 앤더슨은 영화 촬영에 돌입하기 전 뉴욕의 근대미술관(MoMA)에서 상영한 드레이어의 〈잔 다르크의 수난〉을 관람했는데, 앤더슨은 관람 후 작품에 끌리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플레밍에게는 어떠한 면에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는데, 플레밍 감독의 전작 모두를 통틀어서 주연 여배우의 클로즈업 샷이 가장 자주, 길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스라고는 이러한 결과물에 다소 냉소적으로 미혹(infatuation)이지 연출이 아니라 평했다.


오히려 웨인저는 3년 전에 개봉해 세계적으로 큰 비평적 성공과 흥행을 거둔 로렌스 올리비에의 〈헨리 5세〉(1944)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그는 〈헨리 5세〉의 미술과 의상 담당자들을 섭외하고 싶어 했으며, 이 협업이 무산되자 〈헨리 5세〉의 의상을 빌려오려는 시도까지 했다. 실제로 완성된 영화의 미술과 색감은 원작이 된 앤더슨의 현대적 각색과는 다르게 〈헨리 5세〉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테크니컬러의 정통 중세 사극으로 연출되었다.


앤더슨 본인은 기획 초반에는 극본의 각색에 참여했지만, 버그만과 플레밍 요구가 과해지자 버그만을 "멍청한 스웨덴 여자"라고 부르면서 영화 제작에서 손을 떼었고, 각색은 할리우드의 젊은 작가 중 각광을 받고 있던 앤드루 솔트가 이어받아서 완성하게 된다.


〈잔 다르크〉는 두 개의 버전이 있는데, 플레밍이 처음으로 공개했던 145분의 RKO 배급용 오리지널 컷, 그 후 45분이 편집된 100분의 발보아 필름 배급용 편집본이었다. 오리지널 컷은 첫 공개 이후 사운드트랙이 소실되어 약 50년 가까이 대중에게 공개가 되지 않다가, 1998년에 유럽에서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이 발견된 이후 복원되어 2000년대에 홈비디오로 발매되었다.


영화는 어떤 바실리카 내부에서 조안의 시성식 무대가 연상되는 숏으로 시작이 되어, 내레이션을 통해 풍전등화의 상황에 놓인 프랑스에 대한 설명과 어린 소녀 잔을 위한 무대를 마련한다. 1428년, 동레미에 살고 있는 16살의 잔 다르크(잉그리드 버그만)가 신의 계시를 받고, 이듬해 보쿨뢰르의 영주 로베르 드 보드리쿠르(조지 컬러리스)를 설득한 과정, 시농에서 도팽(호세 페레르)를 접견하고, 추후 자신의 가장 듬직한 우군이 되어줄 도팽의 사촌 알랑송 공작(존 에머리)과 조우한 사건이 연대순으로 이어진다.


잔 다르크(잉그리드 버그만), 〈잔 다르크〉 [출처: Zekefilm]


오를레앙 공성전에 참여한 잔은 자신을 바라보는 군대의 불신 어린 시선을 견뎌내고 직접 깃발을 들고 오를레앙 성으로 진격해 6개월 동안 지지부진했던 공성전을 10일 만에 종식한다. 랭스에서 도팽이 샤를 7세로 대관식을 거행하는 광경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 살아있는 성녀, 프랑스 군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되지만, 잔의 영광은 마치 화무십일홍처럼 여기에서 너무나도 아쉽게 끝이 나고 만다.


국왕의 자리에 오른 샤를 7세는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과 전면전 대신 평화조약을 목표로 하고, 잔에게서 군사 지휘권을 회수한다. 어느덧 신의 계시를 듣지 못하고 방황하던 잔은 한 성당에서 기도를 하며 자신에게 계시를 내려달라 간구하다가 대답을 듣지 못하자 혼자라도 전쟁터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녀를 따르던 몇 안 되는 병사들은 곧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에게 패배해 잔은 포로가 되어 파리로 이송된다. 파리에서 코숑 주교(프란시스 L. 설리번)가 이끄는 심문단은 잉글랜드의 섭정관인 워릭 백작 리처드 보챔프(앨런 네이피어)의 사주로 잔을 1년 반 동안 함정에 빠트리기 위한 심문을 하지만 이렇다 할 실적을 내지 못한다. 결국 잔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남장을 빌미로 그녀를 화형장으로 보내고, 잔은 기적과도 같은 19세의 삶을 마치게 된다.


잔 다르크(잉그리드 버그만), 〈잔 다르크〉 [출처: Zekefilm]


스라고의 플레밍 전기에 따르면 영화가 완성되기 전, 플레밍과 버그만은 불륜 관계를 청산했다. 이후, 플레밍의 지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플레밍은 완성된 영화를 보자 작품성에 대한 후회가 컸는지 울음을 터뜨렸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해 크리스마스에 그와 시간을 보냈던 지인은 "그 영화 완전 재난이다"라는 플레밍의 고백을 들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제작자인 웨인저는 이 작품에 대한 자부심이 몹시 높았고, 실제로 작품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자신을 위한 명예 오스카상과 더불어 총 7개 부문에 올랐지만 작품상 후보에서 탈락하자 명예 오스카 수상을 거부하기도 했다.


19세인 잔을 연기한 잉그리드 버그만은 당시 33세의 나이에, 모국어인 스웨덴어와 제1 외국어인 독일어에 이어, 영어가 제2 외국어라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었지만, 실제 영화를 보게 되면 다양한 클로즈업에서 비치는 그녀의 외모나, 거의 대부분에 씬에 잔이 등장하는데도 그녀의 연기력에 모자람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잔 다르크를 다룬 기타 예술 작품 중 드레이어의 작품에서 팔코네티가 그려낸 슬픔의 아바타, 당시 유명했던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 『성녀 잔』(1923)에서 그려지는 저항적 여성이 몹시 유명했는데, 버그만은 오히려 순수한 시골 출신의 소녀였던 잔을 그려내는데 집중한다. 순진무구한 잔이 그 순수함을 끝까지 간직한 채 화형장으로 가는 본 작품은 버그만이 택한 연기 노선 때문일까, 아니면 버그만을 열렬히 사랑했던 플레밍의 애정이 넘치는 탐미주의적 연출 때문일까, 잔 다르크를 다룬 그 어떠한 영상화와 비교해도 독보적으로 낭만이 넘치고 낙관적인 열정이 살아있다.


원작이 되는 희곡 작가 앤더슨이 기획단계 중간에 각색을 포기하기는 했지만, 본작에는 불가사의하게 연극과 같은 감상이 느껴진다. 원경을 페인트로 칠한 세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미술적 세트 때문일 수도 있고, 신앙의 고백을 위한 잔의 독백이 배치되어서 그렇게 느껴지기도 한다. 〈로렌의 잔〉에서 대호평을 받았던 버그만이 원작 연기를 완전히 버리지 않고 재활용을 해서라는 추측도 가능하고, 제작자인 웨인저가 영감을 받았던 〈헨리 5세〉가 셰익스피어 원작의 무대와 공연성을 적극 활용했기에 일련의 영향이 남아있을 수도 있다.


오를레앙 공성전, 〈잔 다르크〉 [출처: Zekefilm]


낭만적이고 연극적인 본 작품의 연출은 영화 개봉 당시, 그리고 추후에도 이 작품에 대한 평에 호불호가 갈리는 결과를 낳는다. 홀로 신앙을 고백하며 신의 계시를 듣고 대답하는 독백 씬이 다수 존재하는 본 작품 내에서, 신의 계시를 듣거나, 아니면 계시를 기다리는 잔의 얼굴에 머물러 있는 클로즈업 숏들은 버그만의 화려한 외모 때문에 인상적이기도 하지만, 한편 이 작품이 대하사극이라는 장르에 분류되기에는 너무 정적이라는 평을 듣게 만들기도 한다. 평론가 레너드 말틴은 본 작품에 대해 스펙터클이 너무 적고 말이 너무 많다고 평했는데, 대하사극이라면 안소니 만 정도로 서정적이면서도 박진감 넘치거나, 드라마라면 인물의 내면 변화에 집중하거나, 하나의 노선을 택해야 할 연출 방향에 영점이 잡히지 않았다는 평으로 보인다.


하지만, 신앙 고백의 씬들에서, 카메라 위, 하늘 어딘가를 바라보는 버그만의 시선에서는 자신이 들은 계시를 이해할 수 없는 어린 소녀의 불안감이 그대로 느껴진다. 갑옷을 착용하고 오를레앙 전투에서 군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부르짖는 잔 다르크가 어색한 이유는, 실제 역사에서 그러한 일이 있었다면 몹시 이질적인 광경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버그만이 어색함을 의도적으로 연기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녀가 화면 위에 재창조해낸 소녀 잔은 전쟁터에서 몹시 어색한 인물이다. 오히려, 잔 다르크는 성당 내에, 감옥 내에 혼자 남아 신을 찾을 때 자신을 둘러싼 외적 요소에서부터 자연스러워지고, 신과 자신의 관계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다. 이 와중, 관객은 소녀의 얼굴에 집중하며, 눈동자의 흔들림과 입술의 떨림으로 신의 계시가 그녀를 찾아왔을지, 어떤 형태로 찾아왔을지 고심한다. 이 순간 관객은 버그만을 통해 15세기의 소녀의 정신과 맞닿아 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버그만이 선택한 순진무구한 소녀 잔 다르크는, 그 순수한 호소력으로 진정성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15세기의 소녀 잔 다르크가 신의 계시라고 믿는 영적 체험을 통해 프랑스를 구원했다는 비논리로 가득 찬 역사가, 이성보다는 감성으로 만들어져 대책 없는 낭만주의로 가득 찬 영화를 통해 소녀의 진심에 전이되는 경험으로 인해, 잠깐이나마 논리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영화적 마술이자, 21세기의 영적 체험이다.


로베르 브레송, 마리오네티스트

로베르 브레송 감독 [출처: The Guardian]


로베르 브레송 감독은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에서 드레이어의 〈잔 다르크의 수난〉(1928)의 팔코네티의 잔 다르크 연기를 비판했다. 그는 "감정의 구성은 감정에 대한 저항으로 결정된다"라는 연기론을 논하며 팔코네티의 연기를 다음과 같이 평한다.


진실에 대한 결핍 때문에 대중은 인조적 진실을 쫓는다. 드레이어의 영화에서 팔코네티가 시선을 천국을 향해 바라보는 행위는 눈물을 짜내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브레송의 영화론에 있어서 드레이어와 팔코네티가 보여준 드라마틱한 연기는 그가 추구하던 이상과 반대의 극에 위치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는 영화는 촬영된 연극(및 다른 모든 예술)과는 다른 형태의 독자적 미학을 추구해야 한다는 이상을 펼쳤는데, 그런 브레송에게는 심지어 팔코네티의 연기가 동시대 다른 무성영화의 배우 연기들보다 훨씬 더 은은한 편이라는 시대적 상대성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시작점과 목적지가 완연히 다르기 때문에 얼마나 과장된 연기를 하는가라는 정도의 차이는 브레송이 드레이어의 작품에 대하는 비평의 척도에 들어갈 수도 없다.


브레송은 영화가 개봉된 후 INA의 마리오 부나트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잔 다르크를 다룬 문학 및 영상 작품이 폭발적인 속도로 늘어나고 있음에도 자신이 이 영화를 굳이 만들어야 했던 이유는 잔 다르크를 현대에 배치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드레이어, 플레밍, 그리고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을 영상화 한 오토 프레밍거의 〈성녀 잔〉(1957) 모두 잔을 역사서 속에 존재하는 시골 출신의 순수하고 순박한 문맹 소녀로 해석하고 있지만, 브레송은 그녀의 전기에 담겨 있는 주변 인물들의 회고를 읽으면서 우아하고, 심지어는 현대적 감수성을 지닌, 살아있는 인간 여성을 포착했다.


마리오 부나트, 로베르 브레송 [출처: INA]


이 지점에서 브레송의 사관, 또는 그의 역사 예술관을 읽을 수 있는데, 그에게 있어 역사 영화의 목적은 과거의 재연(reenactment)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해 관객에게 말을 거는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에 가까웠다. 그는 〈잔 다르크의 재판〉을 연출하며 의도적으로 피했던 요소들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자신의 목적을 설명한다.


"연극" 또는 "가면 무도회"와 같은 효과를 품은 역사 영화를 거부하라. (내 작품인 〈잔 다르크의 재판〉에서 나는 "연극"과 "가면 무도회"를 피하고, 대신 역사적인 대사를 사용해 탈-역사적인 진실의 도출을 추구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역사 영화의 대상이 입었던 옷과 환경 등 세부적인 미장센에 신경쓰거나, 역사적 인물이 어떠한 감정을 느꼈을지 배우가 공감하는 순간 영화가 연극, 또는 가면 무도회와 같이 진실성을 상실한다는 연출론을 내새웠다. 이는 쉽게 설명하자면, 잔 다르크를 연기하는 그 어떠한 배우도, 실제 잔이 아니라는 간단한 사실에서 시작하면 훨씬 이해하기 쉽다. 팔코네티의 거룩한 슬픔도, 성화가 살아움직이는 듯한 버그만의 성스러운 아름다움도, 감독과 배우의 사견이 담긴 의도적 해석이며, 이는 연출가, 배우, 관객 모두를 기만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오히려, 의도를 가진 연기가 실제 살아갔던 잔 다르크와 관객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거리감을 조성하게 된다. 때문에 굳이 〈잔 다르크의 재판〉이나, 심지어는 역사 영화가 아니더라도 브레송은 배우에게 자동인형과 같은 연기를 요구했다.


"모든 동작은 우리를 드러낸다" (몽테뉴). 하지만 이는 그 동작이 자동적일때만 드러난다 (명령받지 않고, 의도하지 않음).


자동주의에 대해 논하기 위해 몽테뉴의 다른 글도 보자. "우리는 우리의 머리카락에게 솟으라고 명하지 않는다; 또는 살결에게 욕망이나 두려움으로 떨리라고 명하지 않는다. 우리의 손은 종종 우리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움직인다."


만약 잔 다르크를 연기하는 여배우가 자신의 추억이나, 개인사에서 빌려온 슬픔을 전이시켜 잔 다르크 역할 중에 눈물을 흘린다고 생각해본다면, 분명히 역사적 잔 다르크의 눈물과는 다른 표정과 형태로 표출되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허위적 영화를 경계한 브레송 감독은 배우를 역사적 기록에 남은 잔 다르크의 대사만을 전달하는 자동인형이 되어, 연출가가 지시한대로만 움직이고 제스처를 취하기를 원했다. 그는 오히려, 의도와 감정이 완전하게 결여된 상태에서 연기하는 잔 다르크가 더욱 진실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브레송은 부나트와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연출론을 설명하며, 전기공이 두 개의 전선을 연결하고 싶을 경우, 전선을 감싸고 있는 코팅을 피복하는 과정을 예시로 든다. 두 개의 전선의 연결이 감독이 영화 작품을 통해 이루고 싶은 목적이라면, 피복은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정수를 제외한 부수적인 모든 제반상황을 제거하는 작업이다. 의도된 연기, 고증에 대한 집착으로 완성되는 미장센이 제거되고 나면, 감독에게 카메라를 통해 자동인형들의 움직임을 기록해가며 역사가 문자로 남기지 못한 새로운 진실을 포착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브레송의 〈잔 다르크의 재판〉은 피복, 제거와 같이 뺄셈이 연상되는 개념으로 만들어 나간 미니멀리스트 역사극이다. 때문에 영화 길이가 보통 90분을 넘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는 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짧은 65분이라는, 간신히 장편 영화라는 분류를 넘은 러닝타임으로 간결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잔 다르크의 재판〉의 서사는 성녀를 영상에서 다룬 그 어떠한 작품에 비교해도 무게감이 떨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그 명료함 덕분에 잔의 본질에 가장 도전적이고 직접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브레송의 연출론은 대하사극, 역사 영화를 만드는 창작자, 그리고 이를 즐기는 관객에게 역사 영화의 의무 또는 목적성에 대한 재고를 주문한다. 역사 영화의 진실성(truth)이란 과거의 재연(authenticity)인가, 아니면 현실(reality)의 반영인가? 과거에서 출발해 현대에 도달해야 하는가, 현대에서 출발해 과거로 도달해야 하는가?


사람의 움직임

〈잔 다르크의 재판〉(1962) [출처: Cinema of the World]


〈잔 다르크의 재판〉은 1431년, 그녀가 이단의 혐의로 화형대에서 살해당한 지 25년이 지난 1455년, 그녀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트르담 성당에서 열린 복권 재판에서 잔의 모친 이사벨이 발표한 간청으로 시작된다. 카메라는 당시 77세라는 노령이었던 이사벨이 두 명에게 부축을 받으며 나아가 딸인 잔의 억울한 죽음을 고발하는 뒷모습을 담는다.


관객은 25년 전 딸을 잃었던 이사벨이 어떠한 표정을 지었을지, 눈물을 흘렸을지 알 수 없다. 다만, 이사벨은 담담한 목소리로 "내 딸과 그녀의 부모, 그리고 군주와 백성을 시기한 이들이 그녀를 이단으로 재판했고, 허위 죄를 뒤집어 씌웠으며, 부당한 죄목으로 그녀를 화형 시켰다"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화면은 드레이어의 〈잔 다르크의 수난〉과 마찬가지로 화면에 역사적 상황을 설명하는 텍스트가 스크롤업 된다. 재미있게도, 브레송은 드레이어와 같은 내용을 설명하고 있지만, 만약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을 읽고 본 작품을 접한다면 다분히 드레이어의 작품에 대한 의식이 느껴진다. 드레이어의 작품의 제목이 중세 가톨릭 특유의 멜로드라마틱한 명명법인 "수난(passion)"을 사용하지만, 브레송은 보도적 제목인 "재판(procès)"를 사용했다는 사실마저도, 본 작은 드레이어 작품의 안티테제로 읽힐 여지가 충분하다.


잔 다르크는 1431년 5월 30일에 죽었다. 그녀는 무덤도 없고, 그녀의 얼굴을 담은 초상화도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더 나은 초상화를 가지고 있다. 루앙의 재판관들 앞에서 그녀가 발표한 대답이다. 나는 재판 녹취록의 원본(authentiques de la minute)을 사용했다.


이 글은 브레송의 목적이 실제로 살았던 역사적 잔 다르크에 대한 추적이라는 제언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역사적 잔 다르크를 논의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미뤄왔던 질문을 마주해야 한다. 이는 드레이어와 플레밍의 작품들에서는 영상에 어린 열병과도 같은 감정이 전이되면서 관객의 신앙 여부와 관계없이 주술적 황홀경에 도달했기 때문으로 본다면, 브레송은 자신의 시네마토그래프 철학을 통해 본인이 선언한 대로 잔 다르크 이야기를 접하는 대다수 현대인들의 정신을 사로잡는 진실에 관한 질문을 하기 위해 다른 모든 부가적 요소를 피복하는 데 성공했다고 해석이 가능해진다.


도대체 어떠한 사람이기에 신이 부재한 물질 세상에서 잔 다르크는 기적과도 같은 일을 행했는가?


다시 영화의 시작으로 돌아가 보면 브레송 감독은 팔코네티가 연기한 잔 다르크를 담기 위해 필름을 초상화로, 카메라를 붓으로 사용했던 드레이어에게 위 질문에 대한 진실은 화면이 아니라 녹취록 안에 있다고 반론하는 듯하다. 때문에 작품의 속도감을 위해 재판의 내용을 축약하고 편집한 드레이어와는 다르게, 브레송은 매일 심문이 끝날 때마다 잔(플로랑스 델라이)이 재판장에 들어오고 나가는 모습을 편집 없이 모두 보여준다. 잔의 손과 발을 묶은 사슬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쨍그랑 거리며 씬의 시작과 끝에 모노톤의 리듬감을 부여한다.


브레송은 팔코네티의 잔이 눈물과 회한이 어린 눈으로 모든 질문의 대답에 하늘을 바라보던 연기를 "그로테스크한 광대짓"이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거부했다. 드레이어의 작품에 대항하듯이, 플로랑스 델라이의 잔은 심문관들의 질문에 있어 하늘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들의 질문에 시선을 돌리지 않고 대답하거나, 땅을 바라본다.

영화 개봉 당시 21세의 대학생이었던 델라이는 3년 전 개봉한 〈성녀 잔〉에서 데뷔작으로 같은 인물을 연기한 19세 진 시버그와 함께 실제 역사의 잔과 비슷한 나이대에 캐스팅되었다. 이 전의 팔코네티나 버그만이 연기 당시에 30대 중반이었음을 상기해보면 오히려 특이한 경우였는데, 정형화된 연기 체계를 가진 정식 배우를 기용하지 않았던 브레송의 연기 철학에 호응하듯 이 작품 이후에는 연기 활동을 하지 않고 소설가로 데뷔했다.


잔 다르크(플로랑스 델라이), 〈잔 다르크의 재판〉 [출처: Cinema of the World]


여기서 브레송의 연기론으로 잠시 돌아가 보자면, 브레송은 부나트와의 인터뷰에서 직업 연기자를 기용하지 않고 플로랑스 델라이를 잔으로 캐스팅한 이유에 대해 "영화에서는 관객은 인물(캐릭터)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어떨 때는 배우가, 어떨 때는 인물이 보이면 안 된다. 배우는 항상 연기와 그의 예술, 어찌 보면 스크린 뒤에 완전히 숨어야 한다"라고 대답하며, 부나트가 영화 세계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항상 새롭고 진실되어야 하기에 브레송 영화에 출연한 배우 대부분은 영화 이후에는 직업으로 배우를 포기하냐고 질문하자 정확하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다시 말하면, 자동인형이든, 신인 배우 기용이든, 진실성 추구를 위한 방법론에 불과하다. 여기서 말하는 진실성이란 어떤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 영화라는 이미지에 기록되는 꾸미지 않은 순간들과 인물들이 순수하게 상호 작용하는 모습이다.


우리의 영화는 누군가 도심지, 시골, 집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 슬픔, 등등을 지녀야 한다. 이는 도심지, 시골, 집의 사진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 슬픔, 등등과는 분리된 개념이다.


베르송 감독에게 하나의 순간을 영원에 복제하는 사진, 반복된 움직임 안에서 활력을 찾는 연극 등, 다른 예술과는 다르게 영화는 현실을 그대로 담을 수 있는 매체였다. 때문에, 브레송의 영화, 시네마토그래프에는 인간에 대한 진실이 허구 없이 그대로 담겨야 한다. 영화와 현실 간의 경계가 무너져야 한다. 배우가 연기한 잔 다르크가 아니라 잔 다르크라는 인물이 실제로 살아갔다는 진실을 전달하기 위한 용기(vessel), 이번 영화에서 델라이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델라이는 추후 본 작품에 관한 인터뷰에서 잔을 "임무수행에 매진한 용감한 여성"이라고 평했는데, 이를 단서로 브레송이 포착한 잔을 따라가 보자.


피에르 코숑(장-클로드 푸노), 〈잔 다르크의 재판〉 [출처: Cinema of the World]


매일같이 방대한 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잔의 대답에서 교리적 오류를 찾아내기 위질문들이 던져진다. 브레송의 잔은 드레이어의 잔과 다르게 대답에 있어 고민하거나 망설이지 않는다. 녹취록의 질문과 대답에서 검투를 연상했다는 드레이어보다 훨씬 더욱 리듬감 있게 질의응답이 연속된다. 재판관들을 능숙하게 상대하는 잔의 모습에서는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해진다. 그녀의 대답에 막힘이 없는 이유는 잔이 신의 계시를 들었다는 신념에 완벽하게 잠식되어 (델라이의 해석처럼) 그 신념을 이루기 위한 임무감이 두려움을 완벽히 압도했거나, 아니면, (영화의 세계 안에서) 신이 실제로 존재해 그녀에게 대답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일 재판장에서 담대하게 신학자들을 상대하던 전사 잔은 자신의 감옥으로 복귀하면 한 명의 인간으로 돌아온다. 이곳에서, 우리는 철저하게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재연된 재판장의 액션과는 다르게, 브레송 감독이 연출한 상황과 마주한다. 잔이 갇혀있는 감옥의 석벽에는 작은 구멍이 나 있는데, 코숑 교주(장-클로드 푸노)와 다른 잉글랜드의 장교 및 신학자들이 잔을 감시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잔 다르크(플로랑스 델라이), 〈잔 다르크의 재판〉 [출처: IMDb, Critikat]


하지만 관객은 이 작은 구멍을 통해 잔을 바라보는 익명의 눈동자, 관음적 시선을 보면서 기이한 동질감을 느낀다. 감옥으로 돌아가 혼자의 시간을 보내는 잔이 과연 어떠한 행동을 할지, 어떠한 태도를 보일지, 그녀가 눈물을 흘릴지, 한숨을 쉴지, 아니면 혹여나 신의 계시라고 여겨지는 기적을 경험할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의심의 눈초리는 역사의 잔을 바라보는 현대 관객의 관점과 동일하다. 그렇기 때문에 잔의 감옥 창문을 깨고 들어온 돌멩이를 무심하게 들었다 떨어뜨리는 잔의 모습을 구멍 바깥에서 바라보던 카메라와 잔의 눈이 마주치는 숏에서, 관객은 그 카메라가 대신하고 있을 인물들을 대신해 소스라치게 놀란다.


잔이 영화 속의 인물과 시선을 마주쳐 관찰을 들키는 상황이 아니라 15세기의 소녀가 잠시 20세기(현재 영화를 보고 있는 시대)의 관객과 눈을 마주친 듯한 기묘한 경험을 제공한다. 이 숏의 직전에 창문이 돌멩이로 깨지는 숏이 있었음을 상기해보자. 감옥과 바깥, 영화와 관객, 두 공간을 갈라놓았던 창이 깨지고, 두 시선이 마주한다. 이 시선의 조우로 인하여 이전까지 어떤 종교적, 지적인 호기심으로 사태를 방관하던 관객은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일부로 편입된다.


카메라 바깥이 아니라, 15세기 루앙의 재판장에 함께 선 관객은 잔 다르크의 남은 재판을 함께 경험하고, 잔을 화형대로 보내며 초반의 질문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 잔 다르크는 어떠한 사람이었기에 기적과도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었는가? 재판장에서 자신을 둘러싼 칼날과도 같은 타인의 교조적 시선 앞에서는 담대했고, 감옥에 혼자 남아있었을 때는 신을 간구하던 소녀였다.


이러한 대답은 표면적으로는 잔 다르크를 다룬 드레이어, 플레밍의 작품을 관람 이후에도 가능하다. 하지만, 브레송 감독은 그런 잔이 가시적으로 화면 안에 존재했다는 역사 지식에 기반한 대답이 아니라, 그런 잔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신념을 연출한다. 역사 영화가 다루는 과거가 재연이 아니라 현실이기를, 현대에서 과거에 대한 향유를 경고하고, 대신 과거에서 현재까지 모든 시간대에 동시에 존재하기를 주문하고 있다. 브레송 감독 본인은 환원적 수식어인 미니멀리스트라는 호칭을 몹시 싫어했으리라. 다만, 잔 다르크를 다룬 타 작품과 비교적 차원에서 미니멀한 그의 작품에서, 독보적으로 초월적인 경험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드레이어의 세계에 숨 쉬던 모든 이들이 죽었다는 장송곡에 가까운 감정을 경험하고 만난 〈잔 다르크의 재판에서는 브레송의 세계를 배회하는 모든 이들이 소리를 내고 움직이며 살아있었다는 생에 대한 확신이 차오른다.


마침

뤼미에르 형제와 함께 영화의 시조라고 불리는 조르주 멜리에스의 〈잔 다르크〉(1900)는 지금도 유튜브나 위키피디아 등에서 복원된 영상물을 후대의 애호가들이 재해석한 사운드트랙과 함께 관람할 수 있다. 멜리에스 본인이 잔(잔 칼비에르)의 부친, 삼촌, 로베르 드 보드리쿠르 등 다양한 조연으로 분해 출연하기도 했던 이 작품은 11분 남짓한 짧은 시간 안에 잔의 생애를 모두 담고 있다. 물론 이 작품에서 사용된 특수효과나 편집 및 촬영 기술은 시대를 감안해 놀랍다고 평하지만, 작품을 보다 보면 콕 집어서 설명하기 힘든 경외감이 차오른다. 현대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900년에 도달한 시간여행자처럼,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기적을 경험한 듯한 기분에 경도된다.


조르주 멜리에스 감독, 〈잔 다르크〉(1900) [출처: Wikimedia Commons]


사진을 고속 영사함으로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대상이 살아있다는 허구적 감상이 현실적 논리와 경계를 비틀어, 관객에게 그들이 알고 있는 물리 세계의 법칙을 접고, 자신을 속이는 행위, 디제시스로 진입이 가능하도록 돕는다. 그렇다면, 영화는 본질적으로 창작자와 향유자 쌍방의 합의로 자기기만을 요구하는 예술이다.


잔 다르크의 역사적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영화를 관람하는 순간과 유사한 종류의 기만, 마술적 상상력이 요구되고 있지 않나라는 감상이 든다. 영화 역사의 시작점인 칼비에르-멜리에스부터, 팔코네티-드레이어, 버그만-플레밍, 델라이-브레송을 비롯한 수많은 배우와 감독들이 무언가에 홀린 듯이 잔 다르크의 이야기를 재창조하고 있는 행위는, 기만의 반복 중에 기적과 구분할 수 없는 마술을 잠시나마 화면에 가두기 위한 바람이 무의식 중에 작용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혹은 이 바람은 잔 다르크의 역사를 섭렵하고, 그녀의 전기를 읽고, 그녀에 대한 영화를 반복 관람하는 관객-연출가의 무의식 중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끝)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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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esson, R., Griffin, J., & Clézio, L. J. (2016). Notes on the Cinematograph (New York Review Books Classics) (Main ed.). NYRB Classics.

Hayman, R. (Summer 1973). "Robert Bresson in Conversation". Transatlantic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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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yer, C. T. (1999, November 8). Realized Mysticism in The Passion of Joan of Arc. The Criterion Collection. https://www.criterion.com/current/posts/69-realized-mysticism-in-the-passion-of-joan-of-a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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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nsen, T. S. (1995). Dreyer about The Passion of Joan of Arc. CARL TH. DREYER - THE MAN AND HIS WORK. https://www.carlthdreyer.dk/en/carlthdreyer/gallery/film-and-film-clips/dreyer-about-passion-joan-arc

Sarmiento, J. (2012, March). Voices With(out) a Face: On Robert Bresson’s Procès de Jeanne d’Arc. Senses of Cinema. https://www.sensesofcinema.com/2012/cteq/voices-without-a-face-on-robert-bressons-proces-de-jeanne-da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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